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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치는 21년간 직장에서 법을 실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어떤 사람들이 파룬따파 수련생으로서 내가 어떤지를 우리 학교 교장에게 물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나를 이르는 말)는 총명합니다. 파룬궁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 당신은 그녀를 바꿀 수 없어요.”

한 교직원은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신앙 자유이고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파룬궁이) 좋지 않다면 누가 수련하겠어요?”

또 다른 직원은 내가 “직무평가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중국공산당 지지 관련 제1조에서 점수를 모두 잃더라도 다른 분야에서는 점수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우리 학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다른 직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도 내가 수련하는 파룬궁을 더 지지하게 되었다.

다음은 지난 21년 동안 내가 우리 학교에서 대법을 실증한 이야기이다.

* * * * * * *

나는 1999년 7월부터 교편을 잡았다. 보름 후, 중국공산당이 전국적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신(新) 수련생이었고 이 도시에서 다른 수련생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혼자서 천안문 광장에 갔다.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부님! 제발 도와주세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박해의 시작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학교 교사들은 걱정이 컸다. 중국공산당의 선전에 현혹된 한 직원은 1999년 4월 25일 평화청원의 책임을 수련생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청원하러 천안문 광장에 갈 수 없다! 마음 내킨다고 어디든지 가서 청원할 수는 없다.” 나는 설명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부에 말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나를 공격했고, 목소리를 높여 중국공산당이 선전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나는 파룬따파의 ‘진선인(真·善·忍)’원칙에 따라 자신을 차분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가 맞서 싸우지 않고 있을 때, 다른 선생님들이 소동을 듣고 교장에게 개입해달라고 했다. “됐어요. 그만합시다.” 교장 선생님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 후, 지역 경찰이 교정에 자주 나타났다. 그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왔다”라고 했다. 몇몇 선생님들은 나의 안전을 걱정했다. 나는 항상 파룬따파의 가르침을 기억했기 때문에 경찰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다. 우리의 대화는 간단했다. 나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시다시피 당신의 고향에서 이 도시로 호구를 정식 전입하지 않으면 계속 임시직이라며 내가 언제든지 직장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당신과 학교가 상부로부터 받는 압박을 이해합니다. 여러분의 지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나는 천안문 광장에 가서 현수막을 펼쳤고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군 주택가에 자료를 배포한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우리 학교 사람들이 구치소로 와서 나를 데리고 나와 나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내 대법 책을 가져갔고 사람을 지정해서 매일 내 거처를 방문하게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남들이 우리를 나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에게 우리가 어떻게 좋은지를 알릴 수 있고, 오직 선한 일면으로 그에게 이치를 말해야 한다.”[1] “우리는 착한 마음씨를 말하고 선심(善心)으로 남을 대한다. 나는 늘 이런 말을 하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어떠한 관념도 가지지 않고 남과 말하면서 남에게 그의 결점을 지적하거나 그에게 무엇을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1]

나는 이 말씀을 명심했다. 누가 와도 피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그들에게 파룬따파가 얼마나 훌륭한지 말하고, 수련에 대한 나의 기쁨과 내가 깨우친 원리를 나눴다. 학교 직원들은 더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고, 종종 나를 도와주었다. 내가 일주일 내내 배추를 먹고 살면서 학교 식당에서 음식을 사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종종 식료품을 가져와서 함께 요리하고 먹었다. 파룬따파에 대해 이해한 후, 그들은 내가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들 중 몇몇은 ‘전법륜(轉法輪)’을 읽겠다고 책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다른 사람이 나의 믿음에 대해 오해할 때 나를 옹호했다.

정규직으로 전환

얼마 후, 나는 원래대로 교직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을 아끼고 열심히 일했다. 이 학교가 채용한 여타 최근 대졸자들과 비교하면, 학생들 성적, 체육, 교실 청결도, 그리고 다른 교사들 피드백을 보면 내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당시 나는 특정 학년 중 최악의 학급을 배정받았다. 경험 많은 이전 담임교사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최근 대졸자인 내가 그 자리에 갔다. 나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학생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를 존경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성취도가 높았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효율이 높아지도록 학생을 도울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계속 말썽을 일으키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종종 숙제를 빼먹고 수업 듣기도 힘들어했다. 다른 교사들이 그의 문제를 나에게 알려왔다. 나는 더 잘하도록 그를 격려하고, 더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반 학생들 앞에서 내 뺨을 때렸다. 파룬궁 수련생으로서, 나는 그 모욕을 그냥 넘겼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았다.”[2] 매일 법을 배우며 수련의 기초가 있었기에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그 학생이나 학교에 좋지 않을 것을 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나는 돌아서서 깜짝 놀란 학생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예정된 수업을 마쳤다. 나중에, 학교 직원들이 다른 학생들로부터 이 사건에 대해 들었다. 한 명이 물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해서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한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필부(匹夫)는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들고 싸운다.”[3]라고 말씀하신 것을 말해줬다. 사부님께서는 또한 한신이 모욕을 참은 것을 예로 들어 주셨다. 만약 내가 그 학생과 싸웠다면, 다른 학생들도 싸움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모욕에 대해 친절과 용서를 베풀었으므로, 학생들은 더 나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수련생으로서 잘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되었다. 나는 다른 신입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정규직이 됐고, 호구 이전도 별 탈 없이 처리됐고, 다른 사람들처럼 직원 복리후생도 받았다.

노동교양소에서

법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 발정념에 대한 법리를 이해하지 못해 발정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공간의 개념도 혼란스러웠다. 많은 경우 사람 마음에 의지해 어렵게 했으며, 사부님께 부탁드릴 줄 모르고 수련에 대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집의 아이가 꿈에 배에 물이 새서 내가 물에 빠졌다며 겁에 질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납치돼 노동교양소(이하 노교소)로 끌려갔다. 파룬따파에 대한 믿음 때문에 독방에 갇혔고 나를 감시하기 위해 수감자 몇 명이 배치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고함에 고소장을 넣어 그들이 나를 학대한다고 신고했다. 상급자들은 나의 불만 사항을 조사했고 나중에 내가 속한 부서의 팀장을 질책하고 좌천시켰다.

이후 불법으로 훈련팀에 옮겨졌지만, 여전히 신고함을 통해 수련생 학대를 신고하려 했다. 나를 감시하도록 배정된 수감자들은 종종 나를 바닥에 밀치고 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등 나를 막았다. (그들은 항상 수건을 들고 다니며 수련생들 입을 막았다.)

한번은 한 경찰이 몰래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쓴 편지는 실제로 효과가 있어요.”

훈련팀 부대장 한 명이 나에게 우리 학교에 편지를 쓰라고 거듭 제안했다. 당시 학교장이 교체된 상태였고, 나는 노교소에 갇혀 있는 동안 직장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정념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헤쳐나가는 데만 집중했다. 게다가, 내가 학교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내가 파룬따파, 박해와 강제노동에 관해 쓴다면, 그 편지는 결코 노교소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학교 직원들이 나를 위해 내 편지를 공개적으로 읽고 토론할 수 있을까? 안부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차장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으므로 거절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법제자로서 정의와 합리성, 지혜로 법을 실증할 필요가 있었다. 편지에서 불평하거나 동정을 구하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이 한 법문,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이 부분은, 속인 사회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 속인과 같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3]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나는 진심 어린 편지를 썼다.

“오랜 시간 동안 학생들과 떨어져 지내니, 학생들이 매우 그립습니다. 저는 저의 일을 사랑하고 학교 직원들의 지지에 매우 감사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가족 같았는데 차 한 잔도 함께하지 못해 착잡합니다. 학교에서 저를 잘 아는 분들이 저를 위해 몇 마디 해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분들 아니면 제가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요?”

“또한, 제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교사로서 정직, 공정, 인내의 윤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저는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양심을 어기거나 원칙을 굽히지 않을 것이며, 학교 직원들과 다른 선생님들이 제게 주신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고생은 되겠지만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 역사의 장이 끝나고 나면 학교 관계자들과 교사들은 저를 돕는 것이 옳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며칠 후, 나는 그 편지가 발송되었다고 들었다. 대법제자의 정념이 금강처럼 견고하여 사악한 요소를 녹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때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와서 교장이 나에게 매달 월급의 일부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알려줬다. 나는 여동생의 말을 자르며 그건 석방된 후 이야기하자고 했다. “어떻게 된 거요? 지금 고용주가 당신에게 돈을 지급하고 있나요?” 한 경찰이 우리 대화를 엿듣다 헤드폰을 벗으면서 물었다. 나는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먼저 여기서 나가야 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알겠어요?” 우리 학교나 학교 직원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수많은 고용주가 수련생들을 해고하기 위해 노교소에 오는 것을 봐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내 편지를 받은 후 교직원들이 중국공산당 위원회 회의에서 이 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편지에서 파룬따파를 직접 언급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없으므로, 최소한 급여의 일부를 나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수련생이 수련의 길을 잘 걸으면 주변 환경도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풀려났을 때, 노교소에서 나를 데리고 나온 한 경찰이 말했다. “아마 당신은 가정교사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돈은 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내가 직업을 유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에 감사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시 ‘정념정행(正念正行)’을 외우고 있었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4] 그 순간, 나는 직업이 있든 없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일에 나는 학교에 전화해서 귀가했다고 알렸다. 전화 받은 사람이 한마디로 답했다. “잘됐네요, 그럼 다시 출근하세요.”

타인을 배려하고 직장에 정착하다

나는 석방된 지 이틀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새로운 지도자들과 새로운 선생님들이었고,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장벽이 있는 것 같았다. 모두 나와 거리를 두었다. 과거에는 파룬따파에 호기심이 많았으나 지금은 “누구든지 당을 거스르면 안 된다”고 했다. 대법에 대한 언급이나 그와 관련된 어떤 것도 ‘민감한’ 주제로 여겨졌다.

업무와 일상적인 화제 이외에는 모두가 이 화제를 피하는 듯했다. 직원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누군가 나를 신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감히 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으로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사부님께서 시 ‘빨리 알려라’에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 진상을 알리려고 입속의 예리한 검 일제히 뿜어내네. 썩은 귀신의 거짓말을 폭로하나니 다그쳐 구도하고 빨리 알리세”[5]

그 직원들이 내 월급과 일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증오 선전과 대법에 대한 일반 대중의 오해,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온갖 박해 정책들 속에서, 환경을 바꾸기 위해 내가 무언가 하지 않는다면, 대법 수련생들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나는 수련생으로서 장벽을 극복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교직원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들은 파룬따파의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수련생들을 변호하던 변호사들도 체포되고 있었는데, 누가 감히 공공장소에서 파룬따파 자료를 받아들일까 싶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3] “연공인은 시시각각 모두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6]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나는 교직원들을 더 배려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나와 같은 수련생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의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파룬따파 정보가 담긴 DVD를 신문에 싸서 직원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신문을 테이블 위에 살며시 올려놓은 후, “○○님, 신문을 가져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살펴봐 주세요. ○○님이 경영진이시라서 이것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게다가, 저는 당신을 신뢰하거든요. 이렇게 하면 무슨 일인지 아실 수 있겠죠.” 나는 신문 안에 DVD를 넣은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도 했다.

한 직원이 “파룬따파를 홍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많은 사람이 저와 파룬따파에 대해 오해하는 환경에서 동료들과 정상적으로 일하기가 어렵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동의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주요 교직원들에게 DVD, USB 드라이브, 또는 파룬따파 정보가 담긴 개인 편지를 주면서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갔다. 나의 배치는 그들에게 정보자료를 주고 그들의 피드백이나 조언을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호 이해와 상호 신뢰와 같았다. 그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자료들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나는 직장에서 낮은 자세를 지키며 항상 존중하고 기꺼이 도와줬다. 겉으로는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나를 돕기 위해 합법적인 수단을 쓸 수 있었다. 직장에서의 나의 업적을 인정하고 회의에서 파룬따파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동료들도 이것을 알아챘다.

때때로 경찰관들과 610(장쩌민이 조직한 파룬궁 박해 전문 불법 기구) 관계자들이 학교에 와서 내 상황을 확인했다. 우리 학교 직원들은 처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내가 ‘문제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박해가 심해진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사실 이(공안과 610사무소)분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며 교직원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을 자주 나누거나, 아니면 직원들에게 “이 일(파룬따파)에 대해 잘 알고 계세요. 그러면 경찰이 방문할 때 처리하기 쉬울 거예요”라며 격려했다. 때로는 단호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저는 나쁜 짓도 하지 않았고 나쁜 짓 비슷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어요. 저를 믿으세요.”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파룬따파 수련생으로서 내가 어떤지 내가 다니는 학교 교장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교장이 답했다. “그녀(나를 이르는 말)는 총명합니다. 파룬궁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 당신은 그녀를 바꿀 수 없어요.” 일부 교직원도 그들끼리 이에 관해 이야기하며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신앙 자유이고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파룬궁이) 좋지 않다면 누가 수련하겠어요?” 일부 중간 관리자들은 내가 “직무평가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중국공산당 지지 관련 제1조에서 점수를 모두 잃더라도 다른 분야에서는 점수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들의 태도는 다른 직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부 동료들은 “누군가 그녀(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모두 중국공산당을 그만둘 것이다!”라고 용감하게 소위 ‘부적절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한 명은 “중공은 마피아와 같다”고 말했다. 이 대화는 사무실에서 나눈 것이다. 여론이 많이 바뀌었다.

이렇게 발전하여, 나는 대법 정보가 담긴 USB 드라이브를 일반 동료들에게도 줬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신뢰하는 데 대해 고맙게 여기며 받은 것을 안전하게 뒀다. 공안이나 특수요원들이 학교에 와서 나에 관해 물으면 동료 몇 명은 차를 내주었고 학교 관계자들은 음식을 대접했다. 공안은 “그녀는 좋은 교사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녀도 잘 크고 있다. 파룬따파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녀는 일을 잘 하고 있고 우리는 그녀와 함께 행복하다”는 말을 들었다. 현지 공안도 나를 보고 기분좋아 하며 나에 관해 좋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오늘 세상의 일체 생명은 모두 법을 위해 왔다. 당신이 그로 하여금 이 점을 청성(淸醒)하게 인식하게끔 하려면 당신은 진상을 알려야 한다. 이것이 만능열쇠이며, 중생에게 오랫동안 봉해져 있었던 그런 일, 중생이 이미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일을 열 수 있는 열쇠이다.”[7] 나는 이제 이 가르침을 더 잘 이해했다.

동료 수련생 구출

얼마 후 조직개편이 있었고 지도부가 바뀌었다. 새 지도자들과 교사 1000여 명이 하는 첫 학교 전체 회의에서, 이 학교의 당 비서가 연설한 다음 나를 호명했다. 나는 약간 긴장했다. 당 비서 겸 인사과장은 나를 모르지만 새 직책을 맡은 이후 경찰이 다섯 차례나 학교에 왔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라며 “우리는 합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계속하려고 하자,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디 조심하세요.” 이들 새로운 관리들을 마주하며, 나는 강한 압박을 느꼈다.

나는 구금된 수련생들을 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고, 경찰이 종종 학교에 와서 나를 위협했다. 어떤 학교 직원들은 나에게서 대법에 대한 사실들을 들어 알았고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경찰이 자주 찾아와서 걱정했다. “그 사람(나를 가리킴)은 불법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이 왜 오겠나?”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녀는 매우 능력이 있고 심지어 일부 관료들도 속았다”라고 다른 한 사람이 덧붙였다. 그들은 또한 연루되는 것을 피하려면 내 말을 믿지 말라고 사석에서 관리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때 매우 바빴고 이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감옥에 갇힌 한 수련생이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나는 병보석을 준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가족과 연락하려 했지만, 그녀의 가족은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몇몇 다른 젊은 수련생들이 체포되었다. 나는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러 지역 경찰서에 여러 번 갔다. 나는 실명으로 군 국보 과(경찰 1개 부대)에도 연락했다. 자신의 안전이 위험했지만, 나는 구금된 수련생들을 도와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차츰 나는 경찰들과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 걸고, 그들에게 자료를 보내며, 수련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들은 변했고 자료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젊은 수련생들은 그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출옥 직후 휴대전화나 위챗 관련해서 보안대책이 부족해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이들 수련생과 대화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었고, 씬씽(心性) 제고의 기회가 많았다.

그 후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하자, 나를 폭풍의 중심에 놓이게 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 사부님의 도움과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모순

그 당시 나에 대한 소문이 많이 나돌았다. “언제나 지각한다”, “조퇴했다”, “중간에 수업을 빼먹었다.”, “책임에 집중하지 않는다” 등이었다. 어느 날 상사가 이런 말을 듣고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부서는 시간상으로 매우 빠듯해서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은 좌천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배치에 따르기로 했다.

그 학교에는 좀 외로운 A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는 종종 다른 선생님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A와 기숙사를 같이 쓰던 다른 선생님들이 갈등 때문에 모두 나갔다. 그녀는 울면서 나에게 와서 잠시 같이 살자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얼마 후,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왜 수업을 빼먹었냐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제가 파룬궁 수련하는 거 모르세요? 그것과 관련 있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 그것을 알지 못했다. 파룬따파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인해, 그녀는 매우 두려워했다. 그녀는 몇몇 관리들에게 가서 불평했다.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고 그녀는 다시는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를 돕겠다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두 달 후 A를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여느 때처럼 인사했다. 디스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화장실도 기어서 다녀야 했다고 했다. 그녀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매우 적은 임금을 받았다. 매우 동정이 갔다. 그녀가 말했다. “있잖아요, 나는 몇몇 다른 선생님들에게 물어봤고 그들 중 한 명은 파룬따파가 괜찮다고 말했어요. 다시 같이 살면 안 돼요?” 나는 망설였지만, 그녀가 고집해서 이사를 왔다. 그녀는 여전히 대법을 반대했다. 내가 대법에서 깨달은 것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중국공산당을 토론하자, 그녀는 겁을 먹고 다시 나갔다. 나중에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녀는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상사가 나에게 새 부서에서 일하게 했을 때 선생님 두 명이 방해가 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A였다.

내가 새로운 부서에 출두한 첫날, A가 말했다. “1분 늦었어요.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다른 선생님이 동의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A가 내 얼굴에 손가락질하며 나를 사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며칠 동안 심한 압박을 받고 거의 법공부를 하지 못한 후, 나는 매우 나약해졌고, 눈물만 흘렀다. 나는 새 부서 책임자에게 갔다. 그녀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당황해서 무기력하게 울며 학교 운동장을 돌았다.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단 사람이 수련이란 이 길을 걸으면 그의 앞날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수련은 순서 있게 배치한 것이고 시간은 그렇게 아주 충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우연한 일이 있을 수 없으며, 모두 아주 긴박하게 배치된 것이다.”[8] 이 말씀을 생각하자, 나는 다소 진정되었다.

바로 그때, 지역 국보과 직원들이 오고 있다고 전화로 말했다. 그들은 도착해서 경비실로 갔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경찰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낼 생각을 하면서 그곳에 갔다. 사무실 문 앞에서 크게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녀는 우리 집안을 망치고 중공을 탈당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 물건을 훔쳤어요. 그녀를 찾아 파룬궁 수련생들이 많이 왔어요.” A였다. 다소 마음이 진정되어 울음을 그쳤다.

어쨌든, 나는 대법 수련을 오래 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았다. 문을 열었다. A가 몇몇 경찰관들과 학교 B 이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운데 앉아 울고 있었다. 나이든 경찰관은 괜찮아 보였지만, 젊은 경찰관은 지루하다는 듯 계속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라고 B가 소리쳤다. 우리는 동료였지만, 그는 나를 범죄자 취급했다. 모두 그 굴욕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의 말씀 ‘참음’을 생각하면서, 이 압박감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나의 연민과 용서, 그리고 금강 같은 결단력을 다져줬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경찰관들이 아직 여기 있는지 궁금했어요. 나는 그분들을 교정에서 모시고 나가려 했어요. 괜찮아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나는 돌아서서 걸어 나왔다.

젊은 경찰관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녀를 믿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한마디 하시죠.” 그 청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고마워요.”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아요. 다시 들어가서 몇 마디 할 수 있어요.” 그가 덧붙였다. 그의 친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그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 “할 말 있나요?” 그 경찰이 물었다. 나는 “별로 그렇지 않아요”라며 “혹시 제게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다 괜찮고 저도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떴다.

마치 폭풍우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A에게 배신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나를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A를 다치게 할 수 있지?’ 그녀가 나를 나쁘게 말했다고 내가 그녀를 나쁘게 말한다면, 나는 더는 수련인이 아닐 것이다. 잠시 후, A는 우리가 함께 일하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를 봤다. 나를 무고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그녀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실수로 도시락을 바닥에 떨어뜨려서, 바닥이 온통 음식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그 뒤 여러 날 나는 학교 관리자들을 찾지 않았다. 경찰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A의 불평에 대해 아무도 무슨 액션을 하지 않았다. 폭풍의 중심에서 나에게 유일한 길은 정념정행이었다. 대법제자로서, 나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더 높은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안으로 찾았다. 집착을 확인할 때마다, 그것을 적고, 닦아내, 제거했다. 나 자신의 참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우리 수련생들은 ‘진선인(真·善·忍)’ 원칙을 따르는데, 나는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하면 안 된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칼에 찔린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수련에서 잘했고 이것이 내가 조금씩 발전할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안으로 누락을 찾다

수련인으로서,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았고 안으로 누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두 가지 집착이 있었다: 수구(修口)하지 않았고, 유위(有為)가 있었다.

A는 가족 간 갈등이 많았다. 본인 명의 아파트가 세 채였지만 딸과 사위를 어느 한 곳에도 살지 못하게 해 그들은 아파트에서 세를 살아야 했다. 딸은 가정 내 갈등으로 아이를 낳은 뒤 우울증에 걸렸다. 병원에 입원했고, 직장도 영향을 받았고, 남편과 항상 싸웠다. 싸움이 격렬하고 빈번하게 벌어졌고, 젊은 부부는 여러 차례 경찰을 불러 가정 분쟁을 해결했다. 동료들은 A의 가족 문제를 재미있어하며, 일부는 심지어 A가 그녀의 딸과 싸우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딸에게 동정이 갔고 그 젊은 부부가 측은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딸에게 아파트 한 곳을 내주어 살게 하고 그 부부에게 재정 지원을 하라고 A를 설득했다. 그 부부가 이혼할까 봐 걱정도 했다. 이런 말을 자주 하며 이기적이라고 A를 비난했을 때, A는 나와 말다툼 하고 집안일에 간섭하는 나를 원망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의 최근 행동은 오랜 시간 쌓인 분노의 표출일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여 그가 사람을 발로 차고, 그가 사람을 주먹으로 치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이전에 그에게 빚을 졌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 둘은 결산을 한 것이다. 당신이 상관한다면 그들 사이는 결산하지 못해 다음번을 기다려 또다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인연관계를 보지 못해 나쁜 일을 하기 쉽고, 이렇게 하여 德(더)를 잃는다는 것이다.”[3]

나는 이 단락을 적었고, 자신을 제고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A에게 사과하며 내가 잘못했고 더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도 안심했다.

약 한 달 후, A가 달라졌다. 그녀는 한 학교 관리자가 나를 내쫓으려 해서 경찰에 항의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다른 관리들 앞에서 반격하고 나를 나쁘게 말하거나 다른 형태의 복수를 할까 봐 걱정했어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책상에 앉아서 글씨를 쓰고 있네요.”라고 그녀가 설명했다. “나는 또한 당신이 쓴 글들이 당신의 심성을 높이고 인내심을 키우는 것이라는 걸 봤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어요.”

그때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이 직장에 출근했는데 직장 내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알려주었다. ‘누구누구가 당신에 대한 말을 심하게 퍼뜨렸고 상사에게 당신을 일러바쳐 당신을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일반인이 이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이런 모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그가 나를 헐뜯는다면 나도 그를 헐뜯겠다. 그가 사람이 있으면 나도 사람이 있는데, 우리 한번 맞서 보자.’ 속인 중에서 이렇게 했다면 속인들은 당신을 강자(強者)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는 그건 한심하기 그지없다.”[3] A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말이네요.” 그녀는 그날 경찰이 왔을 때, 그들이 파룬따파 수련생들을 체포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든 경찰관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수련생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당신에게 중공을 탈당하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A가 달라진 후, 그녀는 B에게서 내 ‘전법륜’ 책을 가져다가 나 대신 보관했다. 그녀는 나의 안전도 걱정했다.

나는 나의 집착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이 기회가 감사했다. 과거에 항상 나를 도와준 사람은 학교 관리자였다. 이번에는 나를 도와준 사람이 경찰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다른 수련생을 구할 때 그들에게 확실하게 진상을 알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새로운 부서의 근무시간이 빠듯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간을 더 유연하게 쓸 수 있었다.

두 통의 편지

나중에, A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 일부는 이렇다. “처음 그녀를 알았을 때 겁이 나서 관계자들에게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녀를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정말 그 무엇과도 싸우지 않습니다. 단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이제 왜 대학교수들을 포함한 많은 지식인이 감옥에서도 파룬따파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법륜’의 가르침이 그들 성품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녀가 뛰어난 이유입니다. 그녀는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을 매우 잘 대하고, 아이도 아주 뛰어납니다. 저는 그녀가 스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스파이는 항상 물질적인 관심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반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했습니다. 두부를 살 때 그녀는 안 그러면 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거의 신맛이 나는 것을 샀습니다. 손해를 보면 그녀는 침착하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도왔습니다. 이런 일은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감동합니다.”

그녀는 또한 딸을 교육하는 데에 나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녀[나]를 봐라. 예전 시아버지가 고위관료였지만, 손자의 양육권을 며느리가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시아버지는 그녀가 얼마나 좋은지 알기 때문이지) 그 아이는 반에서 1등이 되었다. 얘들아(A의 딸과 사위) 봐라. 너희들은 이혼하면서 아이의 양육권 때문에 싸웠지.”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 연줄이나 뇌물 없이 한 무리 관리에서 다른 그룹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파룬따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절대 바꾸지 않았다. 그녀를 해고하기 위해 중공의 정책에 따라 그녀를 해고하는 관리자는 없었다. 왜일까? 그건 그녀가 후덕하기 때문이란다.”

그즈음, A는 파룬따파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수련생들을 도왔고, 허리 디스크도 나았다. 그녀는 가족에게 더 많이 헌신했고, 가정이 화목해졌다. 그녀는 또한 무고한 사람들을 지지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B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먼저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9페이지 분량 편지에 대법에 대한 사실과 사건 전체를 적었다. 나는 B와 다른 학교 관리자들에게 주기 위해 많은 복사본을 출력했다. 나는 그들의 지지에 감사했고, 내가 파룬따파와 내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청을 반복적으로 받았을 때 왜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설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양심상 대법을 수련해야 했고, 나와 아이가 생활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파룬따파 수련을 했는지, 왜 박해받았는지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무고한 사람들을 지지하면 그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를 다 쓴 뒤 학교 관리자들이 경찰에게 편지를 보여주면 어떤 영향이 있을지 궁금했다. 나를 체포하라는 압력을 경찰이 견딜 수 있을까? 결국, 나는 학교 관계자들과 편지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편지가 깃털처럼 가볍다고 느꼈다. 그러나 날아가면서, 그것은 대법의 힘을 지녔다.

편지를 보내자 A에 대한 모든 의심과 소문도 사라졌다. 그녀의 긍정적인 변화는 관리자들과 그녀의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기 위해 이 부서에 잘 정착했다.

맺음말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을 구해준 분이 사부님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사부님은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셨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망설임에 주목하셨다. 그리고 사부님은 나에게 집착을 버릴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앞으로 밀어주셨다. 후퇴는 없다. 사부님이 내 수련의 길에서 나를 계속 앞으로 밀어주셨다. 대법제자와 축복받은 중생을 만들어 낸 것은 사부님의 무한한 지혜와 위덕이다.

지난 21년간, 나는 대법을 실증하고 일터에서 자신을 수련했다. 나의 경험은 파룬따파의 위대함을 증명했고, 파룬따파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입증했다. 학교 지도부가 여러 번 바뀌었어도, 나는 직장을 잃은 적이 없다. 경찰과 상호 작용하여 대법 수련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들이 알게 했다. 그들이 종종 “파룬따파 수련생들은 정말 인격이 높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내 직업 덕분에 변호사, 경찰관, 구금된 수련생 가족들과 더 잘 대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수입이 괜찮은 교사이고 내 아이가 유명 대학에 다니는 것을 알면 내 말을 더 잘 받아들인다.

나는 앞으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救度)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자신을 더욱 잘 닦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하겠다.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4]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2(洪吟二)-정념정행(正念正行)’
[5]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2(洪吟二)-빨리 알려라’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궁(法輪功)-제3장 心性(씬씽)수련’
[7]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3년 애틀랜타법회 설법’
[8]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좌담회설법’

 

원문발표: 2021년 4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30/418599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5/2/1921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