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쑨런서우(孫仁壽)
[명혜망] “우리 자신이 오늘날 갖는 인식과 각성은 진실로 중요합니다. 우방국이 중국공산당(중공)이 무력으로 세계를 침략하려는 야심, 혼란을 조성하는 각종 요인, 그리고 중공의 초역사적이고 초세계적인 혼란 조성 방법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이를 여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잘못은 세계에서 전체주의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공통된 잘못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발췌
중공이 무력으로 대만을 통일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또 많은 사람은 자신과 무관하다며 그저 하루하루 지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는 누가 중국인을 통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이 어떤 사회 제도와 생활 방식을 원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일의 결말 또한 대중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77년 전인 1949년 8월, 산시(山西)성을 38년간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옌시산(閻錫山)은 의미심장한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옌시산(1883년 10월 8일~1960년 5월 23일)은 자(字)가 백천(百川) 혹은 백천(伯川)이고 호가 용지(龍池)이며 산시성 우타이(五臺) 사람이다. 청나라 말기 거인(擧人)이었고, 중국동맹회 회원, 중화민국 북양정부 장군부 ‘동무상장군(同武上將軍)’, 중화민국 국군(및 그 전신인 국민혁명군)의 육군 1급 상장, 북양군벌 ‘진계(晉系)’의 영수였다. 또한 중화민국 국방부 장관, 총통부 자정(資政), 중국 국민당 중앙평의위원, 산시대학 총장 등의 직무를 역임했다.
옌시산이 생전에 주로 통치했던 산시성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의 내전, 항일전쟁 및 국공내전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한쪽에 치우쳐 안정을 유지하며 발전했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치 상태를 유지했다. 1949년 4월 타이위안(太原) 전투가 끝난 뒤 중공 해방군에 점령될 때까지 총 38년을 거쳤으며, 이는 수많은 민국 군벌 중 가장 긴 기록이다. 옌시산은 서북실업공사, 산시성 은행의 창립을 주도했고, 퉁푸(同蒲) 철도 건설을 주도했다. 그의 시정은 산시성의 교육, 공업, 경제, 군사 등 각 분야의 발전을 뚜렷하게 추진해 산시성이 중화민국의 ‘모범 성’으로 칭송받게 했으며, 옌시산 본인은 ‘모범 독군(督軍, 각 성의 군사를 총괄하던 직책)’으로 칭송받았다.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하기 전후 몇 달 동안, 옌시산은 행정원장을 역임하며 국민정부 중앙 군정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였고, 중화민국 대륙 시기의 마지막 행정원장이기도 했다.
옌시산에게 ‘혁명’은 전통을 파괴하는 대가를 치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공산파의 방식은 그가 가진 ‘질서로써 새로움을 도모한다’는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한(武漢)과 난징(南京)이 분열하고, 국민당 내부의 구호가 엇갈리며 한쪽에서는 ‘연소(聯俄-소련과 연대), 용공(容共-공산당에 대한 관용 정책), 농공 부조(扶助農工-농민과 노동자를 돕고 지원)’를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청당(淸黨), 건국, 반공’을 강조할 때, 맥락의 혼란은 ‘혁명’과 ‘공산’을 거의 동의어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옌시산의 눈에 두 가지의 경계는 마치 삶과 죽음의 차이와도 같았다.
옌시산이 생각한 ‘혁명’은 ‘파괴가 아닌 정돈’의 개혁이었다. 반면 ‘공산’은 어떠한가? 계급투쟁과 폭력적 평등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변혁의 필요성을 믿었지만, 유혈과 파괴를 대가로 삼는 것은 거부했다.
1949년 8월 10일, 옌시산은 ‘반침략 대동맹’에 참석해 ‘공산당은 어떻게 중국 대륙을 휩쓸었는가? – 미국 백서에 대한 소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중공이 단 3년 만에 국민당을 타격해 패배시키고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원인을 상세히 분석했다.
옌시산은 말했다. “중공 군대에 대해 논하자면, 항일전쟁 시작 시점에는 3만 명에 불과했고, 항일전쟁이 끝났을 때는 3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중국을 공격한 일본군의 10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무기는 모두 조악한 총과 대포여서 일본군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해 우리는 항일은 할 수 있었으면서 반공은 할 수 없었습니까? 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인식의 오류: ‘정당’과 ‘난당’의 혼동
첫째, 중국과 미국 등 각국의 일부분 사람들은 중공이 ‘정당’이라고 잘못 인식했고, 중공이 ‘난당(亂黨)’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무릇 정당이란 투표로 정권을 얻는 것으로 민의를 귀결점으로 삼습니다. 난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뒤, ‘우리가 싸워서 이겼으니 정권을 잡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문에 공산당은 표면적으로는 정당의 형태를 띠고 세계와 접촉하지만, 뼛속까지 중국에서 난당의 정책을 실행하며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합니다. 게다가 공산당은 세계 혁명을 표방하는 당으로서, 선전 방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거의 세계 각국에는 모두 공산당 조직이 있고, 시골마다 공산당 당원이 있으며, 국회마다 공산당 의원이 있고, 대도시마다 공산당의 선전 거점과 신문, 잡지가 있습니다. 공산당의 선전은 소식을 전하거나 비평하는 성격이 아니라, 음모적이고 선동적인 성격입니다. 게다가 그 선전의 효과는 전적으로 신문과 잡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와 구두 전파, 그리고 의회에서의 발언에 중점을 둡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관료의 보고서입니다. 보고서 한 통이 한 국가 정부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할 수 있어 수천 개의 신문 잡지 선전보다 낫습니다.
공산당의 선전은 중국에 대해서만 우위인 것이 아니라 세계 다른 각국에 대해서도 우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다른 정당들은 모두 국내의 당이어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르기에, 한 국가의 선전에 다른 국가가 반드시 호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국제적인 당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주장이 일치하고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한 국가 공산당의 선전에 전 세계 공산당이 다방면으로 호응해야 합니다. 게다가 음모, 선동, 혁명적인 선전 방식을 사용하여 오직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것만 추구할 뿐,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사상의 좌경화, 파업 사태의 확대가 더해지고, 학교와 공장이 중공의 선전을 부추기기에, 그들은 가짜를 완전히 진짜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은 세계에서 선전 효능이 취약해, 중공의 중국에 대한 선전이 더욱 우위를 점하며 세상 사람들을 속이기 더 쉽습니다. 그래서 중공의 기만 선전은 이러합니다.
제1단계, 세계의 일부분 사람들이 중공을 토지 개량주의자로 여기게 해, 인식을 흐리게 만들고 중공이 중국에서 발전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늦추게 했습니다.
제2단계, 다시 세계 인사들이 중공이 소련과 관계가 없으며 중국 내부의 개량에 노력하는 자들이라고 여기게 해, 세계가 중공에 대한 인식을 다시 흐리게 만들고 중공에 대한 방비를 늦추게 했습니다. 동시에 중국 정부의 반공에 대한 관심을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제3단계, 세계의 일부 인사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의 티토’(역주: 티토는 1948년 소련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걸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 지도자로, ‘중국의 티토’란 마오쩌둥도 소련과 거리를 두고 서방과 협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뜻함)가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중공이 암암리에 미혹해 고의로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평화를 갈망하는 자들의 희망인지 알 수 없으나, 이로 인해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하고 세계가 중공에 대해 또 한 시기 방비를 늦추게 했습니다.
이상 이 3개 시기의 추이는 단지 중국의 반공을 해이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군심을 동요시키고 중국의 민심을 꺾어, 점차 전쟁을 싫어하는 것에서 반전(反戰)으로 변하게 하고, 반전에서 주화(主和)로 변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국 정부가 패배한 첫 번째 원인입니다.
공업 문제: 국민당의 ‘물로 불 끄기’와 공산당의 ‘불에 기름 붓기’
둘째, 우리는 공업이 낙후되고 경제 침략을 받는 국가여서 세상 사람들이 ‘반(半)식민지’라고 부릅니다. 공업이 발달한 국가들이 자국의 노동자 실업, 사회적 공황의 병폐를 우리 같은 반식민지 국가로 전가했고, 노동자들이 경제적 침략을 받음으로 인해 노동자의 노동 보수가 침략국 노동 보수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가지 악의 씨앗이 뿌려져 막을 수 없게 됐습니다.
하나는 인심의 불평과 사상의 고뇌로 인해 사상이 날로 좌경화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려워 파업 사태가 날로 확대되도록 촉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양자는 모두 현실 파괴를 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이상의 두 가지 악재를 억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물로 불을 끄는 방법을 취해 그 기세를 없애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이는 역세를 형성했습니다. 반면 공산당은 불에 기름을 붓는 방법을 취해 그 불길을 조장하고 사상 투쟁을 도발하며 파업 풍조를 확대하여, 현실을 뒤집으려는 목적을 달성해 마침내 공산당의 순세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는 순세이고 하나는 역세이니, 그 어려움과 쉬움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국 정부가 패배한 두 번째 원인입니다.
토지 문제: 국민당의 ‘역수역풍’과 공산당의 ‘순수순풍’
셋째, 중국은 농업 국가로서 2천여 년 전 정전제(井田之制)를 실행한 적이 있습니다. 토지는 모두 국유로 귀속됐고 경작권은 국민에게 속해 한 사람이 여덟 식구를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토지 사유화 이래로 소작농과 고용농은 풍년이 들어도 겨우 네 식구만 부양할 수 있었던 반면, 지주는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얻어 가만히 앉아서 성과를 누렸습니다. 이에 대한 민심의 불평은 전제주의 시대에는 국민이 입이 있어도 말하기 어려웠지만, 민주 시대에는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투표로 표결해야 하므로 국민이 즉시 이 불평을 제기하게 됩니다.
우리 정부가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택한 방법은 지가에 따른 매수와 25감조(二五減租, 소작료 25% 감면)였습니다. 지가에 따른 매수는 당장 해내기 어려웠고, 25감조는 착취를 줄일 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공산당은 “나를 따르라, 소작농과 고용농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소작농의 소유로 한다”라고 호소했고, 2천 년 묵은 소작농과 고용농의 고통을 몰수와 분배라는 두 가지 난폭한 방법으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몰수 방식은 난을 일으키는 쪽에는 쉽지만 정부에는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소작농과 고용농에게 법을 지키라고 달래는 것은 물살과 바람을 거스르는 것(逆水逆風)과 같고, 공산당이 소작농과 고용농에게 난을 일으키라고 호소하는 것은 물살과 바람을 타는 것(順水順風)과 같습니다.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쉬운지는 따져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국 정부가 패배한 세 번째 원인입니다.
국민 문제: 국민당의 보호와 공산당의 계략
넷째, 우리는 국가로서 전력을 다해 국민을 보호합니다. 반면 중공은 난당으로서 온갖 방법으로 국민을 계략에 빠뜨립니다. 중공은 국민이 평안히 거주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국민이 자신들과 함께 혼란을 조성하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요가 곧 진리라고 여겨, 자신이 필요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행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자의 돈과 지주의 땅을 혼란을 조성하는 경비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인해전술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의 돈과 지주의 땅을 있는 대로 전부 몰수했고, 몰수한 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감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지극히 잔혹한 극형으로 부자와 지주를 살해해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자와 지주가 비록 공산당을 백 배로 원망하더라도, 가난한 사람 역시 공산당에 감격하고 공산당을 두려워하는 것이 백 배에 달했습니다. 예로부터 중국 역사상 혼란을 일으킨 사람치고 살부제빈(殺富濟貧, 부자를 죽여 가난한 자를 구제함)을 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공산당의 이 살부제빈 방법은 공산당을 미워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고, 공산당에 감격하며 공산당을 두려워하는 사람만 남겨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이기에 공산당과 같은 이런 방식을 써서 부자를 백 배로 한탄하게 만들 수 없으며, 당연히 가난한 사람을 백 배로 감격하게 하거나 백 배로 두려워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공산당이 나누어 준 토지와 주택에 감격하는 것이, 국가가 자신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찾아 주며 평안히 살고 즐겁게 일하게 해주는 것에 감격하는 것보다 더 컸습니다. 공산당의 참살을 두려워하는 것이 국가 법률의 제재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컸습니다. 물론 대다수 가난한 사람이 모두 공산당에 감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당을 대신해 사람을 영도하고 통제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공산당에 감격하는 사람이어야만 공산당이 기꺼이 기용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공산당 점령 지역의 인구는 약 2억 명입니다.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어떤 성은 평균 4인 1가구이고, 어떤 성은 평균 5인 1가구입니다. 즉 평균 5인 1가구로 치면 2억 명은 평균 4천만 가구가 되어야 합니다. 공산당이 규정한 1기 우선 청산 비율 30%에 따라 4천만 가구 중 1천 2백만 가구를 청산해야 했습니다. 이 청산당한 1천 2백만 가구의 재산으로 1천 2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을 매수했는데, 게다가 이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이 통제할 수 있는 호패(豪霸, 토호나 깡패)를 뽑은 것이었습니다. 화베이(華北), 화중(華中)의 18세에서 47세까지 병역 연령 장정이 총인구의 4분의 1을 조금 넘으니, 2억 명 중 병역 연령 장정은 응당 5천만 명이어야 합니다. 공산당이 1천 2백만 명을 매수하여 한 사람이 세 사람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5천만 명의 장정을 모두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5천만 명의 장정을 통제한 뒤 나머지는 모두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이들이니 이 또한 2억 명 전체를 통제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공산당에 감격하는 사람은 소수일지라도, 통제하고 난 뒤에는 그 작용이 다수와 같아졌습니다. 이것이 중공의 초역사적이고 초세계적인 혼란 조성 방법입니다. —이 또한 우리 중국 정부가 패배한 네 번째 원인입니다.
법률: 국민당의 ‘오르막길 주행’과 공산당의 ‘내리막길 주행’
다섯째, 우리 정부는 모름지기 국가의 법률을 준수해야 합니다. 식량 징수, 징병, 세금 징수 등은 반드시 입법원의 통과를 거쳐야 하며, 민사, 형사의 각종 사건 처리는 반드시 제정된 법률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현 정권을 뒤집고 현 사회를 무너뜨리는 데 몰두할 뿐 법률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국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생산물을 탈취하며 식량의 3분의 2를 징수해도 국민은 감히 미루지 못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20분의 1을 징수하면서도 오히려 시원스럽게 징수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혼란을 막는 재정이 1이라면, 공산당이 혼란을 조성하는 재정은 10이나 100이 됐습니다. 국민을 군대에 복무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드시 병역법과 징병령에 근거해 실행해야 했습니다. 반면 공산당은 적화 테러 방식을 동원해 처음에는 권유하고, 이어 강요하며, 끝내는 군대에 가지 않으면 그의 온 가족을 처형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형이 동생에게 어서 군대에 가라고 권하게 됐고, 또한 군대에 가는 사람에게 “가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을지언정 돌아오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죽으면 혼자 죽는 것이지만 돌아오면 온 가족이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국민의 재산을 재정으로 삼고, 국민의 생명을 병력 자원으로 삼았기에 돈이 없을까 걱정하지 않았고 병사가 없을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인해전술을 실행해 인육을 총알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작전에서 공산당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수레와 같고, 우리(국민당)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수레와 같았으니, 같은 적재량이라도 그 어려움과 쉬움은 천양지차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국 정부가 패배한 다섯 번째 원인입니다.
(계속)
(『천지창생(天地蒼生)』 제310기에서 발췌)
원문발표: 2026년 11월 7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11/7/51620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11/7/516207.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