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고생을 낙으로 삼았는가?

문장/ 산둥대법제자 반석

사부님께서는《홍음》고기심지〈苦其心志〉중에서 우리에게 “고생을 낙으로 삼으세” (吃苦当成乐)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했는가? 십년 수련하면서 매 번 난관에 부딪쳐 넘기지 못할 때 나는 언제나 이 시구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비록 곤두박질하듯 잘 넘기지 못했지만 나는 줄곧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고생을 낙으로 삼았다. 특히 처음에 가부좌할 때 다리가 아주 높이 치켜 들렸다. 결가부좌는 특별히 아팠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가부좌하였을 때 반시간 동안 가부좌를 하였다. 최후에는 아파서 일분일초도 모두 힘겨웠다. 어떤 때엔 쇼크가 올 것처럼 너무나 괴로워 줄곧 울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넘어갔다. 반년 후 나의 오른쪽 다리는 그제야 평평하게 놓을 수 있게 되었다. 3년 후에야 비로소 쌍가부좌를 할 수 있었다. 쌍가부좌한 후 나는 단번에 반시간을 견지하였다. 당시 그런 고생을 아주 잘 겪을 수 있는 동수와 비기면 말할 나위도 없다.

정법 중에서 나는 고생을 겪는 방면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얼마만큼 할 수 있으면 얼마만큼 한다. 어떤 때엔 마난에 부딪치면 매우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며, 혹형에 시달리면서 생사에서 허덕이다 불구가 된 수련생을 생각하면 즉시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진다. 또 사부님께서 정법하시기 위해, 우리를 다스리기 위해 그런 고생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더는 자신이 고생스럽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매번《명혜주간》에서 수련생이 엄중하게 박해 받은 실례를 보았을 때 처음엔 좀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후에 점차적으로 그것을 정진하는 동력으로 간주하였다. 한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의 가르침만 들어야 하며 물러서면 안 된다. 어떤 수련생은 매번 이런 사건을 보면 두려워하며 자신도 박해당할까 두려워한다. 이것은 집착심이 아닌가? 강대한 이기심이다! 사존은 우리에게 정법의 길을 잘 걸으라고 하셨다. 우리가 어찌 박해를 “두려워” 하는 염두가 생기겠는가?

반드시 생명의 내원으로부터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수련생이 박해당하는 것을 볼수록 우리는 반드시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해야 하며 일찍 박해가 결속되게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감히 법을 실증하지 못하면 그 사악은 틈을 타고 들어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세 명의 해적이 객선을 강탈한 이야기를 보았지 않는가? 3명의 해적이 90명을 강탈하려하자 두 사람은 반항하다가 살해당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최후에 해적은 재물을 약탈한 후 객선을 침몰시켰다. 그러자 나머지 승객 모두 빠져죽었다. 생각해 보라. 90명이 3명을 이기지 못하겠는가? 속인은 모두 이렇지 않은가? 사적인 것과 자아를 위해 자신이 손해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누가 또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은 바로 수련으로 수련이란 바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고 사람의 좋지 못한 행위와 각종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는 것인데, 이것도 두렵고 저것도 두려운 사람의 마음을 포함한다.”《막다른고비[死關]에서 벗어나라 走出死关》사부님은 또 말씀하셨다. “만약 한 수련자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생사의 생각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틀림없이 두려워한다. 만약 모든 수련생들이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바로 자멸(自滅)할 것이다.。”《정진요지2》(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去掉最后的执著>

이번 박해를 일찍 결속짓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반드시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하며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정법의 길을 잘 걸으며 반드시 걸어 나와야 한다.

사실 정법 중에서 우리가 오직 반석처럼 견고하면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두 해주신다. 나는 예전에 허다한 마난에 부딪쳤지만 사부님께서 모두 나를 도와주셨기에 넘겼다. 매 번 내가 진상을 밝히고 사람을 구도하는 소원이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안배해주셨다. 매번 내가 집착심으로 극단으로 나아가 번거로움을 조성하였을 때 나는 깨달았다. 염이 바르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매번 나를 도와 난관을 넘기도록 해주신다. 여러 번 난에 부딪쳤을 때 놀라움은 있어도 위험은 없도록 하였다. 근 9년간 법을 실증하고 반박해하는 중에 나는 비록 아주 못하였지만 어떤 때엔 과격하고 극단으로 나아가며 이지적이지 못하며 강렬한 집착심을 품고 일을 하였으나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오히려 언제나 제자를 점화해주시고 제자를 보호해주셨다. 나는 내심으로부터 우러난 감격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만약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걸어올 수 있겠는가? 이것도 내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견지하며 견정하게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한 것과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비기면 또 어떻게 한데 논할 수 있겠는가?

최후에 나자신과 동수에게 일깨워주고 싶다. 이 최후의 황금시각에 고생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편안하게 관을 넘길 수 없으며 층차를 돌파할 수 없다.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면 고비는 산과 같으려니 어떻게 속세를 벗어나랴”(《홍음2》) 오직 사부님을 견정하게 믿고 대법을 견정하게 믿고 법을 스승으로 삼으며 견정하게 동요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든 모두 우리에게 해주신다. 어떤 곤난도 막지 못한다. 동수들이어, 고생을 겪는 것쯤이 다 무엇인가. “대법제자의 위덕은 환우(寰宇)를 빛내고 있다.” (《문안))정법은 오늘까지 왔다. 절대로 이 만고의 기연을 잃지 말자!

문장에는 수련생을 질책하려는 뜻이 없으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뜻도 없다. 왜냐 하면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해주신다. 사부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직 이런 소원만 있을 뿐이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동수님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원문발표:2008년7월16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7/16/182090.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