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비바람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다

글/ 중국 허베이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여 년의 수련 과정을 돌아보면 큰 난관을 만나든 작은 고비를 만나든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중국법회라는 기회를 빌려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이야기해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비바람 속에서 걸어온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소중히 여겨 앞으로의 길도 더욱 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1999년 중국공산당(중공)의 박해가 시작된 후, 매년 여러 차례 괴롭힘과 협박을 당했습니다. 남편은 세 차례 불법적인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고, 사업장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 생계 수단도 사라졌습니다. 혼자서 10살이 조금 넘은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80세에 가까운 시부모님까지 돌봐야 했습니다. 특히 2001년 가을, 두 차례 세뇌반에서 탈출한 후 5년 넘게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정오에 외출했다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밀을 말리는 농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고 무척 고생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인신자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고통에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고 자유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사부님의 법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었고, 비바람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 천안문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다

1) 처음으로 천안문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박해가 시작된 그 시기에 전국 각지의 대법제자들이 잇달아 천안문에 올라갔고, 우리 지역에서도 많은 수련생이 갔지만 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수련생이 걱정했고 한 수련생은 편지까지 써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꼭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늘 속인 사회의 상태에 부합해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불법적으로 구금돼 있었고, 두 아이는 아직 어렸으며, 시부모님도 연세가 많아 돌봐드려야 했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베이징에 간다면 속인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겠습니까? 대법을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법공부를 하다가 다음 단락을 배웠습니다. “속인이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이 아니고, 속인이 나쁘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다.” “한 수련인으로서 우주의 특성으로 가늠해야만, 비로소 무엇이 진정 좋고, 무엇이 진정 나쁜지 변별해 낼 수 있다.”(전법륜) 저는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제가 수호하고 있었던 것은 속인 사회였지 법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 되겠다. 나도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정당한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현지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먼저 차를 타고 인근 현으로 간 다음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몇 번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 차례 갈아타며 베이징에 도착한 후 길을 세 번 물었는데, 신기하게도 세 사람 모두 똑같이 “저를 따라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천안문에 도착했습니다.

광장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갈까?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돌아가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졌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 갑자기 우리 지역의 남자 수련생 한 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리를 찾아 막 앉았는데, 사복 경찰 여러 명이 한 여자 수련생을 쫓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자 수련생은 우리 쪽으로 달려와 가방을 제게 억지로 안겨주었습니다. 그때 경찰들도 이쪽으로 쫓아왔기에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습니다. 수련생의 가방을 열어 보니 그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부님의 평어가 실린 글 ‘마성을 제거하자’였습니다. 남자 수련생은 돌아가서 즉시 그 글을 복사해 수련생들에게 배포하라고 했고, 저를 현지로 돌아가는 버스에 태워 주었습니다. 제 심성이 아직 제대로 제고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 다시 천안문에 올라가 마음속 소리를 외치다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사부님을 따라가지 않았을까? 왜 대법을 실증하고 대법을 수호할 기회를 놓쳐야 했을까?’ 앞으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다면 그것은 일생은 물론 영원히 남을 유감이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음을 굳게 정했습니다. 반드시 다시 천안문에 올라가 제 마음속 소리를 외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제 생각을 말하자 아이들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너희 둘은 아직 어리고 학교에도 가야 하잖니. 가면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고 엄마도 상상할 수가 없단다.” 두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되더라도 대법을 실증하러 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아들은 말했습니다. “지난번 ‘7·20’ 때 어머니는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면서 저만 남겨 집을 보게 했잖아요. 이번에는 꼭 갈 거예요.” 아이들은 어렸지만 대법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선택을 막을 이유가 없었기에 백화점에 가서 두 아이에게 새 옷을 사 주고 1인당 100위안씩 주었습니다. 또 한밤중까지 시간을 들여 현수막을 만들었고, 이른 아침 마치 성대한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것처럼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이번에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는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와 공안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베이징으로 향하는 대법제자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도 많은 사복 경찰이 검문했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있어 관광객처럼 보였는지 순조롭게 천안문에 도착했습니다.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조금도 활기찬 분위기는 없었고 오히려 먹구름이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사람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사진을 찍으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수련생이 앞으로 나와 현수막을 펼치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경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광장에 사복경찰이 많았기에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현수막을 꺼내 높이 들고 외쳤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의 누명을 벗겨 주십시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마음의 소리를 마침내 그 순간 외쳤습니다!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고 우리를 억지로 잡아끌고 경찰차에 태웠습니다.

천안문 파출소에 도착하니 전국 각지에서 온 파룬궁수련생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경찰은 남녀를 나누어 각각 한 줄씩 서게 했습니다. 아들은 남자 수련생들과 함께 줄을 섰고 50명씩 한 대의 차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딸은 마침 50번째였습니다. 경찰이 딸을 저와 떼어놓으려는 것을 보자 얼른 딸을 끌어당겨 품에 꼭 안았습니다. 그렇게 딸과 저는 같은 차에 탔습니다. 차는 아주 큰 마당으로 갔는데 그곳에도 대법제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번호를 새로 부여받아 다시 배치된 후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딸과 번호가 연이어 있었기에 이번에도 같은 차에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이 딸을 먼저 밖으로 불러냈고, 이어 저도 밖으로 나와 차에 탔지만 딸이 차에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제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왔으니 사부님께 맡기겠습니다.’

베이징의 어느 분국으로 끌려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강압과 회유를 번갈아 가며 밤새도록 심문했지만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제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고 확인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현지 공안이 데리러 왔고 저는 차에 강제로 태워졌습니다. 경찰은 사납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서 계속 수련하면 네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딸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갓 11살이 된 딸은 틀림없이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3)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다

이번에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아들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고, 딸과 함께 현지로 끌려왔습니다. 저는 구치소에 구금됐습니다. 그때 남편도 여전히 구금돼 있었고 집에는 두 분의 노인을 돌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갇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이 3일이나 5일 동안 단식하면 풀려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집은 이런 상황이니 나도 나가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7일째 되는 날 밤이 됐는데도 경찰은 저를 풀어주기는커녕 계속 밥을 먹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안 먹겠다면 낼 당장 노동수용소로 보내겠다!” 말을 마치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차가운 흙 온돌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이 가상이고 시련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부님께서 항상 제자들을 보살피고 계시며 제자에게 안배하시는 난관도 반드시 제자의 심성에 따라 정해진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사부님께 맡겼으며, 마음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평온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감방 문이 열렸습니다. 파출소장이 문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일어나, 집에 가라!” 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저는 소장에게 ‘분신자살’ 사건은 거짓이며 대법은 반드시 바로잡힐 것이고 진상도 반드시 천하에 낱낱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박해에 적극 가담하지 말고 반드시 자신에게 퇴로를 남겨 두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소장은 차분한 어조로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 남편은 이미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으니 돌아가서 어르신들께 만두나 빚어 드려요.”

그날은 마침 섣달그믐날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야 아들이 베이징의 어느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구금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들은 이름과 주소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겨우 13살이었는데도 경찰에게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5일 후 경찰이 주소를 알아낸 뒤에야 현지 경찰이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두 아이에게 1인당 주었던 100위안도 모두 경찰에게 빼앗겼습니다.

2. 세 차례 세뇌반 박해를 당하다

1) 정념으로 탈출해 사악을 놀라게 하다

2001년 가을, 현지에서 세뇌반을 개설하고 불법적인 인원들이 곳곳에서 사람들을 잡아갔으며 저도 납치됐습니다. 끌려가는 내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외웠고 정념이 매우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납치에 협조하지 않았기에 온몸이 흙투성이가 됐습니다. ‘610’ 책임자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온몸에 흙이나 묻히고!” 저는 이것이 모두 당신들이 납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저속한 말로 말했습니다. “누가 널 납치해서 뭘 하겠어? 네가 처녀야, 아니면 큰 부자야?” 저는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들이 그를 이용해 제 정념을 교란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며 저를 열등감에 빠지고 소극적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찌 그것에 속아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많은 ‘유다(대법 수련을 배신한 자들)’를 불러와 번갈아 가며 에워싸고 공격했으며, 문맥을 잘라내어 사부님의 설법을 왜곡했고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하는 텔레비전 영상을 억지로 보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이른바 ‘법으로 법을 파괴한다’는 짓을 하려고 사부님의 신경문 ‘정법시기 대법제자’를 가져와 제게 보여 줬습니다. 그들은 제가 사부님의 법을 보면 오히려 정념이 크게 강화되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단식한 지 3일째 되던 날, 밥을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갇혀 있을 수는 없다. 나가야 한다. 밥을 먹어야 도망칠 때 힘을 쓸 수 있다.’ 그들은 커다란 그릇에 국수를 가득 삶아 줬습니다. 다 먹자 ‘610’ 책임자는 매우 기뻐하며 먼저 ‘분신자살’ 사건과 베이징에 간 일에 대한 인식을 쓰라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페이지를 써서 그에게 건넸는데, 모두 대법을 수호하고 거짓말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읽고 나서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내일 내가 널 어떻게 손보는지 두고 봐!”

세뇌반에 갇혀 있던 방에는 침대가 세 개 있었습니다. 안쪽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고 바깥쪽에는 나이 든 여성이 있었으며 저를 가운데에 끼워 두었습니다. 옆방에는 젊은 경찰 두 명이 있었고 마당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청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밤 반드시 나가야 합니다.’ 밤에 그 여성들은 감히 잠을 자지 못했고 저 역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줄곧 사부님의 평어 ‘역시 두세 마디를 말하다’를 외웠고, 그로 인해 신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새벽 3시가 넘었을 때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성이 나와 함께 가게 하고 돌아오면 잠들게 해야겠다.’ 결과적으로 밖으로 나갈 때 보니 옆방의 경찰 두 명이 여전히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돌아온 후 그 젊은 여성은 곧바로 깊이 잠들었습니다.

저는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든 여성도 화장실에 가게 하고 내가 떠난 뒤에 돌아오게 해야겠다.’ 그때 그녀는 마치 제 지시를 듣기라도 한 듯 곧바로 일어나 화장실에 갔습니다. 재빨리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와 난방 배관을 밟고 담장 위로 올라갔습니다. 담장 꼭대기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가득 박혀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담장을 넘어 뛰어내렸습니다. 뜻밖에도 아래는 문이 꽉 막힌 폐기된 화장실이었고, 그 과정에서 신발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신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방의 벽은 매끈하고 매우 높았으며 손을 뻗어야 겨우 벽 가장자리에 닿을 정도여서 도저히 다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두 손을 뻗어 벽 가장자리를 붙잡고 힘껏 몸을 밀어 올렸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다시 담장 위로 올라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막다른 곳에 뛰어드는 일이 없도록 지형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멀리 불빛이 보여 그쪽으로 달려갔더니 어느 회사의 경비실이었습니다. 닫혀 있는 커다란 철문 위의 가로대를 밟고 쇠못이 가득 박힌 문을 넘어 맨발로 수련생의 집을 향해 달렸습니다.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수련생이 바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오늘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연공하고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저에게 당신을 기다리도록 안배하셨군요!”

세뇌반의 악인들이 곳곳에서 저를 찾고 있었으므로 당분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집에서는 난방용 석탄도 아직 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공중전화를 찾아 집에 전화해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두라고 알리려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어제 막 노동수용소에서 나왔어.”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부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빈틈없이 안배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탈출한 후 경찰은 마당의 담장 전체에 철조망을 설치했습니다. 경비가 삼엄했지만 그래도 수련생 두 명이 정념으로 탈출했습니다. 이는 사악을 크게 놀라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뇌반은 문을 닫았습니다.

2) 또 단독 세뇌반에 갇혔으나 또다시 탈출하다

몇 달이 지난 2002년 초, 이렇게 계속 떠돌아다니며 살 수는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외출하기는 불편하겠지만 어르신들을 돌보고 아이들에게 밥을 해 줄 수는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수련할 줄 몰랐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법공부를 더 많이 하고 정념을 더 많이 발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중공의 박해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박해로만 여겼기에 그저 확고해야 하고 사악에게 전향해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2002년 추석을 앞두고 다시 납치됐습니다.

진(鎭) 정부에 구금됐습니다. 그들은 여러 명의 ‘교화원’을 데려와 저만을 위한 단독 세뇌반을 열었습니다. 큰 시누이가 옷을 많이 가져다주면서 강제노동 처분을 받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악한 박해를 인정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강제노동 처분을 받도록 안배하실 리 없다.’ 그래서 그녀에게 옷을 다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3일 동안 단식했는데 마침 추석과 겹쳤습니다. 그들은 월병과 과일을 많이 가져와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 앞에서도 전혀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지난번에 탈출했던 일을 알고 있었기에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 모두 네 명을 배치해 저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낮에는 여러 유다가 번갈아 가며 나서서 ‘전향’시키려 했고, 밤에는 방 안에 여자 두 명, 문 앞에 남자 두 명이 밤새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도저히 탈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밤,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옛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교화원’ 역할을 하며 제게 밥을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녀가 무척 가엾게 느껴져 자비심이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잔혹한 박해 속에서 당신이 감히 수련하지 못하게 된 것은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왜 굳이 사악과 한패가 되어 그들을 도와 나쁜 짓을 하려는 건가요? ‘교화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이렇게 큰 죄를 당신이 갚을 수 있겠어요? 제 말을 듣고 그만두세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전향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강제노동 처분을 받게 될 거예요.” 제가 말했습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제게는 사부님께서 돌봐 주시니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제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4일째 아침, 감시하던 사람들은 모두 퇴근했습니다. 교대 근무자 한 명이 갓 도착했는데, 맞은편 방에서 신문을 읽으며 이따금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문득 이것이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바닥과 창문 사이에 창턱이 하나 있었는데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교대 근무자를 힐끗 보니 여전히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몸을 날려 창턱에 올라선 다음 다시 땅으로 뛰어내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습니다. 달려가다 보니 끝에 높은 담장이 있어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펴보니 길가 상점의 뒷마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떤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장은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저는 이미 정문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길가로 나왔을 때 마침 영업용 오토바이 택시 한 대가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정말 사부님께서 안배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 후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또 한 번 구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3) 세 번째로 세뇌반 검은 소굴에 갇히다

세뇌반에서 탈출한 후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떠돌아다녔고,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게를 열고 인테리어를 하고 물건을 들여오면서 17만 위안을 빌렸습니다. 다음 해에는 아들의 결혼식에 거의 10만 위안을 썼습니다. 빚을 하루빨리 갚기 위해 온종일 장사에 매달렸고 법공부를 적게 했으며 심성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늘 속인의 ‘네가 맞고 내가 틀리다’는 다툼에 빠졌고, 그 결과 구세력이 빈틈을 파고들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다시 납치돼 시(市) 세뇌반으로 끌려갔습니다. 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법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제 본성의 일면은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고 구세력이 강요한 이 박해를 부정해야 했습니다.

(1) 법공부 여건을 쟁취하고 심성을 제고하다

중공 악인들은 저를 ‘전향’시키려고 유다 한 명을 보내 대화하게 했습니다. 매우 엄숙하게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나와 대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다른 수련생들과 대화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당신이 하는 말은 나를 전혀 움직일 수 없어요. 당신은 이미 이용당해 박해에 가담했고, 당신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아직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한다면 제발 더는 저를 교란하지 마세요!” 그녀는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 뭘 하고 싶은데요?” 그저 법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로 ‘전법륜’ 한 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유다가 저를 교란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악한 환경에서는 전향하지 않으면 곧바로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으며 거의 예외가 없었습니다. 단식을 시작했고, 이틀 후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당하기 위해 끌려갔습니다. 전향반의 몇몇 폭력배가 억지로 눕히고 머리와 팔다리를 사정없이 붙잡은 채 목에 관을 삽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사부님께서 대부분의 고통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에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나 돌아온 후에는 계속 피를 토하며 기침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안으로 찾으며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여쭈었습니다. ‘사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사부님의 법이 즉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전법륜) 법 안에서 확고하게 믿고 굳게 지킬 수만 있다면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며 꼭 단식할 필요는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단식을 이용해 나가려는 마음도 인식하게 됐습니다.

단식을 그만두고 심성을 제고하며 사람 마음을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2)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자비심을 내다

자신을 조정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발정념을 하며 되돌아 나오는 각종 집착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도무지 조용해지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장사가 또다시 중단될 것을 생각했고, 곧 출산을 앞둔 며느리를 생각했으며, 일찍이 유랑의 고통을 겪었던 두 자녀를 생각했고, 남편과 함께 고난을 겪고 겨우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헤어져야 하는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각종 집착과 사람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특히 강제노동 처분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두려워할수록 악인들은 제 앞에서 더욱 이렇게 떠들어 댔습니다. “지금 전향하지 않으면 노동수용소에 가서도 전향해야 해. 차라리 지금 전향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잖아.”

그들이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명혜망에서 폭로한 노동수용소의 수련생 전향을 위한 각종 고문과 박해 장면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라 떨쳐낼 수도 억누를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사악이 스스로 무너질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것이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외울 수 있는 모든 법을 열심히 외웠으며, 특히 ‘전법륜’ 제6강의 ‘主意識(주이스)가 강해야 한다’를 외웠습니다. 강제노동 처분을 두려워하는 등의 관념은 모두 제가 아니며 구세력이 강제로 주입한 것입니다. 반드시 그것을 제거하고 반드시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이곳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집착이 나오든 사부님의 관련 설법으로 그것을 타파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정은 쉽게 끊어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발정념을 하며 그것을 제거했고, 정수리 부위의 에너지가 매우 강하게 느껴졌으며 마음도 점점 고요해졌습니다. 강제노동 처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졌고 집안의 장사와 자녀들의 생활에 관한 사소한 일들도 더 이상 머릿속에서 맴돌지 않았습니다. 손바닥을 세우기만 하면 곧바로 고요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상태를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내면은 비할 데 없이 미묘하고 환희로웠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을 내려놓고 생겨난 자비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자신이 사악한 검은 소굴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습니다. 내면에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솟아났습니다. ‘어디에 있든 당당하게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3) 대법이 날 구해 주었고 강제노동을 시키려는 시도를 해체하다

현지 국보가 세뇌반으로 데리러 와 노동수용소로 보내려 했지만 제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수용소 밖의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국보 부대대장이 의사에게 직접 말했습니다. “검사할 필요 없어요. 그냥 바로 적으세요. 이 사람은 몸이 아주 건강해요!” 노동수용소 안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검사를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의사와 검사 기계들에게 말했습니다. ‘파룬따파는 좋다는 걸 기억해. 대법제자 박해에 가담하지 말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해.’ 검사 결과 혈압과 심장, 혈액 검사 수치가 모두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뇌반에 있을 때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 심장과 혈압을 측정했는데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고 풀어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 속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설령 정말로 나를 이곳에 남겨둔다 해도 나는…’ 즉시 이 사악한 생각을 붙잡아 해체하고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습니다. ‘결코 사악이 배치한 시련 속에서 수련할 수 없다.’ 머릿속에 갑자기 한 법회의 사회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우리는 반드시 집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수용소에서 수용을 거부당했습니다. 돌아올 때 국보 대대 부대대장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제게 첫마디로 말했습니다. “○○○ 씨, 아침에 왔을 때는 몸이 멀쩡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여기저기가 다 정상이 아니게 됐어요? 설마 정말 당신들 대법이 당신을 구한 겁니까?”

3. 가정환경 속에서 자신을 수련하다

1) 이것저것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을 닦아 없애다

두 번째로 집을 떠나 떠돌다 돌아왔을 때 아들은 여자친구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친구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저희 부부는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해 줬습니다. 이듬해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며느리가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 세 번째로 납치돼 세뇌반에 들어갔습니다. 국보의 강제노동 시도를 타파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며느리는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후 가게를 보며 물건을 파는 것 외에도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고 밥을 하며 설거지하는 등 모든 집안일을 했으며 한 번도 그녀에게 지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 생활할 때나 명절 때에도 그들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그저 온 가족이 즐겁게 지내면 그만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자신의 양육 방식에 따라 매일 몇 시에 밥을 먹이고, 몇 시에 물을 먹이며, 몇 시에 과일을 먹일지 정해두었습니다. 저는 가게를 보며 물건을 팔아야 했고 마음속으로는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일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손님이 많아 바쁘게 일을 마치고 나면 아이에게 밥을 먹일 시간이 지나 있곤 했습니다. 아이를 더 잘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원을 한 명 고용했지만, 때로는 그래도 며느리가 요구하는 시간만큼 정확히 맞추지 못했습니다.

며느리는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바로 티를 냈습니다. 많은 경우 이유조차 알 수 없었고 저는 늘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밥을 다 해놓았는데 며느리가 앉아서 화를 내고 있기에 물었습니다. “왜 밥을 안 먹니?”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제 코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다 어머님 때문이잖아요! 매일 돈 벌 생각만 하고 아이는 제대로 돌보지 않으시는데 돈을 벌어서 뭐 해요?!” 아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와 다투었습니다. “그럼 당신이 돈을 벌어서 뭐 해? 내일 사표 내고 출근하지 마. 당신이 집에서 애 봐.” 며느리는 아들이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휴대폰까지 내던졌고 아들과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며느리를 탓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철이 없을까?! 매일 집에 와서 다 차려놓은 밥을 먹고 마시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늘 트집을 잡아 말썽을 일으키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으로 찾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치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원망과 불평이 아닌가? 분명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 생각났습니다. 아들이 결혼하던 날, 신부 측 친척들이 시비를 걸어 결혼식 장식문에 붙어 있던 신랑 신부의 이름을 떼어 찢어버렸습니다. 관념이 있어서 불길하다고 여겼고 화가 나서 싸우게 될까 봐, 이혼하게 될까 봐, 아들이 난처해질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또 돈 버는 데 지장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며 양보할수록 며느리는 제 앞에서 더욱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이것은 이것저것 두려워하는 사람 마음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인식한 뒤, 생각 속에서 그것을 없애는 데 중점을 두었고 당당하게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제게는 이익심도 있었습니다. 사악한 박해가 시작된 지 10여 년 동안 붙잡히거나 감금되지 않으면 집을 떠나 떠돌아다녔기에 거의 돈을 벌지 못했고 늘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결혼하기 전, 몇 년 뒤에 그들이 집을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며느리는 오히려 제게 “돈을 벌어서 뭐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제가 돈 버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집착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자신의 주장대로 해본 적이 없다. 무엇을 갖고자 생각하여 그것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면 명(命)에 있어야 하고 명(命)에 없는 것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각지 설법 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사부님의 법은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돈 때문에 지나치게 조급해해서는 안 되며 명에 있는 것이라면 조만간 있을 것입니다. 사악의 박해가 없었다면 정상적으로 상점을 운영했을 텐데 어찌 돈이 없었겠습니까?! 사람의 탐욕에는 끝이 없지만 저는 대법제자로서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그 속에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후 장사를 하나의 일로 여기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겼습니다. 오래지 않아 빚을 모두 갚았고 남은 돈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곧 100여 평방미터의 큰 집을 샀습니다. 그 후 집값이 껑충껑충 뛰어 반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올랐습니다. 아들은 200여만 위안짜리 집에서 사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해 집을 팔았고 단번에 100여만 위안을 벌었습니다. 우리 모자는 이것이 사부님의 자비이며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2) 점포가 신기하게 임대되다

아들은 우리집 단층집을 2층 반짜리 작은 별장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으로 이사해 따로 살면 갈등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련을 불러왔는지도 모릅니다. 큰손녀가 5살이 됐을 때 손자를 얻었습니다. 손자가 한 살이 조금 넘었을 때 며느리는 뜻밖에 셋째 아이를 임신했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낙태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낙태가 살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전(深圳) 출장 중에 받는 두 배의 급여 등 좋은 조건도 마다하고 집으로 달려와 이를 막았습니다. 제 압박감은 매우 컸습니다.

남편은 협조인 업무와 그 밖의 대법 실증 항목을 맡고 있어 시간을 많이 쏟았기에 집안일을 돕는 것이 적었습니다. 결국 저 혼자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았습니다. 물건을 들여오고 바꾸고 진열하고 판매하는 일뿐만 아니라, 큰손녀를 등하교시키고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손자를 돌보며 장을 보고 밥을 했습니다. 장기간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법공부를 할 때 졸리고 발정념을 할 때 손바닥이 넘어지는 등 세 가지 일을 잘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주었습니다. 제 몸에는 올바르지 않은 상태가 나타났고, 살이 많이 빠졌으며, 입이 마르고 쓰며 계단을 오를 때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남편과 상의해 가게를 임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지나지 않아 딸 집에 가서 외손자의 돌잔치를 해주느라 하루 동안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화해 가게를 임대하고 싶다며 물건까지 함께 인수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저 가게를 임대할 생각만 했을 뿐 ‘임대’라는 글자조차 하나 쓰지 않았는데 순조롭게 점포가 임대됐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3) ‘다 엄마가 잘못해서 네가 고생했구나’

점포를 임대하고 나서 아들 며느리와 다시 함께 살게 됐습니다. 그해 며느리는 셋째 아이를 임신했는데 거의 매일 화를 냈습니다. 3일에 한 번씩 작은 다툼이, 10일에 한 번씩 큰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출산을 한 달 앞둔 때까지도 혼자 병원에 가서 기어이 아이를 낙태하겠다고 고집했고, 그러지 않으면 친정으로 돌아가 이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가 그녀를 설득하며 낙태와 이혼의 해로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이혼한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야. 설령 너희 둘 다 재혼할 수 있다 해도 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겠니. 네가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잖니, 그러니 나와 함께 집에 가자.” 그녀는 제 선의를 느끼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돈은 며느리가 화를 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저는 음식을 한 상 차려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사돈어른이 말했습니다. “우리 딸이 철이 없어 그동안 두 분께 적지 않은 상처를 드렸습니다. 사위는 사리를 잘 알고 저희 두 늙은이에게도 매우 효도하는데 말입니다. 회사에서도 직원에서 주관, 다시 부경리로 승진하며 일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대표해 사과했지만 며느리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낮잠을 자고 있는데, 며느리가 화가 난 채 위층으로 올라와 둘째 아이를 제 몸 위에 던져 놓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큰 억울함과 모욕감을 느꼈지만 당시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아이와 웃고 떠들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네가 아이를 내 몸 위에 내던지고 갔는데 나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구나. 내가 뭘 잘못했다면 내게 말해주렴.” 그녀는 즉시 표정을 바꾸며 말했습니다. “제가 점심때 아이 둘 재우라고 말씀 안 드렸어요?! 어느 애가 잤어요? 큰애는 위에서 놀고 작은 애는 아래에서 보채고 있었잖아요!”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아이를 사람 몸 위에 내던지는 거야! 네 몸 위에 던져도 되겠어?” 며느리는 아들이 이렇게 따져 묻는 것을 보자 홧김에 보온병을 내던졌습니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온통 흩어졌고 며느리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안심이 되지 않아 아들에게 차를 몰고 가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그녀가 돌아오겠다고 해도 친정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 며느리가 친정에 갔다고 했습니다. 며느리의 손과 발, 다리가 모두 부었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일주일만 머물고 돌아오기로 했는데 지금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그녀를 위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성격이 워낙 강해서 분명 쉽게 돌아오기가 머쓱했을 것입니다. 아들 휴대폰으로 그녀에게 위챗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네가 돌아간 뒤 손발이 모두 부었다고 들었다. 다 내가 잘못해 네가 고생했구나. 아이가 곧 태어날 때가 됐으니 일찍 돌아오렴!” 며느리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 성격이 안 좋아서 그래요. 이틀 뒤에 돌아갈게요.”

4) 법 암기가 관념을 바꾸게 하다

지금 셋째(작은손녀)가 벌써 8살이 됐습니다. 이 20여 년간의 일상생활에서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비록 안으로 찾을 수는 있었지만 늘 근본을 찾지 못한 것 같았고, 고비를 넘길 때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으며 수련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날이 갈수록 야위고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강하게 따로 나가 살자고 요구했습니다. 아들이 집을 사지 않으면 우리가 사도 되고 임대해도 되니, 제가 그들을 위해 더는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부부는 원래 큰손녀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학군이 좋은 곳에 집을 살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손녀가 이미 중학교 3학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집값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지금 사면 오히려 비싸게 사는 셈이 될까 봐, 아들은 제게 1년만 더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 심성 문제이므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더는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진실로 여긴 것이 아닌가요? 어느 날 아침 일어난 후 입이 쓰다고 하자 어린 손자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고생을 낙으로 삼으면 입이 쓰지 않을 거예요.” 이것은 사부님께서 아이의 입을 빌려 저를 일깨워 주신 것이 아닌가요? 어쩐지 조금만 피곤해도 평형을 잃고 원망하게 되더라니, 알고 보니 고생하기 싫고 안일함을 바랐던 것이었고 바로 이 좋지 않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법공부와 법 암기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1년 반 동안 ‘전법륜’ 한 권과 ‘홍음’ 여섯 권을 한 번 다 외우면서 법에서 많은 법리를 깨달았습니다.

원래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돌려놓아야 할지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바로 관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늘 좋다고 여기고 그것을 원한다면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무조건 안으로 찾고 우연히 발생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저 표면적으로만 이해했기에 시련이 닥치면 종종 관념과 조건에 부합해야만 안으로 찾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진정으로 법에서 깨달은 후 즉시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의식하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제 관념이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득 몸에 나타난 올바르지 않은 상태가 바로 안일심 때문에 생겼음을 인식했습니다. 생활 속의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안일심은 고생하러 가지 못하게 하고 고생과 각종 귀찮은 일을 좋은 일로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고생을 두려워하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몸도 빠르게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또 한 번은 경문 ‘정진요지 3-유럽법회에 보냄’을 외우고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그러한 사악한 생명은 구세력이 배치한 것이며, 통제된 것인데, 그것들이 표면적으로 어떻게 날뛰고 악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것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만약 수련생 자신이 잘하지 못한다면, 단지 구세력뿐만 아니라 우주중의 모든 신도 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단번에 ‘대법제자’의 또 다른 층차의 함의를 깨달았습니다. 사악한 생명은 통제되고 안배되어 있어 그것들이 좋게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선택하고 안배하신 존재인데 어찌 잘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생명의 더욱 미시적인 차원에서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 깊이 며느리에게 감사했습니다. 이 10여 년간 제고하도록 돕기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아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넌 집을 사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엄마의 심성이 제고돼서 일해도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단다.”

5) 내가 제고되자 그들도 모두 변하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외할머니가 각각 1년씩 와서 돌봐 주어 꼬박 3년 동안 우리와 함께 먹고 자며 지냈습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제가 너그럽게 대하고 양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먼저 일하고 나중에 먹는다고 자주 칭찬했습니다. 지난해 설을 앞두고 특별히 설 물품을 사서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일 년 내내 너무 고생했다며 우리를 식당에 모시고 가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부부의 생일이 되면 아들 며느리는 늘 식당에 데리고 갔습니다. 지난해 생일에 며느리는 제게 옷 한 벌과 꽃 화분을 사 주었습니다. 올해는 제 본명년(本命年, 띠가 돌아오는 해)이어서 며느리가 일찌감치 빨간색 스웨터 두 벌을 사 주었습니다. 재작년 설에 며느리가 5천 위안을 주었고 지난해와 올해는 각각 1만 위안을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일가는 대법의 은혜 속에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말했습니다. “댁은 참 좋겠어요. 세 아이가 모두 이렇게 컸으니 부부의 공로가 작지 않네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대법이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이치를 이야기했습니다.

세 아이는 모두 자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웁니다. 그들이 어릴 때부터 ‘홍음’을 외우도록 가르쳤고 대법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소건곤(小乾坤)’, ‘부요직상(扶搖直上)’과 각종 진상 동영상 및 진상 영화를 보게 했습니다. 그들이 대법제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제게도 그들을 잘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사부님의 어린 제자라고 말합니다.

4. 줄곧 정법 노정을 바짝 따라가다

자신이 걸어온 비바람 쳤던 세월을 돌아보면 1999년 ‘4·25’에서 ‘7·20’까지, 이후 ‘9평’을 전하고 삼퇴를 권하는 일에서 장쩌민 고소에 이르기까지 현지 수련생들과 모두 정법 노정을 바짝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고, 수련 속에서 한 걸음씩 성숙해지는 동시에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이행했습니다.

1999년 4월 23일, 현지 수련생들과 톈진 교육대학에 갔습니다. 수백 명의 특경이 포위하고 강제로 쫓아내며 사람을 때리고 체포하는 것에 직면해,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라 온몸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함과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법을 외웠습니다. “대법(大法)은 건곤(乾坤)을 바로잡을 수 있으므로, 물론 사악한 것을 짓누르고 난잡한 것을 소멸하며, 원용(圓容), 불패(不敗)의 법력(法力)이 있다.”(정진요지-정론)

잔혹한 박해가 시작된 이후, 천지를 뒤덮은 거짓말에 맞서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전체적으로 협조했습니다. 정법 노정의 필요에 따라 각 향과 진을 개인별로 분담해 한 마을도 빠짐없이 집집마다 진상 자료와 CD를 배포했습니다. 박해에 가담한 책임자를 인터넷에 폭로하고 사례를 현지 진상 자료로 만들어 책임자의 고향과 거주지에 배포했으며, 스티커에 책임자의 이름을 직접 적어 박해를 종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사악을 강력하게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는 또 큰 전시판과 ‘삼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스티커를 모든 마을에 붙였고 전염병 사태가 시작된 후에도 봉쇄되지 않았습니다. 중생들이 무사히 이 재난을 넘길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곳곳에 진상을 전했습니다.

2019년 전염병 사태 전후로 수련생들과 모두 사람 구하는 일의 긴박함을 느껴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며 대면해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한겨울에 다섯 명이 농촌 장터에 가서 진상을 알렸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고 강한 바람까지 불어 노점을 펴고 물건을 파는 사람도 평소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꽁꽁 얼어 진상 달력을 배포할 때 손으로 잡을 수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체하기를 아쉬워하며 각자 몇 사람씩 탈퇴를 권했습니다. 한 수련생은 자비심이 솟아나 진상을 알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사람은 진상을 이해하고 삼퇴를 한 뒤 감동하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추운데도 나오셨네요, 어서 돌아가세요.” 세상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구원받은 것을 본 두 수련생은 서로 끌어안고 감격해 모두 울었습니다.

대법의 인도 아래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저는 자신이 아직 잘하지 못하고 잘 수련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사부님과 대법의 요구에 아직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사부님과 함께하고 법과 함께하는 이 만고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겨 예전과 다름없이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사부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6년 명혜망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6년 11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11/4/515873.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11/4/5158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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