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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구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리다

글/ 쓰촨(四川) 대법제자

[밍후이왕] 예전에 저는 약골이었습니다. 1982년에 아이를 낳다가 전치태반 출혈로 제왕절개 후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게 됐습니다. 수술 후 심한 장 유착을 일으켜 자주 복통과 요추간판이 돌출돼 하지 신경을 압박했고 늘 요추에 의지해야만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각한 것은 경추의 골 증식으로 추간공이 3분의 2나 막힌 것입니다. 목의 혈관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뇌동맥 경화, 뇌빈혈을 초래해 오랫동안 아팠습니다. 양쪽 경동맥 경화로 뇌 혈액 공급이 부족해 장기적으로 무수면 상태였고 머리카락마저 빠져서 정수리가 보였으며 앙상하게 여위였습니다. 저는 157cm의 키에 질병에 시달린 후 몸무게가 약 35kg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1979년 위생학교를 졸업하고 현의 한 산간 병원으로 배정돼 근무하게 됐습니다. 발병 후 원장은 제 병세가 너무 심한 것을 보고 직접 우리 집으로 와서 제게 “당신은 휴가를 신청하지 않아도 돼요. 서둘러 남편 있는 곳으로 가요[남편은 주(州)시급 직장에서 근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 곁으로 돌아간 후, 몇 개월 동안의 치료를 거쳐 어느 날, 어머니가 제게 “얘야, 주급의 모든 병원, 중의원까지 네가 모두 입원해봤잖아. 네 병은 호전이 없어서 장례를 준비해야 할 것 같구나. 사후에 네가 어떤 옷을 입고 싶으면 내가 잘 준비해놓을게. 괜히 그때 가서 온종일 허둥지둥할 필요 없이 말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퇴원했다가 입원하고 또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하면서 몇 년을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성 밖의 개인병원에까지 찾아가 몇 개월 동안 입원해봤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보살핌이 필요한 관계로 나중에 남편 직장으로 옮겨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1992년 5월 4일 저는 기쁘게도 법을 얻었고 일주일 연공하자 머리가 아프지 않았고 배도 안 아팠습니다. 몸은 나날이 호전됐고 저는 마음이 무척 기뻤습니다. 일요일이면 읍내로 가서 연공하는 친구들과 함께 법을 배우고 연공을 하면서 매우 자유롭게 지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공산당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의 노동조합 위원장은 우리 몇몇 수련생을 공장 사무실로 불러 회의를 열었습니다. 협박하기도 하고 서명도 하라고 했습니다. 하늘 전체가 먹구름에 짓눌린 것처럼 수많은 수련생이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수련생들 간에 만나더라도 감히 인사도 건네지 못했으며 이렇게 고압적 분위기에서 저는 줄곧 대법을 확고히 믿어왔습니다. 가끔 대법의 일부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직장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접촉하게 되는 수련생도 적었습니다. 온종일 직장 일과 집안일에 바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법공부도 게을리하게 됐습니다. 2011년 제 두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는데 당뇨병이 원인이었습니다. 양쪽 눈 모두 시력 검사표 위의 가장 큰 글씨 E자만 볼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양쪽 눈 모두 수술(두 눈 모두 렌즈 교체)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당뇨병에 일단 걸리기만 하면 평생 인슐린을 맞고 약을 먹는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2013년이 되자 제 몸은 또 법을 얻기 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렇게 계속되면 안 됐습니다. 저는 다시 새롭게 수련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공부와 연공을 따라가지 못했고 법을 15페이지까지 외우고서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 외우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아직 퇴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집에서는 작은 공장 하나를 운영했습니다. 채소를 심고 닭 먹이를 주며 오리 먹이를 주고 장터에서 채소를 팔았으며 밥을 짓고 손자를 돌보면서 모든 집안일을 저는 전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정진하면서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했고 9개월 뒤 제 몸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2016년 2월까지 저는 정말 아파서 안 될 지경에 이르렀고 손발이 떨려서 젓가락으로 요리마저 집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연공할 때는 온전히 서 있기 힘들었고 거실에서 화장실까지 10m도 안 되는 거리를 저는 중간에 잠시 쉬어가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제게 “당신 모습을 좀 봐. 눈을 감으면 죽은 사람 같아”라고 알려줬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엄마가 일찌감치 제게 말해줬어요. 저는 이미 죽었지만, 아직 묻히지 않은 산 사람이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에 저는 낮잠을 잤습니다. 사실 저는 잠에 들지 않았고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제 침실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와 손을 뻗어 제 코에 대고는 숨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보고 나서 다시 손을 거두었습니다. 몇 초 뒤에 또 시도했습니다. 반복적으로 몇 번이나 시험해보자 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죠?” 남편은 “당신 지금 이 모습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내가 와서 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 때문에 또 화시 병원(華西醫院)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몇 년간 늘 이랬고 화시 병원을 여러 번이나 오가며 저는 현지 병원에서 단골이었습니다. 한 번은 현지 병원에서 신부전증으로 오진을 받고 많은 돈을 썼습니다.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았고 당시 혈압은 52/30이었습니다.

2019년 3월 18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낮잠을 자려고 하다가 머릿속에 갑자기 “속인의 마음 내려놓고 법(法) 얻으면 신(神)이로다 삼계를 벗어나 하늘에 올라 부처의 몸으로 타고나도다”(홍음-중생을 널리 제도하다)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갑자기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홍음’의 시입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여전히 저를 상관해주고 계셨습니다! 저는 침대 위에 누워 이 몇 년간 제가 겪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이켜보았습니다. ‘20여 년이 됐지만 나는 왜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한사코 속인의 명리정(名利情)을 붙잡고 내려놓지 않는가?’ 저는 늘 속인의 것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법공부를 할 때 어떻게 마음에 들어오도록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법리를 깨우칠 수 있었겠습니까? 입으로는 신사신법(信師信法)한다고 하지만 저는 행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부님 법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았습니다. 부끄러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저는 마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부모를 만난 아이처럼 한참이나 슬피 울었습니다. ‘사부님께 죄송합니다. 제 세계에 있는 중생에게 죄송합니다. 저를 도와준 적 있는 수련생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 저는 사부님께 “오늘부터 저는 일체를 모두 사부님께 맡기겠습니다. 생사를 완전히 내려놓고 끝까지 수련해나가겠습니다. 사부님 따라 집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사부님께 먹칠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 세 번째로 약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이 알게 된 후 시끄러워지는 것과 대법에 대한 영향이 나빠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15개월 동안 매일 먹던 약을 타구(痰盂)에 버렸고 매일 두 번씩 맞던 주사약을 화장실 휴지에 짜서 버렸습니다. 수련생도 제게 “당신은 그래도 가족에게 알려줘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남편에게 매우 알려주고 싶었지만, 매번 약의 양을 줄이겠다고 말을 시도해 볼 때마다 남편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미친 듯이 화를 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제가 사용하는 인슐린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다음 날 또 사진을 찍었고 이틀 동안의 약의 양을 비교해보고 주사기 안의 약이 조금도 줄지 않은 것을 확인했습니다(마침 이 이틀 동안 저는 약을 짜서 버리지 않았고 면봉에 알코올만 묻혔을 뿐 피부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함). 남편은 또 제가 사용한 면봉을 주워서 담아두며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아침에 주사를 맞았어?” 저는 “맞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내가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당신은 오늘 아침에 주사를 맞았어?” 저는 “맞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곧장 휴대폰을 열고 이틀 동안의 약의 양을 비교한 것과 면봉, 그리고 새 면봉을 비교하면서 얼굴이 잿빛이 될 정도로 화를 냈습니다. 욕을 하고 또 해서 마치 지붕이라도 뜯겨나갈 것 같았습니다. 저는 남편과 결혼한 39년 동안 한 마디도 저를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아껴주던 남편이 놀랍게도 사람을 때렸습니다. 남편은 제 뺨을 때렸고 저는 이가 부러졌습니다. 남편은 더러운 말을 내뱉으며 저를 구르게 했고 기게 했습니다.

저는 이 두려움을 마땅히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과 싸울까 봐 두려워 감히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 손으로 사람을 잡고 놓지 않았고 한 손으로는 신을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즉, 진(眞)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 죄송했습니다. 오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생각하고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니 반드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전법륜)를 해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서히 남편은 싸우다가 지쳐서 그만뒀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약을 끊게 된 전후사정과 제 신체적 변화, 그리고 제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늘 사악한 공산당의 거짓말들로 저를 반박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남편에게 이치를 설명해주었고 이렇게 말하다보니 아침 7시부터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마지막에 저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 거짓말들을 믿어요? 저는 당신의 아내에요. 멀쩡히 살아있는 한 사람이고 당신과 늘 함께 지내는 사람이에요. 제 신체적인 변화를 당신은 볼 수 있잖아요. 당신은 전부 믿지 않고 그런 거짓말들을 믿으려 하네요. 당시 초기에 의사는 당뇨병, 갑상선 기능 항진증은 한 번이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15개월이 됐어요. 약 한 알 먹지 않아요. 지금의 실증과학이 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대법의 신비로움이 아니고 뭔가요? 걸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고 반찬마저 집을 수 없으며 온몸이 떨리고 두 발은 무릎까지 부으며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되고 오른쪽 눈은 절반의 시력만 갖추게 됐으며 양쪽 경동맥 경화로 매일 아프고 불면증으로 심장이 큰 돌에 억눌린 것 같고 목욕을 하면 반나절 동안 회복되지 않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내가 지금 살아서 뛰어다니다시피 당신 앞에 있어도 당신은 전부 안 믿어요. 당신은 무엇을 믿으려 해요? 당신은 정말 한밤중에 제가 잠자리에 한가득 실수해서 당신이 빨래를 해야 했던 그런 날들을 보내고 싶어요? 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온 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날들을 보내고 싶어요? 예전에 늘 화시 병원을 오가며 약 처방을 받고 수백 위안(수만 원), 수천 위안(수십만 원)의 영수증을 받으면 집에는 저축이 한 푼도 없는 그런 날을 보내고 싶어요? 무슨 집안 일이든 모두 당신이 하던 날들을 보내고 싶어요? 지금 저는 의료 카드 돈을 모두 남겼어요. 이건 좋은 일 아닌가요? 저는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이것은 모두 대법이 우리 집에 가져다 준 복이에요. 당신은 대법 사부님과 대법에 감사하지 않고 당신의 이 태도는 대법 사부님께 떳떳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어요?” 사실 앞에서 남편은 부끄러워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저는 이 대법을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제 이 목숨은 대법을 배워서 수련한 거예요. 약을 끊은 날부터 시작해서 제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상관해주시는 거예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남편은 “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더는 당신을 상관하지 않을게. 당신은 잘 수련해 봐!”라고 말했습니다. 한 번 이야기하다 보니 6시간이 걸렸고 이렇게 저는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가끔 “너무 소홀히 하지는 말아. 당신은 가끔씩 그래도 혈당 측정을 해봐야 해”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남편에게 “앞으로 다시는 혈당 측정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지 말아요. 혈당을 측정하는 것은 신사신법하지 않는 거예요.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불경이에요.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루에 7번씩 혈당을 측정했지만 소용이 없었잖아요? 측정할수록 더 심해졌잖아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남편은 “하지만 가끔 당신에게 약간의 작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좀 고통스러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이것은 소업하고 있는 거예요. 사부님께서 저의 업력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을 거예요. 일부분 남겨둔 것은 제가 매번 한 층차 제고할 때 심성 시험을 건널 때 사용하는 거예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남편은 손으로 지금 부어있는 제 종아리를 만져보고(저는 예전에 전혀 종아리가 없었으나 지금 몸이 좋아져 살이 올랐기 때문)는 이렇게 좋은 신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며 입으로 중얼거리며 안심하고 웃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몹시 후회가 됩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과 세 가지 일을 너무 적게 해서 후회합니다. 지금 매일 나가서 대면해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고 있습니다. 저의 유일한 방법은 곧 더욱 정진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고심(苦心)하셔서 저를 구해주신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여러 해 동안 제게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도와주며 격려해주신 우리 수련생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0년 1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1/22/4148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