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전란의 이면: 신앙의 빛 (상)

글/ 소가(蕭歌)

[명혜망] 최근 중국에는 고대에 전란이 끊이지 않아 태평성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는 목소리가 있다. 공식 승인을 받은 베스트셀러, 드라마, 숏폼 영상 등의 형태로 전파되며 이런 주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잦은 전쟁 속의 유랑, 격렬한 권력 투쟁, 빈번한 정권 교체를 보면 고대의 대부분 시기에 서민들은 좋은 날을 며칠 보내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5, 60년대에 중국공산당(중공)은 전통문화를 근절하고 문화대혁명 기간에 ‘파사구(破四舊,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함)’를 발동해 봉건 미신을 타도했으며, 고서를 불태우고 고건축물을 철거해 물질적 측면에서 전면적인 파괴를 가했고,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잠시 잊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세대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청나라 말기나 민국(民國) 시대에 태어난 그들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기억과 인식은 지워버릴 수 없었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 시대에 태어난 이 세대가 점차 모두 세상을 떠나자, 중국 전통문화의 혈맥에는 ‘진공’ 상태가 나타났다. 반면 발언권을 장악한 중공은 문화대혁명의 ‘파사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국 고대 문화를 다시 선별, 수정, 해석하기 시작했다. 당이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역사’를 문학화, 이야기화, 예술화 등의 수법으로 출판, 영화 및 TV, 뉴스 매체 등의 분야에서 고대를 궁중 암투, 전쟁, 충돌 등의 모습으로 묘사했고, ‘계급 투쟁’과 ‘무신론’을 핵심 사상으로 삼아 역사와 조상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새로운 세대에게 주입했다.

이러한 일상적이고 광범위하며 예술화된 표현 방식은 점차 하나의 전반적인 인상을 형성했다. 폭력 투쟁은 계급 불평등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왕조 교체가 있었던 것이며, 이는 ‘계급 투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는 통치자가 인민을 환각에 빠뜨리고 고난을 감수하게 만드는 도구이므로 ‘무신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으로 인한 할거(割據)와 군벌의 혼전은 불안정을 초래하고 고통받는 것은 서민들이므로,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국 서민들은 늘 혼란스러우면 안 된다며 6·4 진압(천안문 사건)과 파룬궁 탄압은 옳았고, 만약 자신이 지도자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중공은 정교하고 체계적인 세뇌술로 세상 사람들의 관념과 사고를 형성하고 있다. 즉 고대에는 전란이 빈번하고 인민이 극도로 고통스러웠으니, 강력한 ‘무산계급’ 정권을 유지해야만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휴대폰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숏폼 영상이 범람하는 가운데 중공이 ‘허가제’라는 통제 방식을 취하는 상황에서, 만약 일부 문제를 명확히 해명하지 않는다면 고대 역사와 문화를 먹칠하는 ‘독의 흐름’이 사회 전체를 위험한 지경에 빠뜨릴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다음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 고대의 전쟁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 중공이 ‘허가’한 각본은 어떻게 쓰였는가?

· 역사의 진상은 무엇인가?

여러 다른 차원의 비교를 할 때, 비난이 가장 많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서기 220년~589년, 약 370년) 시기를 예로 들어 사망자가 많고 민간이 유랑하며 고통받았다고 지탄받는 것 외에 북방과 남방에서 각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잔혹한 석호에게도 불성의 일면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전쟁이 일상이었고 죽음과 인구 이동이 수반돼 확실히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역사적 전란의 이면에서는 전쟁 이외의 많은 일도 일어나고 있었으니,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함께 보아야 비로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인 마왕으로 묘사되는 북방 후조(後趙)의 석호(石虎)는 폭력적인 살육과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는데, 중국에서 출판된 도서들은 그의 잔혹함을 상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공산당의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이론에 부합하기에 석호를 끔찍하게 묘사할수록 좋고, 그래야 공산당의 ‘토호를 타도하고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부각되기 때문이다.

고승전·신의에서 ‘천하제일신승’으로 불린 불도징

그렇다면 석호의 이면은 어떤 모습일까?

《태평광기(太平廣記)》의 기록에 따르면, 석호는 불교를 지원하고 승려 불도징(佛圖澄)을 존경하며 받들었다. 그는 문서를 반포해 “스님은 곧 국가의 큰 보물이시지만, 영예로운 벼슬을 덧붙이려 해도 원치 않으시고 높은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신다. 영예로운 벼슬과 높은 녹봉을 드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인덕을 표창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마땅히 비단옷을 입으시게 하고 보배로운 수레를 타시게 하라. 조회하는 날 스님께서 전각에 오르실 때면 상시(常侍) 이하 관원들은 모두 가마 드는 것을 돕고, 태자와 여러 공(公)은 수레를 부축해 조정에 오르도록 하라”고 했다. 불도징의 만류와 타이름 덕분에 석호의 살육은 크게 누그러졌다.

어떤 대신이 석호에게 상소를 올려 부처는 서역에서 온 외국의 신(오랑캐의 신)이므로 화하(華夏)의 천자가 마땅히 믿고 받들어서는 안 된다며 한족의 출가를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석호는 “부처님은 오랑캐의 신이니 바로 받들어야 마땅하다”라고 여겼다. 석호는 영토 내의 모든 백성이 종족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출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의 출가를 허용한 공식 명령이었다.

이런 세부적인 내용은 베스트셀러에 등장하지 않는다. 중공이 1950년에 철저하고 장기적으로 불교를 탄압해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비구니들을 시집보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불교가 비록 회복되긴 했지만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당 영도하의 애국 종교에 속하며,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원칙이 있으니 중공 당원은 어떠한 종교 신앙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아무리 전쟁이 빈번했어도 정권을 잡은 천자들은 모두 자신을 화하의 일원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화하를 다시 하나로 통일할 것인가? 어떻게 유(儒), 불(佛), 도(道)가 중생에게 혜택을 베풀게 할 것인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북방 전진(前秦)과 후진(後秦)의 군왕들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장안(長安)으로 맞이해 대규모 경전 번역 사업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중국 대승 불교의 이론적 기초를 다졌다. 머나먼 서북쪽 밖의 서량(西涼) 왕국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을 뚫고 지어, 불교가 중원으로 전파되는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됐다.

위진남북조의 수많은 소국은 모두 유성처럼 짧게 지나갔고, 나라가 얼마나 강하든 약하든 전쟁과 살육을 위해 무력을 동원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바로 화하의 통일이었다. 아울러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동란이 재발하지 않게 할 정신적 신앙을 찾기를 바랐으며, 유·불·도 3교가 서로 어우러져 빛을 발했고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수련해 선을 향하게 하고 도덕을 승화시키며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하게 하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련의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천상(天象)의 변화이고 왕조의 교체는 천상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모든 소국에는 완수해야 할 ‘천명’이 있었다.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후 그들은 신속히 퇴장했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인구의 대이동과 문화의 대융합을 가져왔으며, 그 이면의 진정한 의미는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더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거대한 고통을 겪게 했고, 그 고통 속에서 업력을 소멸시켰으며, 고통과 격렬한 갈등 속에서, 그리고 생사의 이별 속에서 영성이 높은 많은 이가 생명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말해 중국 역사상의 전란은 형식적인 대격동 외에도 더 깊은 차원의 효과와 의미가 있었다.

운강석굴 불상은 황제의 용모인가?

위진남북조는 불교가 중국에 보급될 수 있었던 핵심 시기였다. 한나라 말기 불교가 중국에 막 전파되었을 때는 소수의 사람만이 받아들였다. 남북조 시대, 특히 북위(北魏) 시기에 이르러 불교는 널리 전파됐다.

운강석굴 담요 5굴 중 하나

하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표현이나 많은 관련 도서에서는 북위가 불교를 전파한 것은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고, 북위가 조성한 운강석굴(雲岡石窟)의 불상은 황제의 용모를 본떠 만든 것이며, ‘종교는 봉건 계급이 인민을 마취시키는 아편’이라는 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더 구체적인 주장으로는, 황제가 자신의 용모에 따라 불상을 만들라는 조서를 내렸으므로, 불상을 건립한 황제는 이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고 불상을 통해 서민들의 인정을 받아 정권을 공고히 하려 했다고 여긴다.

사실 전문가들은 이런 주장이 중공의 정밀한 검열을 거친 후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 견강부회하고 문맥을 단절시켜 가공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출판물에 보편적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늘날 운강석굴 현장 해설에서 가이드가 관광객에게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이드들은 ‘담요(曇曜) 5굴’의 다섯 불상이 각각 북위의 다섯 황제를 대표하고, 다른 석굴들은 다른 황제들에 해당하며, 어느 것이 풍(馮) 태후이고 어느 것이 효문제(孝文帝)인지 아주 생생하게 설명한다. 공산당의 ‘무신론’은 이렇게 반복되면서 수천만 관광객의 뇌리에 시각적이고 생동감 있게 각인되고 있다.

진상은 무엇일까? 사실 24사(史) 중 《위서·석노지(魏書·釋老志)》만 펼쳐봐도 거짓말은 금세 들통난다.

총 1만 2천여 자에 달하는 《위서·석노지》는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과 변화를 상세하고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태어날 즈음 중국에서는 하늘에 새로운 항성이 탄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석가모니 이전에도 6명의 고불(古佛)이 있었고, 그는 이 6명의 고불 뒤를 이어 여래(如來)의 과위(果位)를 증득했다. “석가모니가 비록 열반에 들었으나 인도에 그림자와 손톱, 치아를 남겼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중원의 왕래하는 이들이 모두 이를 보았다고 칭했다.” 석가모니는 비록 열반했지만 손가락뼈 사리와 치아를 남겼고 왕래하는 중원 인사들이 친히 그것을 보았다. 위(魏) 명제(明帝)가 일찍이 불법을 훼손하려 했을 때, 한 승려가 불사리를 궁전 앞 물에 던지자 오색 빛이 피어올랐고, 명제는 경탄을 금치 못하며 훗날 사찰을 지어 공양했다.

한번은 길을 가던 황궁의 어마(御馬)가 갑자기 한 승려의 옷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는데 이 승려가 바로 담요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이 선인을 알아본다’라고 여겼다. 문성제(文成帝)는 담요를 스승의 예로 받들었다. 담요가 건의했다. “산의 석벽을 뚫어 다섯 곳의 석굴을 열고 각각 불상 하나를 새겨 넣으십시오. 높은 것은 70척, 다음은 60척으로 하고 조각과 장식을 기이하고 훌륭하게 하여 당대 으뜸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운강석굴의 유래다.

북위 화평(和平) 원년부터 화평 6년(460~465년)까지 승려 담요는 북위 문성제의 명을 받들어 ‘담요 5굴’의 영건을 주도했다. 어떤 전문가는 ‘담요 5굴’ 조상(造像)에 대한 분석을 거쳐, 불상의 용모가 신장(新疆)의 옛 쿠처(龜玆) 석굴 및 간다라 예술과 더 많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불상의 얼굴은 깊은 눈과 오뚝한 코, 넓은 어깨와 두툼한 입술 등 전형적인 서역 양식으로 북위 황실의 부족 특성과 단순한 대응 관계가 아니다. 《위서·석노지》에도 담요가 황제의 용모를 본떠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중국 출판물에서는 황제가 내린 조서를 ‘담요 5굴’과 직접 연결 지어 억지로 꿰맞추고 문맥을 단절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석불을 건조하라고 명령한 황제가 있었을까? 있었다. 그 역시 북위 문성제였으나 그때는 서기 452년이었다. 그는 또 사람을 시켜 그 불상의 얼굴과 발에 각각 작은 검은 돌을 박아 넣게 했다. 문성제는 또 도성의 5급(級) 대사(大寺)에 북위의 다섯 황제를 대표하는 5존의 불상을 조성하라고 명령했으나, 그것도 운강의 ‘담요 5굴’ 불상은 아니었다.

서기 386년 법과(法果)라는 승려가 말하길, 북위 태조(太祖)가 우리를 인정하시니 그분이 바로 현세의 여래이시며, 내가 그분을 뵙는 것은 천자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차원과 경지가 다르므로 언행의 표현도 다르지만, 개인이 한 말은 당시 개인의 인식일 뿐 불법을 대표할 수 없으며, 후세 사람들이 부처를 배우고 불법을 인식하는 근거로 삼을 수도 없다.

《위서·석노지》에는 불교에 대한 북위 효문제의 견해가 기록돼 있다. 효문제는 군주가 신령을 공경하고 받들어야 비로소 국가를 안정시키고 서민을 평안하게 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그러했다고 여겼다. 또한 석가여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중생의 선량한 본성을 일깨워 정각(正覺)으로 수련해 낼 수 있게 하므로 불법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원문: “대체로 제왕 된 자는 반드시 신명(神明)을 받들고 인도를 창달해야 한다. 서민에게 은혜를 베풀고 뭇 생명에게 이익을 준 자는 비록 옛날 사람일지라도 그 훌륭한 기풍을 기렸다. 이런 까닭에 《춘추》에서 신명을 숭상하는 예(禮)를 찬양했고, 제사 의전에는 공로를 베푼 족속을 기록했다. 하물며 석가여래는 대천세계(大千世界)를 구제한 공로가 있고 진세(塵世)에 은혜를 베풀었으니, 생사를 평등하게 보는 이는 그 달관에 감탄하고 글과 뜻을 살피는 이는 그 오묘하고 밝음을 귀하게 여긴다. 왕정의 금률(禁律)을 돕고 어질고 지혜로운 착한 본성을 더하며, 뭇 삿된 것을 배척하고 정각(正覺)을 열어 연설하신다. 그러므로 이전 시대 이래로 숭상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한 우리 국가에서도 항상 존경하여 받들어 왔다.”]

만약 독자들이 계기가 돼 《위서·석노지》를 온전히 읽을 수 있다면 불교에 대해 명확하고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불가(佛家)에 8만 4천 법문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법문에는 저마다의 수련 방법이 있는데 그 목적은 수행을 통해 세속의 질곡과 국한을 벗어나 반본귀진하여 천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속)

 

원문발표: 2026년 10월 12일
문장분류: 천인사이(天人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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