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먀오윈한(邈雲漢)
[명혜망](이전 편에 이어)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은 모더니즘 디자인 교육의 계몽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입체주의, 표현주의, 구성주의는 모두 미술공예운동 및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제시한 핵심 의제(예술과 산업, 감정과 형태, 예술과 사회)와 깊은 반발 및 계승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래에 이를 정리해 보았다.
1. 구성주의
반항: 주로 기계에 대한 태도이다. 미술공예운동은 산업화와 기계 생산을 배척하고, 수작업과 중세 고딕 전통을 주창했다. 구성주의는 수작업을 철저히 버리고 기하학적 어휘로 전환했으며 기계, 산업화, 신소재(철강, 유리, 콘크리트)를 포용하면서 이것들이야말로 대중 평등과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도구라고 여겼다.
계승: 미술공예운동은 예술과 디자인의 일상생활화(가구, 벽지, 일용품 등)를 강조했고, 구성주의 역시 순수 예술(캔버스 위의 그림)에 반대하며 예술가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로 전환해 포스터, 공장 건축, 방직품, 가구 등을 디자인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예술이 단지 자산계급의 사치품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대중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이상을 품고 있었다.
요약: 미술공예운동에서 구성주의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에 대한 비판에서 숭배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교활하게 방향을 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예술이 신(神)을 표현하는 것과 고급·저급 예술의 차이를 없애버렸고, 다시 돌아와서는 결국 산업화를 추진했다. 사실 이들이 비판한 소위 ‘예술은 소수 부자의 사치품’이라는 것은 주로 로코코 시대에 발전한 예술 표현을 가리키는데, 로코코는 이미 정통 예술이 아니며, 이러한 현대 운동들은 정통 예술에서 더욱 멀어졌다. 또한 예전 유럽은 식자율이 높지 않았기에 종교 회화의 목적은 문맹이 일반인의 신앙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원래의 회화는 본래 대중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름다운 천국 세계에 대한 대중의 동경을 일깨우고, 신의 형상과 사적(事跡)으로 인성 속의 선념을 가르치고 깨달음을 줘,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완성해 최종적으로 천국 세계로 돌아가도록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정통 예술에 반대하는 현대 예술도 대중에게 봉사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무엇에 봉사하려는 것인가? 정통 예술의 근간은 신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세워졌다. 반면 무신론 사상을 지침으로 삼아 대중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대중이 더는 신을 믿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사람과 예술이 신으로부터 왔다는 근간을 끊어버리려는 것이며, 신을 배제한 후 현대 사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신이 창조했기에 신은 신조차 믿지 않는 자들을 가호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대중을 속여 지옥으로 향하게 하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철저히 파멸시키려는 것이다.
2. 표현주의
반항: 주로 표현 형식과 노선이다. 미술공예운동은 중세 고딕풍과 식물 화초의 자연 문양으로 돌아가 마음의 평온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표현주의는 지극히 왜곡되고 거칠며 원시적인 형상으로 현대인의 내면적 불안과 고통을 표현했다.
계승: 둘 다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극도로 강조하며 산업화 생산과 기계적 복제에 반대했다.
요약: 미술공예운동에서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자연 문양에서 왜곡된 시각 언어에 이르기까지, 역시 방향을 튼 것이며, 다시 돌아와서는 표면에 남아 있던 약간의 중세 요소마저 버렸다. 사실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으므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정서가 없을 수 없다. 과거 신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예술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불공정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겪을 때도 여전히 낙관적인 마음가짐과 마음속 선념을 유지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표현주의 회화는 인간의 왜곡된 심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사회와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확대하며, 전시와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러한 회화가 범죄의 변태 심리를 없애고 인간의 범죄율을 낮추며 환경의 안전감을 높여줄 것(이것이 많은 이의 공통된 바람이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환상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그것들의 사회적 효과는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과 정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3. 입체주의
반항: 입체주의는 미술공예운동의 유기적인 자연 문양을 거부했지만, 회화 공간에서 기하학적 해체를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계승: 미술공예운동은 고급 예술과 실용 공예 간의 차이를 없앴고, 이 기초 위에서 훗날 피카소(Pablo Picasso) 등은 신문지, 등나무 공예품, 나무 조각 등 일상 공예 재료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예술 작품에 짜맞춰 입체주의 콜라주를 형성할 수 있었다.
4. 세 가지 주의의 관계
첫째, 입체주의는 여전히 살롱에서 감상하는 순수 예술(예술을 위한 예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성주의는 순수 예술에 단호히 반대하며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를 산업 생산, 건축, 사회 선전(실용을 위한 예술)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표면적으로 이 둘은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성주의가 입체주의의 확장이자 심화이다. 사실 피카소는 1895년 바르셀로나(Barcelona)로 이주한 후 현지의 보헤미안 예술계와 접촉했고, 청년 시절에는 바르셀로나 문예인들의 집결지인 ‘네 마리 고양이(Els Quatre Gats)’를 자주 찾았다. 당시 문화계는 무정부주의, 사회 개혁, 반전통적인 급진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체주의 후기에도 이데올로기의 분화가 있었는데, 이후 프랑스의 오르피즘(Orphism), 러시아의 입체미래주의,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의 기계 입체주의는 모두 기하학적 형태와 기계 미학으로 새롭고 현대적인 미래를 재구성하겠다며 극도로 강렬한 기술 유토피아 색채를 띠었다.
둘째, 입체주의와 표현주의도 각각 기하학적 논리(기하학적 구조로 공간을 분석하고 해체함)와 주관적 정서(왜곡된 형태로 내면의 고통을 표현함)를 추구해 매우 달라 보이지만, 두 가지는 곧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독일의 다리파(Die Brücke)는 표현주의 단체로서 입체주의의 ‘기하학적 면’을 흡수해 화면의 감정적 충돌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다리파는 자퇴한 청년들의 반사회적 운동으로, 아카데미즘 전통에 반대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며 유토피아의 혼란스러운 질서로 산업 문명의 사회 모델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들은 무산계급 복장을 하고 농민과 자연을 향하며 원시성을 추앙함으로써 산업 사회와 자산계급에 반항했다고 한다). 이러한 낭만적이고 급진적인 상상은 그들 중 다수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진 입대하게 만들었으나, 전쟁의 현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하고 유혈이 낭자했다. 이 예술가들은 곧 무거운 대가를 치렀고, 유토피아라는 어리석은 꿈이 무참히 깨진 후 그들의 예술 표현은 더욱 격렬하고 잔혹해졌다.
셋째, 구성주의(기하학적 이성)는 표면적으로 표현주의(감정 표출)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성주의는 표현주의의 주관적 표출과 혼란으로 가득 찬 극단적인 개성적 스타일을 극도로 배척하며, 오히려 정밀함, 이성, 질서, 기하학적 구조를 추구했다. 하지만 문화적 입장에서 보면,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 지식인들의 허무와 불안을 반영한 것으로 예술가 공동체의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한 반면, 구성주의는 집단주의와 산업화된 유토피아 이상을 포용했다. 유토피아의 기초는 무신론이다. 비록 육체와 정신의 안락함을 얻으려 하지만,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업(業)을 부정하며, 신을 배척하는 사상의 작용 아래,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고통을 겪어 죄를 없애고 업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학설은 고생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생을 피하도록 가르치고, 사람에게 도덕을 높이도록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 증오하고 다투도록 가르친다. 사람을 천국 가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걷게 하며, 곧 사람을 지옥으로 가는 길로 이끄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는 르네상스부터 이어져 온 3차원 공간 투시법과 사실적인 모방을 이미 거의 산산조각 냈다. 이후 입체주의, 표현주의, 구성주의 등은 잇달아 전통 문학 예술을 짓밟으며 현대의 문학과 시각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다. 이 셋이 합쳐져 디자인, 건축, 시각 전달 등 현대 교육의 기초를 다졌고, 1919년에 설립된 독일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에서 집대성됐다. 바우하우스는 모리스 공방의 수작업과 디자인을 결합한 교육 방식을 계승했으며, 초기에는 표현주의 화파의 영향을 받았고 중후기에는 구성주의와 입체주의의 기하학적 산업 미학을 채택했다.
덧붙이자면 표현주의는 전쟁 전과 전쟁 초기에 강렬한 무정부주의와 좌익 반항 색채를 띠기도 했으나 그 구성원의 유파는 매우 다양했다. 표현주의 연극과 시에는 모든 기득권 질서와 통치에 대한 강렬한 반항 정신이 가득 차 있었는데, 예컨대 젊은 세대는 구세대의 가정적 권위(아버지), 국가적 권위(황제와 군대), 종교적 권위(교회)에 대해 피눈물 나는 고발과 철저한 부정을 감행했다.
또한 전쟁 전 독일어권의 표현주의 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문학 및 정치 잡지의 편집장 중 일부는 그 자체로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이거나 좌익 자유주의자였다. 프란츠 펨페르트(Franz Pfemfert)가 1911년에 창간한 잡지 ‘행동(Die Aktion)’은 표현주의 시를 게재했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문예의 반역을 국가 기관과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직접 이끌었다. ‘폭풍(Der Sturm)’은 비록 모더니즘 미학과 회화 개혁에 더 중점을 두었지만, 전통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각종 전위 운동에 은신처를 제공했다. 전후에 일부 표현주의자들은 스파르타쿠스단(공산주의)으로 향했고, 일부는 사회민주당으로 향했으며, 소수는 이후의 격동 속에서 서로 다른 극단으로 향했다. 전후 급진적인 전위 예술 단체 중에는 1918년 독일 11월 혁명에서 이름을 딴 ‘11월 그룹(Novembergruppe)’이 있었고, 바우하우스는 이듬해(1919년)에 설립됐다.
11월 그룹은 급진적인 좌익 예술가, 건축가, 작가들이 베를린에서 설립한 조직으로, 전시회를 개최해 건축과 예술의 혁신을 추진하고 전통 아카데미즘의 굴레를 타파하며 예술이 대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등 짙은 유토피아 색채와 사회주의 성향을 띠었다. 건축가 리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등 11월 그룹의 핵심 멤버 중 다수는 훗날 바우하우스와 긴밀히 협력했고 심지어 바우하우스의 초기 교사가 되기도 했다. 이 실험적인 조직은 바우하우스의 초기 교육은 물론 독일의 현대 예술 교육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여담으로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독일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Bau’는 ‘건축’으로 동사 ‘bauen’은 ‘건축하다’라는 뜻이며, ‘Haus’는 명사로 ‘집’이라는 뜻이다.
모더니즘 건축의 초석인 바우하우스의 핵심 철학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것이다.
(계속)

모더니즘 디자인의 발원지인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대학 건물(이 대학은 줄여서 바우하우스 대학이라 불림)
원문발표: 2026년 9월 1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16/5136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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