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대 구분을 통해 진정한 중화문명을 인식하다 (5)

글/ 명간(明簡)

[명혜망](이전 편에 이어)

4. 세 가지 문명 개념의 차이를 구분해 진정한 중화문명을 찾다

현재 5천 년 문명은 이미 그 말단을 지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5천 년 문명의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이 ‘문명’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거대한 차이가 생겼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는 세 가지 다른 문명 개념을 동시에 명확히 보아야만 중화 전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중화 전통문명이 아닌 다른 문명 개념에 가려지고 덮여, 아예 진정한 중화 전통문명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세 가지 개념인가? 첫째는 중화 전통문명이고, 둘째는 중화 치세(治世)문명이며, 셋째는 정치문명이다.

1) 중화 전통문명

먼저 중화 전통문명에 대해 말해보자. 이것이 바로 중화 상하 5천 년의 내적 맥락을 구성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문명이다. 그 기원은 신(神)의 전수, 성왕(聖王)의 깨달음, 조상의 계승에 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문명이 ‘회천위본(回天爲本-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음)’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특성을 이해한다면 중화민족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역대 중화 문화에서 가장 경모받는 성현(聖賢)들은 항상 정신적 고양을 물질적 획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을까? 왜 중화의 상고(上古) 성왕인 헌원(軒轅) 황제는 대낮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적을 남겼을까? 그는 어떻게 이런 기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왜 중화민족은 로마와 같은 패권 확장 경로를 걷지 않고, 요(堯)·순(舜)·우(禹)부터 시작해 하(夏)·상(商)·주(周)·진(秦)·한(漢)·당(唐)을 거쳐 송(宋)·원(元)·명(明)에 이르기까지 문화 수출의 길을 걸었을까 등이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황금 열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중화문명’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바다. ‘중화문명’이라는 개념은 우선 ‘문명(文明)’ 두 글자를 핵심으로 삼는데, 그 함의는 ‘넓고 크고 정밀하고 깊으며, 사방을 비춘다(博大精深, 照耀四方)’는 것으로, 이를 통해 얕고 썩어 문드러진, 사방을 비추는 유형에 속하지 않는 나쁜 것들과 일반 사물을 구분했다. 그다음으로 ‘중화(中華)’ 두 글자를 표지로 삼는데, 그 함의는 ‘중앙 문명의 국토에 사는 염황(炎黃)의 자손(화하 문명의 계승자)’이라는 뜻으로, 이를 통해 세계 다른 민족의 문명과 구분했다. 따라서 ‘중화문명’ 개념이 가리키는 것은, 중화라는 이 땅에서 펼쳐지고 전해졌으며 염황 등 역대 성왕들이 남기고 역대 조상들이 계승해 온, 가장 위대하고 빛나며 마음과 눈을 비추는 좋은 것들이다.

중화문명과 세계의 많은 다양한 문명은 공통점이 아주 많다. 모두 매우 우수한 부분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화문명이 가진 ‘회천위본’의 특징은 세계의 다른 문명에는 기본적으로 없는 것이다. 이것이 중화문명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과 눈을 부시게 하는 부분이며 중화문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기초 배양부터 발아와 성장, 그리고 개화와 수확에 이르기까지 중화문명 5천 년을 융관(融貫)하며 사계절을 관통했고, 생명의 빛남과 수렴을 보여줬으며, 마지막에는 여전히 씨앗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중화문명의 진정한 본질이자 내적으로 융관하는 맥락이다.

2) 중화 치세문명

다음으로 중화 치세문명에 대해 말해보겠다. 제곡(帝嚳) 이래로 요순우, 하상주를 거치며 중화 천하에는 예악(禮樂)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치국이정(治國理政) 체계가 형성됐다. 당시 중국에는 ‘과학’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오직 대도(大道)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신앙과 이 신앙 아래에서 도인(道人)이 제자를 가르치고 가문이 계승함으로써 구성된 광범위한 지식 체계, 즉 천문, 음악, 역사, 제사, 군사, 건축 등만 있었다. 당시의 체제는 서로 다른 가문이 각자 일정한 직무를 맡아 대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당시의 가문 계승 자체도 관학(官學)의 한 표현이었다. 이외에도 국가는 전문적으로 관학을 두었다. 예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주로 사도(司徒)가 책임졌는데, 사실 이는 국가 통치의 일부분이었다.

황제가 창시하고 설명했기 때문에, 중화의 전체 치국 체계는 ‘회천위본’을 최고 가치 지향으로 삼았고, 사람들의 도덕적 심성을 높이고 음양을 조화시키며 성정을 균형 잡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건축 사공(司空), 군사 사마(司馬), 국가 제사, 귀족이 예를 갖춰 서로 왕래하는 것 등 사실상 이 맥락, 이 가치 지향이 모두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화 치세문명이다. 중화 치세문명이 점점 더 성숙해짐에 따라 하상주 세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시간도 갈수록 길어졌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대도분열(大道分裂)’ 현상이 나타났다. 사실 대도 자체는 분열되지 않았고, 단지 춘추시대에 사학(私學)이 출현하면서 많은 학자가 점차 ‘회천위본’의 가치 지향에서 벗어나 각자 다른 근본 가치를 갖게 됐을 뿐이다. 예를 들어 법가(法家)는 정치적 강국과 군주 옹립을 근본으로 삼았고, 묵가(墨家)는 현세의 겸애(兼愛)와 평화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종횡가(縱橫家)는 명예와 이익을 근본으로 삼았고, 음양가(陰陽家)는 연산(演算-음양오행으로 천지·기후·인사(人事)의 변화를 추산하는 것: 역주)을 근본으로 삼았다. 오직 유가(儒家)의 공자(孔子)와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만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가치 지향을 유지했지만, 유가도 표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련의 학술 인물들의 입장이 상고의 대도에서 벗어났기(혹은 벗어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를 대도분열로 간주했고 학자들은 각자 자기주장을 고집했다.

대도가 분열될 즈음, 공자는 예악을 핵심으로 하는 치국 이론과 기술을 총결하고 계승해 제자들에게 전수함으로써 유학을 형성했다. 공자가 전수한 육예(六藝)의 기술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가 포함됐고, 이론 교재에는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 역사와 현실에 대한 평론)가 포함됐는데, 사실 이는 예악의 기술, 예악의 정신, 그리고 그 시대에 갖춰야 할 중요한 근본 소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공자는 “사람이 인(仁)하지 못하면 예(禮)를 어찌하며, 사람이 인하지 못하면 악(樂)을 어찌하랴?”라고 강조하며, 전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예악의 기술과 정신을 전수했는데, 사실상 여전히 상고의 대도와 일치하는 ‘회천위본’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는 유학이 맡아야 할 책무(유가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본분으로 삼음)에 부응하기 위해, 서주(西周) 시대에 확립된 ‘이덕위본(以德爲本, 덕을 근본으로 삼음)’의 문화적 특성을 계승하고 자신의 설명 영역을 스스로 축소했다. 표면적으로는 “선생님께서는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子不語怪力亂神)”, 심지어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거의 논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子曰敬鬼神而遠之)”라고 한 것 등이다. 사실 인류 차원을 초월한 귀신 등 현상에 관해서는 수도(修道) 방면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으며, 공자는 유학의 시조로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유학은 비록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가치 지향을 확실히 유지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 부분 또한 중화문명의 치세지학(治世之學)에 속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미 한(漢)나라 이후 동중서(董仲舒)가 유학을 부흥시킬 때, 춘추전국시대 음양가의 사상, 오행학설 등을 융합해 신유학(新儒學)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참위(讖緯, 예언이나 신비주의적 경전 해석)의 학문도 유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유학에 통합됐다. 사실 한나라 이래로 역대 황실은 공자의 이론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유(儒)·법(法)·도(道)·석(釋) 등을 겸용했으며, 각 시기, 각 왕조와 국가마다 편중됨이 달랐다. 사실 더 이른 전국시대에 공자의 영향력은 천하 각국에서 매우 컸고 대다수 국가는 성인 공자, 나아가 공자의 제자들을 매우 존경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각자 다른 선택을 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말해, 공자가 학당을 열어 제자를 가르치고 고대 예악 문명을 보존하고 총결한 이후부터 청(淸)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은 줄곧 중화 치세지학의 가장 핵심적이고 주도적이며 가장 존중받는 부분이었지만, 중화 치세지학의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치세이정(治世理政) 자체를 목표로 삼고 진심과 성의를 다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최우선으로 두거나 겉과 속이 다른 짓을 하지 않고 형성된 방법과 책략, 지도사상, 구체적 성과라면 모두 치세지학에 속했다. 그 내용은 가문, 윤리, 예악, 법률, 생산, 군사 등 많은 방면을 포괄하므로 당연히 유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서주 이전에 날로 완비되어 가던 치세지학과 춘추 이후 중화 국가의 각종 치세지학을 합쳐 전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지도를 위해 쓰인 서로 다른 단계의 학설 내용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 생활에서 미친 영향과 작용도 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바로 중화 5천 년의 치세문명이다.

3) 정치문명

다음으로 정치문명에 대해 말해보겠다. 고대 중화사회에서 사람들이 문명에 대해 가졌던 이해는 모두 황제와 요순우가 남긴 풍범(風範)과 이런 풍범이 역대 왕조에 미친 아름다운 영향이었다. 이런 인식 상태는 줄곧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중국 고대에도 권력을 위해 서로 속이고 각종 수단을 이용해 권력과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일이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당시, 특히 유가 정통의 시각에서는 이를 문명으로 보지 않고 일괄적으로 추악한 현상으로 여겨 폄하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현대로 접어들면서, 현대인들은 그런 이른바 ‘추악한 현상’들도 모두 발생 원인이 있다고 여겨 인류 문명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게 됐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부와 권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도시 규모가 크고, 생산력 수준이 높으며, 사회 조직 능력이 강하고, 권력 구조의 계층 분화가 명확하며, 빈부 계층의 뚜렷하고 거대한 양극화가 존재하기만 하면…… 모두 흥미진진해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당대에 반드시 알아야 할 세 번째 개념이 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문명이다.

이른바 정치문명이란 권력과 이익을 핵심 초점으로 삼아 사회 현상을 총결, 귀납, 심시(審視)함으로써 형성된 ‘중화의 국가와 역사, 인성과 운영체계 등은 어떠한가’에 관한 인식이다.

(계속)

 

원문발표: 2026년 8월 17일
문장분류: 천인사이(天人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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