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명간(明簡)
[명혜망] (이전 편에 이어)
(5) 계속되는 검증: 5천 년 문명 내의 4시 8단 구분
둘째, 더 상세한 4시 8단 구분이다. 이른바 4시란 춘하추동을 가리키며, 8단은 4시를 각각 전후 두 단락으로 나눈 것이다. 8단의 명칭에 대해서는 기존의 다른 명사와 구별하기 위해 춘전단(春前段), 춘후단(春後段), 하전단(夏前段), 하후단(夏後段), 추전단(秋前段), 추후단(秋後段), 동전단(冬前段), 동후단(冬後段)으로 부르기로 한다.
<동후단>
염제(炎帝) 시기부터 황제(黃帝)를 거쳐 전욱제(顓頊帝) 시기에 이르는 기간은 이전 문명 시기 이후의 동후단으로, 사실상 이번 문명의 시작이다. 겨울은 수장(收藏)하는 계절로 그중에서도 다시 전후단으로 나뉜다. 겨울의 전반부는 음기가 가장 왕성하고 양기가 가장 억눌려 잠복하는 시대로 순수한 장복(藏伏) 단계다. 반면 겨울의 후반부는 양기가 생겨나기 시작해 잠복 속에서도 생발(生發)을 포함하는 시기다.
염제와 황제, 전욱제 시기에 중화의 새로운 문명의 양기가 움트기 시작했고 중화의 새로운 문명의 성격이 규정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동지, 소한, 대한의 세 절기에 해당한다.
<춘전단>
제곡(帝嚳)부터 요순(堯舜) 시기를 거쳐 대우(大禹)의 치수, 그리고 하(夏)나라의 대부분 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춘전단이다. 이 시기는 마치 천지가 해빙되고 만물이 소생하며 초목이 싹트듯 생기가 넘치는 시기다.
이 시기의 초기 부분은 유가 ‘예운(禮運)’에서 말하는 ‘대도가 행해지니 천하가 공평하다(大道之行也天下爲公)’는 시기였고, 중화 문명이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지 탐색하는 시기였다. 요임금의 광휘는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중화 민족의 영원한 기억이 됐다.
순임금은 예제(禮制)를 창시했고, 동시에 형벌 및 형벌의 자비로운 운용을 창안했다. 대우 치수 이후 형성된 하나라 가천하(家天下) 체제는 중화 민족의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국가 형태를 마련했다. 중화의 새로운 문명의 근본 내용과 체제적 윤곽이 이로써 구성됐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입춘, 우수, 경칩 시기에 해당한다.
<춘후단>
하나라 말기부터 상(商)나라 건국, 상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가 춘후단이다. 이는 만물이 싹튼 후 가지가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며 봄기운이 짙어지는 시기다.
중화의 예제는 이 시기에 요약되고 완성됐다. 하나라는 충직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을 숭상했고, 상나라는 신을 공경하고 제사 지내는 것을 숭상해 중화의 예제는 간략함에서 복잡함으로 나아가며 한 차례 격상과 전환을 이뤘다.
상탕왕(商湯王)은 예제를 개혁해 천하에 상나라 예제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대우의 자손을 기(杞)나라에 분봉해 그들이 원래 하나라 방식으로 조상과 천지에 제사 지내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중화 문화의 기본 종지가 성인과 성덕(聖德)에 대한 제사와 존경, 그리고 천인(天人) 간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임을 재차 천명했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춘분, 청명, 곡우 시기에 해당한다.
<하전단>
상나라 말기부터 서주(西周)를 거쳐 춘추(春秋)의 전기와 중기에 이르는 시기가 하전단이다. 이는 만물의 생기가 가장 왕성해 에너지를 저장하고 여름 수확을 준비하는 시기다. 은상(殷商) 시기에는 이미 예제가 확립됐는데, 그 특징은 신에 대한 각종 제사 예절을 중시하고 점복을 중시하며 하늘의 신의(神意)를 공경하는 것이었다. 주(周)나라는 상나라를 대체한 후 진지하게 반성했다. ‘왜 우리 주나라는 이렇게 작은 제후국의 규모로 은상 대국의 천하를 얻었을까?’
엄숙한 반성의 결과로 주나라는 은상의 예제 기초 위에 개선을 가해 ‘하늘은 사사롭게 친함이 없이 오직 덕 있는 자를 돕는다(上天無親 唯德是輔)’는 이념을 제시했고, 예악(禮樂)을 개혁해 예제가 숭상하는 대상을 표면적인 귀신의 희로애락에서 예의 모델을 통한 덕성의 수호로 전환시켰다. 주공(周公)의 개선을 거쳐 중화 예제 문화, 국가 제도, 도통(道統) 관념이 이 시기에 체계적으로 향상됐다. 하지만 주왕(周王)은 상탕왕의 자손을 송(宋)나라에 분봉하고 그들이 원래 상나라의 제사 예절을 채택해 조상과 천지에 제사 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더 나아가 춘추 시기에 이르러 주나라 왕실 세력의 쇠락과 함께, 예 자체가 지닌(인성 중 더 높은 일면을 이끌어 자아에 대한 구속을 완성하는 이런) 독특한 작용이 오히려 더욱 충분히 나타나게 됐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입하, 소만, 망종 시기에 해당한다.
<하후단>
춘추 후기에서 시작해 전국(戰國), 진(秦)나라 및 서한(西漢),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거쳐 동한(東漢) 전반부에 이르는 시기가 하후단이다. 하후단은 이미 음기가 발생하고 양기가 수장되기(과실이나 비축부로 돌아감) 시작하지만 여전히 생기가 무성하고 수확이 매우 왕성한 시기다.
이때 사회 도덕의 평균 수준은 점차 하락했고, 상하 각 계층은 모두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人心不古)’고 탄식했다. 춘추전국의 끊임없는 전쟁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상처를 주었고, 진시황(秦始皇)이 갓 국가 통일을 완수했으나 뒤이어 또 초한(楚漢) 대전이 일어났다. 이에 상고(上古)와 삼대(三代)에 형성된 예제는 국가가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고 도덕이 더 하락하지 않도록 보호하는(사회 안정을 유지하는) 도구가 됐으며,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이 됐다.
한(漢)나라는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종합한 기초 위에 예제를 회복했고 뒤이어 유가(儒家)를 독존으로 받들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가를 위주로 하되 여러 학설과 치국 방법을 병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왕망(王莽)이 찬탈했으나 이후 신속히 전복됐고 동한이 세워졌다. 동한 초기는 진한(秦漢) 이후 중화의 국정 운영이 가장 완비되고 사회 문화가 가장 순박한 시기가 됐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하지, 소서, 대서 시기에 해당한다.
<추전단>
동한 후기에 기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삼국,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남북조, 그리고 수(隋)나라를 거쳐 당(唐)나라 전기에 이르는 시기가 추전단이다. 이는 마치 묘목이 봄여름에 생성한 가장 좋은 영양분이 과실로 이전돼 축적되는(성장과 수확의) 계절과 같다.
이 시기는 몹시 요동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게다가 정치 투쟁에서 권모술수가 층출(層出)했다. 예제와 도덕은 때때로 나쁜 사람들의 권모술수의 도구로 쓰여 표면적으로는 높이 떠받들어졌지만 실제로는 발밑에 짓밟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련의 기괴하고 복잡한 일들을 겪으며 날이 갈수록 진정한 선과 악, 좋고 나쁨을 분별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의 선악과 능력, 성정을 깊이 감별하고 정확하게 품평하는 것이 하나의 학문(인물 품감의 학문)을 형성했고 갈수록 더 심오해졌다.
또 한편으로 서한, 동한의 장기적인 평화를 거치며 점차 많은 대가족이 형성됐는데 이들의 운명은 난세 속에서 분화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문은 여러 난세 시기에 갑자기 몰락했고 어떤 가문은 오래도록 쇠하지 않고 번성했다. 족보도 점차 축적돼 하나의 학문이 됐다.
이와 동시에 도교와 불교가 모두 성행하기 시작했고, 현묘함을 말하고 도를 논하며 천지만물과 인생을 깊이 인식하는 것도 새로운 유행이 됐다.
수백 년의 풍운 난세에 족보의 학문과 인물을 품평하는 학문이 더해져, 이 시기 사람들이 천도인문(天道人文), 선악시비, 인과응보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기초 위에서 중화 문화는 한층 더 단련돼 점차 빈번히 빛나는 하이라이트 시기에 진입했다. 수문제(隋文帝) 시기, 당태종(唐太宗) 시기, 그리고 당현종(唐玄宗) 초기까지 모두 유명한 태평성대였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입추, 처서, 백로 시기에 해당한다.
<추후단>
당나라 중후기 이후 5대 10국, 북송과 남송을 거쳐 원(元)나라 대부분의 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추후단이다. 이 600년은 마치 일 년 중 가을바람이 쓸쓸하고 온갖 풀이 시들어 누렇게 변하며, 하얀 이슬이 서리가 되는 늦가을의 차가운 시기와 같다. 하루의 해가 진 후 이미 밤에 속하게 된 것과 같다.
이 시기 국가 정치 영역에서는 안사(安史)의 난의 잉태와 폭발을 시작으로 무장(武將)의 배신이 일상다반사가 됐고, 무장에 대한 황실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상실돼 마침내 고갈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하에 사람들은 중화 고문명이 남긴 중덕수신(重德修身)의 기본 전통을 더욱 소중히 여겼고, 이에 따라 양송(兩宋)의 도학(道學, 즉 이학[理學]) 역시 어떻게 훌륭한 도덕을 세우고 순결한 심성을 회복할 것인가로 관심의 중점을 돌려 이를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예제와 문화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 변화가 생겨, 성정을 조절하고 심성을 도야하는 것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왕화(王化)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요(遼)·금(金)·원 등의 정권도 약속이나 한 듯 도학을 과거 시험의 강령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도학을 일종의 치세 도구로 여겼을 뿐이다.
이때 요·금·원 등은 더 이상 남북조 시기의 북방 호족(胡族)처럼 중원 문명을 진심으로 경앙(敬仰)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만이 천하 정통이라고 여겼고 중원 사람들을 남만(南蠻)으로 취급했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추분, 한로, 상강 시기에 해당한다.
<동전단>
원나라 말기부터 명(明)나라, 청(淸)나라, 중화민국에 이어 중국공산당(중공) 홍조(紅朝) 건정 후의 43년에 이르는 시기가 동전단이다. 이른바 동전단은 ‘생장화수장(生長化收藏)’의 과정에서 양기가 갈수록 잠복해 순음(純陰)으로 나아가는 시기다. 이러한 잠복과 순음의 작용 때문에 중화 문화의 표현은 현실 생활에서 날이 갈수록 퇴출됐고 더욱더 지면의 문자 상태로 물러났다.
이렇듯 현실에서 철저히 지면으로 후퇴하는 과정은 대략 다음 6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명나라는 중화 회복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또한 이학을 매우 중시했으며, 아울러 전통 중화 문헌을 편찬해 ‘영락대전(永樂大典)’ 같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사회 도덕 수준이 이미 하락해 군신 간의 진정한 신뢰가 매우 희박해졌고, 난세에 무거운 형벌을 쓰며 가혹한 법으로 신하들을 다스리는 것이 일상이 됐다.
둘째, 청나라도 이학을 중시하고 전통 문헌 편찬을 중시해 ‘사고전서(四庫全書)’ 같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청나라는 만주족의 통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해 매우 강경한 문화적 입장을 취해, 체발(剃髮), 역복(易服: 의복을 바꿈), 엄밀한 문자옥(文字獄)이 놀랍게도 장기 국책이 됐다. 유가가 말하는 예악 교화와 인애 정신은 상당 부분 끊임없이 선양되고 실제 추구하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이루기는 어려운 이상으로 전락했다. 문자옥의 작용으로 인해 청나라 학자들은 한나라 유학 등에 대한 고증으로 내몰렸고 큰 성과를 얻었다. 전통문화의 내용은 문헌의 문자 속에 더욱 명확하게 체현됐다.
셋째, 청나라 후기에는 유교와 전통 자체에 대한 의심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즉 아편전쟁 이후)에 이르러 유학과 중화 전통문화가 도대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표면적으로는 팽팽히 맞섰지만 사실상 전통문화의 지위는 갈수록 낮아졌다.
넷째, 중화민국 수립 이후 신문화운동이 뒤따랐고 전통문화에 대한 질의가 크게 유행했으며,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한 추구가 신문화의 주류가 됐다.
다섯째, 중화에서 전통문화의 운명은 대소(大小)의 양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중화민국으로, 이후 입장을 조정해 현대 서방의 민주 과학 문화와 중화 전통의 도덕 수양 문화를 모두 겸수병축(兼收並蓄)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중화민국이 대만(臺灣)의 한구석에 치우쳐 안주하게 되면서 중화민국의 이런 사상은 대만만을 주도할 수밖에 없게 됐다. 주도하는 면적이 작아서 작은 갈래에 속한다. 다른 한 갈래는 중공으로, 중국 본토에 지방 정권을 세웠고 점차 전국 정권을 쟁취했다. 그래서 주도하는 면적이 넓어 큰 갈래에 속한다.
중공은 전통문화를 반드시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해 철저히 때려 부수었다. 그들은 중공 당수와 각급 당 조직에 대한 신앙을 강제로 추진해 이를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성인과 천지신명에 대한 신앙을 대체하게 했고, 투쟁 철학을 강제로 추진해 이를 중화 전통의 인민애물(仁民愛物)의 사상적 바탕을 대체하게 했으며, 유물론과 계급 투쟁의 철학을 강제로 추진해 이를 중화 전통의 선악유보(善惡有報), 추기급인(推己及人: 자신의 마음을 바탕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림)의 기본 사상 방법을 대체하게 했다. 중공은 또 한때 한자의 라틴어화를 추진해 한자를 폐지하려 했다가 나중에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방향을 바꿔 간체자와 백화문을 추진했고 아울러 교육 기간을 단축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가오카오(高考, 대학 입학시험)와 대부분의 학교 교육을 취소시켜 중국인들이 전통문화 고전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화 전통문화는 거의 철저히 고서 더미 속으로 수축했고 나아가 대부분의 중국인이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됐다.
여섯째, 개혁개방 이후 중공은 표면적으로 사람들에게 일정한 사상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공산주의, 유물론, 계급 투쟁, 백화문과 간체자를 추진하는 기본 방략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중공은 돈과 욕망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를 날로 개방한 후, 가짜 전통문화로 진정한 전통문화를 대체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중화 전통인지 사실 여전히 전혀 모르고 있다.
이상 6단계가 바로 중화 전통이 현실 생활과 사람들의 사상 행위에서 갈수록 퇴출돼 점차 고서 더미 속으로 수축해 들어간 과정이다. 이는 일 년 중 입동, 소설, 대설 시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5천 년 문명의 마지막 단계다.
(계속)
원문발표: 2026년 8월 6일
문장분류: 천인사이(天人之間)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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