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1)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명혜망]

1. 인생의 고달픔

저는 1954년 9월 17일, 춥고도 추운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룬(海倫)현 룬허(倫河)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 정해진 인연이었는지 제 출생지 이름은 모두 바다(海), 물(水)과 관련이 있었고, 이로써 제 이번 생의 인생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은 당시 마을의 초·중학교 교사셨고, 어머니는 스무 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태어난 지 몇 달 동안 저는 건강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제가 생후 8개월 때 경기를 앓았는데 갈수록 경련이 심해져 거의 희망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회중시계를 품에 넣고 밤낮으로 저를 간호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칠십 대의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우리집에 와서 저를 진찰하고 침을 놓아준 뒤 부모님께 “이 아이가 경련하는 간격이 갈수록 길어지면 낫겠지만, 자라서 입과 눈이 비뚤어지는 후유증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이 다녀가신 후 저는 정말로 경련하는 간격이 길어지며 나았지만, 그분이 말씀하신 후유증은 남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지나가던 그 노인에게 매우 감사해하며 사방으로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두 살 때 여동생이 생겼고, 이후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으며, 우리 가족은 룬허진에서 하이룬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현위원회에서 선전 업무를 맡으셨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다시 하얼빈 쑤이화(綏化) 지구 행정관서로 전근 가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현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부모님이 일 년 내내 떨어져 지내신 데다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아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분담하고 동생들을 돌봤습니다. 8살 때 밥 짓기를 시작했고, 조금 더 커서는 나가서 석탄 부스러기를 줍고 한밤중에 마구간에 가서 말이 먹다 남기거나 땅에 떨어진 여물 등을 쓸어와 밥 짓는 땔감으로 썼습니다. 저는 점차 많은 일을 배웠고 스스로 잘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매우 믿음직스러워하며 철이 들었다고 칭찬하셨고, 동생들도 저를 의지했습니다. 저는 종종 맛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동생들에게 다 양보하고 저는 먹지 않았는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년의 소위 ‘자연재해’ 시기에는 곡식을 거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감자, 비지, 술지게미(두부나 술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지금은 돼지 사료로 씁니다)를 자주 먹었고, 부모님은 굶거나 하루 한 끼만 드시며 남은 음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철이 들 무렵부터 저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혼자 있을 때면 창가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고, 때로는 강가 물웅덩이에 가서 물가에 앉아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우울해했습니다. 때로는 마치 제가 배를 타고 물결 따라 항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럴 때면 몽상에 잠기곤 했습니다. 물이 아주 크고 넓게 변하고, 제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그 아름다운 동경이 저를 자꾸 이끌어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리게 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저만의 작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제가 12살 때 아버지의 직장이 하얼빈에서 쑤이화시로 옮겨지면서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됐습니다. 막 좋아지려던 생활에 다시 새로운 그늘이 드리워졌는데, 어머니가 병에 걸리신 것입니다. 동북 지역 풍토병인 기관지염과 폐기종이었는데, 한번 발병하면 매우 심했습니다. 저 역시 몸이 늘 좋지 않아 비쩍 마르고 허약했으며, 크고 작은 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하얼빈에서 근무하실 때 저를 데리고 하얼빈 시내 큰 병원들을 다니며 검사받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진단받은 병명만 해도 선천성 심장병, 흉막 유착, 알레르기성 자반증, 급성 간염, 빈혈 등 수두룩했고, 잔병치레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주 열이 나고 목이 붓고 아파서 하루 종일 비몽사몽 했으며, 아파서 말도 못 하고 감기는 다반사였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제 몸이 약해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다는 걸 다 아셨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저를 특별히 배려해 농촌 봉사활동이나 등산 등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억지로 참가했습니다. 부모님도 저를 걱정해 모아둔 달걀로 따로 음식을 해주셨고, 몸이 너무 안 좋을 때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병가를 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병에 비하면 저는 나은 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병 때문에 조기 퇴직하셨고, 종일 기침하며 밤에는 누워서 주무시지 못해 베개를 높이 쌓아 벽 모서리에 기대어 계셨습니다. 저는 자주 한밤중에 일어나 어머니의 등을 두드려 드리고 물을 떠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시자 집안의 절반 이상이 마비된 것 같았습니다.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밥을 먹어야 했고, 병원에 가서 어머니 약을 타오고 진료를 받게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힘드셨는데 출근도 하셔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정상적인 직장 생활과 가정을 위해 제가 생활의 무거운 짐을 짊어졌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 짓고, 물 긷고, 어머니를 간호하고, 학교에도 가는 등등. 저는 너무 힘들어서 밤에 잘 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모를 정도였고 자주 어머니가 깨우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질병의 고통에 시달려 성격이 갈수록 나빠지셨습니다. 육체적인 피로가 견딜 만하다면, 정신적인 억압은 가장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집에 늘 환자가 있으니 분위기가 우울했고 온종일 병마와의 싸움 속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반의사가 되셨습니다. 저의 피로, 고통, 인내와 헌신을 부모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몰래 우리 4남매를 평가하시는 것을 자주 들었는데, 부모님은 늘 저를 첫째로 꼽으며 큰애가 제일 착하고 사려 깊고 철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거의 꾸짖지 않으셨고 가장 예뻐하셨습니다. 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은 이런 환경 속에서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12살 때부터 앓기 시작해 20년간 거의 매년 입원하셨고, 제가 32살 때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혼자 깊이 생각하고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시기(초·중학교)에도 혼자 있을 때 자주 남몰래 눈물을 흘렸는데, 삶이 고달파서도 아니고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이 되어 겪는 고통과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막막하여 마음이 늘 시큰했습니다. 특히 중학교 때 점차 철이 들고 접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표현을 잘하고 말재주가 좋으며 생활 지식도 풍부하고 즐겁게 대화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을 흉내 내려 해봤지만 배울 수 없어서, ‘그럼 배우지 말자, 나는 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제가 괴팍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말씀을 제일 잘 들었는데, 아버지는 저를 쉽게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라 그런 말을 들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주의는 하지만 그들과 융화되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제 모습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 본래 모습은 여전히 저만의 특징이 있었고, 그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자신을 억지로 사람들과 융화시키려 하는 것, 사실 그때는 그것도 일종의 고통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오직 선(善)한 마음 하나뿐인 것 같아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했습니다. 어떤 동급생들은 저를 괴롭히며 제 도시락 반찬을 훔쳐 먹기도 했습니다. 제가 집에서 요양할 때 어떤 동급생들은 등굣길에 우리집 앞을 지나며 이유 없이 저를 욕했습니다. “넌 쉴수록 더 아프고, 아프니 더 쉬는구나?” 저는 싸울 줄도 몰랐고 변명 한마디 할 줄 몰랐으며, 그저 속으로 ‘욕하면 욕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여전히 잘 대해줬습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3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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