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이론적 이성’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성찰

부제: ‘가장 우수한 지식인’이라는 환상을 깨뜨려야 진정한 수련이 가능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전, 나는 스스로를 중국의 ‘가장 우수한 지식인’ 중 한 명이라고 자부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결코 자랑이 아니었고 대부분 사실이었다.

첫째, 나는 전국에서 첫 번째로 대학입시가 회복됐을 때 운 좋게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다.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과거 급제처럼 큰 화제가 됐다. 우리 현(縣) 전체에서 대학에 합격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고, 나는 영광의 후광을 받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둘째, 내가 석사과정을 밟은 대학과 학과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가장 유명한 학과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 학과의 철학자들은 중국 현실 철학 이론의 진부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개를 갖고 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중공) 악당의 압력 속에서도 보기 드문 귀중한 품격이었고, 이 점은 전국 철학과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셋째, 나의 전공 지도교수는 해당 전공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다. 최고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손꼽히는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넷째, 당시 십여 명의 응시자 중 내 필기시험 성적이 1등이었고, 3년간의 학습을 마친 후 같은 학과 동료들은 내가 진정한 학문적 전수를 받았다고 여겼다.

다섯째,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추구 목표가 있었다. 평생 나만의 학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결코 남의 말을 따라 하지 않고, 결코 관변 철학이나 정치적 수요의 하인이 되지 않으며, 결코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심지어 공공 지식인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것과 진리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오직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객관적이고 고상하며 순수한 진리의 학문만을 추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러한 내적 자부심은 오직 자신이 마음속에 세운 목표와만 비교할 뿐, 세속적인 것들과는 비교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속세를 초월하고, 실용적이지 않으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으며, 그 어떤 세속적 권세나 동기에도 좌우되지 않는 듯했다. 스스로 자부하는 이 ‘가장 우수한 지식인’이라는 관문은 참으로 넘기 어려운 큰 고비였다.

이러한 특별한 속인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진정한 수련이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수련자들의 칭찬, 동의, 감탄, 심지어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영합하면서 변이되고 부패한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난법(亂法) 행위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글은 먼저 이러한 지식인의 기본 자질 속에 어떤 문화적 요소가 계승됐는지를 밝힌다. 그 배후의 문화적 내포를 성찰한 후, 이러한 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수련할 때 자신의 수련과 수련 환경에 어떤 손해를 끼치는지 분석한다.

1. ‘이론적 이성’이 서양 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

공적 생활과 분리되고, 주류에 속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자기 학문만을 한다. 학문에는 문호도 파벌도 없으며, 각종 학술 단체와 세력으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독자적으로 사고한다. 이것이 서양 ‘이론적 이성’의 특별한 기질이다. 참여하려는 생각이 없기에 각종 사회 조류나 이익에 좌우되지 않고, 타인에게 주는 인상도 대체로 그러하다. 학문 이외의 모든 것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데, 이런 상태가 대법 수련 중에 나타나면 겉으로는 수련이 깊은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학술적 독립, 이는 학술 방면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수련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집착이 있다. 사실 학술적 독립이든 인격적 독립이든 모두 사람의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집착하는 것이다. 무엇에 집착하는가? 바로 ‘자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다만 이 ‘자기’는 명리정(名·利·情)의 ‘소아(小我)’가 아니라 ‘대아(大我)’다(사실 명리정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이 ‘대아’가 바로 ‘이론적 이성’이다. 즉 서양 철학 전체의 이성주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인류 이성을 완전하고 진실하게 인식하는 것을 추구 목표로 삼는다. 인류의 ‘이론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의 생활방식이 됐다.

이 전통은 플라톤에서 시작해 유럽 대륙 2천여 년 사상사를 관통했다. 유럽의 진정한 신이 인도하는 문화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에서 시작해 기독교로 이어졌다. 이 주류 종교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럽 철학의 이성주의 전통이다. 개인이 현재 이해하는 바로는, 이 전통은 중국의 유가 전통과 매우 다르다. 유가 전통은 실천적이며 도덕 수양을 중시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기준이 있고, 심지어 더 높고 더 높은 기준이 있다. ‘사람됨’은 중국인이 평생 잊지 않는 추구다. 중국의 인인지사(仁人志士) 대부분이 유가 전통에서 나왔다.

적어도 나 개인은 지금까지도 유럽의 이성주의자들에게는 그렇게 강한 실천 동기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를 대표한다는 독선은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유럽의 이성주의자들은 진리에 대한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에는 줄곧 신앙과 철학 사이의 긴장이 존재했다. 논리와 이성을 숭상하는 것이 서양 이성주의의 기본 목표가 됐으며, 중세에 잠시 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합류한 때를 제외하고는 인문 전통은 오랫동안 신앙과 독립적으로 이어졌다.

현대 유럽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또 다르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이라는 말에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에게는 지혜가 없고 오직 신만이 지혜를 갖는다고 여겼다. 철학은 기껏해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지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철학자의 목표는 여전히 신을 인식하는 것이었고, 철학의 지위는 신학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전통 철학을 신학의 시녀라고 모독했다. 신을 반대하고 도덕을 반대하려면 전통 이성주의의 목표를 뒤집어야 했고, 그래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간질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속셈이 있는 철학자들은 대체로 철학과 신학, 종교의 관계를 부정하려 했다.

현대 서양 철학은 유럽 계몽운동에서 시작됐다. 계몽운동은 전통의 입장과 점차 뚜렷한 이탈, 심지어 배반을 드러냈다. 우리는 유럽 사상사에 등장한 두 권의 동명 저작을 비교할 수 있다. 중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참회록》을 썼는데, 그 내용은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정신적 여정을 담았으며, 신앙에 대한 숭상과 신에 대한 감사로 가득했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선구자 루소 또한 《참회록》을 썼는데, 세속적 애정을 극력 미화하고 추켜세운 것이다. 루소부터 러셀까지, 혼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성욕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며 후대를 해치고 여성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며 여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방임했다. 이러한 성애 추구는 사실 종교가 반대하는 사음(邪淫)이다. 사음은 신이 인류에게 남긴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루소와 러셀 같은 계몽운동의 선행자들은 이성적 언어로 포장하고 아름답고 고상한 미사여구 뒤에서 정욕적 사랑에 집착하는 감정 체험을 통해 도덕적 정서가 연약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이는 단지 하나의 예일 뿐으로, 계몽운동의 추구가 전통과 정반대임을 보여준다. 소위 인성의 계몽이란 인간 스스로의 신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발동된 사상해방운동이었다. 이러한 사상해방운동에 토대를 제공한 것이 바로 유럽에 나타난 이론적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 전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속 문학예술과 종교개혁운동의 출현은 유럽 문명 전체의 소위 ‘이성화 과정’을 가속화했다. 이 과정의 핵심은 종교가 인간의 정신과 행위를 제약하는 것에서 벗어나 정욕의 방종으로 나아가 오늘날의 문란한 성 풍조까지 발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러한 인성 자유의 발현이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이성주의 발전 과정에서 칸트는 이 전통을 대표해 매우 명확한 표현을 했다. 모든 가치와 진리를 이성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얼마나 자만하고 얼마나 오만한가! 그러나 이런 엄숙한 철학적 외형은 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사상과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도록 끌어당겼다. 이성의 자만, 심지어 오만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인도가 없는 문명은 아무리 위대한 칭호를 덧씌운다 해도 모두 근본이 얕고 약한 것이다. 칸트가 이론적 이성을 이토록 높은 지위로 끌어올린 것은 이후 철학자들이 이성의 결함을 드러내고 비이성 혹은 반이성으로 치닫는 화근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칸트 이전에는 이성에 선천적 부족이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인성 중에 신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회는 종교라는 기점으로 돌아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인류 이성은 다시는 종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됐고, 유럽 문명 전체가 인간 신성에 대한 인정을 상실했다. 인본주의는 신과 거리를 두는 길로 나아갔으며, 심지어 반신(反神)의 길로 들어섰다.

현대 사상은 신에 대해 ‘존재는 인정하되 논하지 않는’ 보편적 입장을 취한다. 왜 논하지 않는가? 계몽운동의 발전이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부정을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없다면 어찌 신의 말씀을 들어야 할 근거가 있겠는가? 신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도덕을 지탱할 이유도 없다. 유럽 전체의 인본주의는 인류가 무한히 자신을 방종하는 길로 나아갔다. 실증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했다. 인류는 신을 알 수 없지만 물질세계는 인식할 수 있었다. 인류의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현대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새로워졌다. 인류가 진정으로 신앙한 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과학이었다!

만약 이성이 신을 알 수 없다면 왜 인류는 더욱 겸손해질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인류가 신을 포기하고 신을 배반해 오히려 이론적 이성의 교만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반신(反神) 문화 속에서 이론적 이성은 인류 생활을 균형 잡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됐다. 인간은 이성 없이는 질서 없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론적 이성이 오늘날 교만한 힘이 된 이유다. 인류가 신의 도움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합리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면 이론적 이성의 반성 능력에만 의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문화 속에서 이론적 이성이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다. 사실 도덕이 고상하던 시기에는 인류가 신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배반하고 신을 반대할 때는 더 많은 이성으로 반성해야 하고 더 많은 법률로 통제해야 했다. 개인 생활도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신의 요구에 따라 생활하면 반드시 자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생활 속의 충돌과 갈등은 날카로워지고 심지어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유럽 문명 전체가 소위 이성화 과정을 완수했기 때문에 이성, 자만, 교만은 현대 지식인의 일반적 특징이 됐다. 신전(神傳) 문화와 비교해 보자. 신전 문화의 기점은 신이 인간을 향한 자비와 측은지심이었고, 인간에 대한 신의 은혜는 인간 도덕을 높이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이론적 이성은 그렇지 않았다. 이성은 인류 생활의 균형 세력으로서 더 이상 신이 인간에 대한 자비와 측은지심을 나타내지 않았고, 공평하고 공정한 세속적 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일종의 세속적 권력이 됐다. 이러한 이성은 도덕의 도덕, 법률의 법률 역할을 하며 신을 대체하고 인간에 의해 신격화된 힘이 됐다. 이러한 자만과 교만은 점차 지식인의 영예가 됐고 사회 전체가 존중하는 것이 됐다. 이것이 바로 대학 제도가 신의 언어권을 빼앗은 진정한 이유다. 지식인은 자신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운 자만과 교만 속에서 살고 있다. 소위 ‘가장 우수한 지식인’이 되려는 추구 속에는 바로 이러한 문화적 요소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가장 우수한 지식인’의 선천적 부족함은 신의 훈계 아래 생활하지 않았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두터운 줄 모르는 것이다.

2. 완전히 신성(神性)을 잃어버린 문화는 공산당 당문화다

‘이론적 이성’이 주도하는 생활관념은 종교와 심각하게 충돌한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이론적 이성은 시민사회의 공정하고 공평한 규칙을 세우려 한다. 이것은 이론적 이성의 책임 중 하나다. 그러나 신과 종교가 말하는 공정과 공평은 단순히 시민사회의 통용 규칙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연결된 인과법칙이기도 하다. 소위 인과법칙이란 선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응이 따른다는 것이다. 빈부귀천, 공정과 불공정은 천도에서 보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성적 반성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공적 생활에서의 공평과 공정이 오히려 구체적 개인 간의 인과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한다. 한편으로는 공도(公道, 정의)가 사람 마음에 있다는 것이 공적 규칙이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개인의 운명적 처지다. 두 측면에서 만약 인과만을 강조한다면 사회생활에는 참조할 만한 기준이 없어지고, 만약 인과를 완전히 무시한다면 인류는 공정과 공평이라는 핑계로 거리낌 없이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흥기한 것은 바로 선악 인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이익과 극단적인 이익 다툼만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좀 더 이해하기 어려운 예를 들어보자. 옛사람들은 마성(魔性)에 대한 관용도가 매우 낮았지만 현대인은 마성에 대한 관용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무슨 뜻일까? 바로 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앙의 시각에서 보면 극단적인 비도덕은 단지 인성을 거스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마성의 발현이다. 신성과 마성을 인정하는 문화 속에서 마성의 억제나 인간에게 선악과 정사(正邪)를 분별하게 하는 교화는 천의(天意)다. 인간 사회를 마귀의 침해로부터 보호하려면 신은 반드시 인간이 선악과 정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했다. 만약 인류가 선악과 정사를 식별할 능력을 잃는다면 그것은 극히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천의에서 보면 악을 제거하는 것은 단순한 도의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방식과 관계된다. 신은 인간이 선악과 정사를 분별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사례를 사용해 인류에게 경험과 교훈을 남긴다. 서방 종교활동의 방식에서 정교(正敎)를 수호하기 위해 정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람과 일에는 엄격한 징계를 내린다. 고대 종교가 마성에 대한 관용도가 매우 낮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진향련(秦香蓮)’ 혹은 ‘참미안(鍘美案)’은 각종 지방 희곡으로 편성돼 민간에서 오래도록 공연됐는데, 그 이유는 사람을 교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아원(竇娥冤)’ 또한 그러한 희곡인데, 사람들이 한 개인의 억울함에 대해 무심하게 대할 경우 하늘의 징벌을 불러온다. 심지어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도 사실은 인재(人災)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대규모 집단의 도덕 상실이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진정한 원인이다. 궁정 정치생활에서도 황제가 죄기(罪己, 죄를 자신에게 돌림)를 했던 것은 황제가 하늘의 총애를 잃는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다고 깊이 믿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더욱 길상(吉祥)을 따르고 흉사를 피해야 했으며 도덕에 있어 자신을 엄격히 단속해야 했다. 이는 사직과 만민의 복지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손쉽게 인간과 하늘의 연결, 금생과 전생의 연결, 도덕 경지와 현세에 얻는 복의 관계 등을 단절시킨다. 사람이 천리와 천위(天威)에 대한 경외심을 잃으면 무엇이든 감히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중공)이 반드시 전통문화를 파괴하려 했던 이유다. 바로 중화의 자손에게 화를 끼치고 전통문화를 멸절시키며 인간을 마귀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사상 의식 속에서는 이미 이러한 것들을 떠올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론적 이성이 ‘인류 이성’의 대변인이 됐기 때문이다. 현대의 발전 속에서 ‘인류 이성’에 의해 세뇌됐기에 고대의 그 마성을 징계하고 비도덕을 반대하는 사례들은 현대인에게 비인도적이라 매도됐고, 황제의 죄기와 같은 일은 무지의 표현이라 여겨졌다. 현대인은 진정으로 도덕적 책임을 포기했고 오히려 부덕(不德)을 징계하는 것에 불만과 분노를 보이며, 마성의 방종에는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한다. 관념이 완전히 정법과 정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과 반대로 변해버렸다. 예컨대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수 없고, 학교는 기도 활동을 할 수 없으며, 창조론을 가르칠 수 없고, 게으른 자를 헛되이 먹여 살리며, 심지어 도둑조차 자비로운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체계적 변화는 주류 언론, 주류 대학, 주류 사회단체에도 일어났는데, 일반적으로 더 이상 도덕적 선악으로 문제를 보지 않고 인간의 감정으로 문제를 본다.

감정으로 신성을 대신해 문제를 보는 것, 그 결과는 심각하다

감정으로 문제를 보는 게 뭐가 잘못인가? 물론 잘못이다! 현대인이 말하는 감정은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경우 불이성, 욕망, 이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성을 지니고 있고 도덕 원칙을 지니고 있다. 중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금수만도 못해지는 것인데, 그 이유는 정욕을 방종하면 금수만도 못해지고 마귀와 같이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욕 방종을 지지하는 모든 이론과 문화는 사악한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힘이 사악해질 때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각양각색의 마르크스주의가 성행하며 전통의 도덕과 질서를 파괴하는 역할이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세력, 심지어 주도 세력이 됐을 때 인류는 거꾸로 강한 신성을 지닌 존재에서 마성을 크게 지닌 존재로 변한다. 왜 오늘날 인류는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완전히 신을 버리고 개인의 도덕을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히 자기 절제의 힘을 잃었고 세상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한다는 핑계 아래 폭력과 불공정으로 가득 차게 됐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유럽의 합리주의 발전은 마르크스주의를 키워낸 온상이 됐으며, 유럽의 합리주의 발전이 없었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판치는 사회문화 환경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극단적으로 무신론의 사악한 힘을 이용했다. 마르크스주의가 판을 쳤던 이유 중 하나는 집단의 힘을 이용해 개인의 최대 이익을 쟁취한다는 명분으로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양심과 정상적인 창의성을 소멸시켰고 드러난 것은 단지 강도와 파괴의 힘이었다. 결과는 반드시 멸망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무장투쟁이든 계급투쟁이든 목적은 모두 인류의 도덕적 양심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민주주의의 등대라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정당은 투표수를 확대하기 위해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세력을 억압하며 기본 원칙을 포기해 자신들의 표를 얻으려 했다. 정치가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라는 간판 아래 정치가들의 속임수 중 하나였다. 집단의 힘을 이용해 소위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곳에는 많은 경우 기만의 동기가 숨어 있다. 도덕을 잃은 무리 속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다수의 의견만을 뽑을 뿐 진리를 뽑을 수 없다. 공동의 이익만을 선택할 뿐 도덕의 고상함은 선택할 수 없다.

나는 학술적 입장에서 이성의 선택에 따라 자신이 무문무파(無門無派)로서 순수한 진리만 책임지기를 바랐고, 겉으로 보아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방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파도 많았다. 나는 때로 수련자들이 나에게 당문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수련자들이 나를 오해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점점 수련이 깊어지면서 수련자들이 말한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나를 조금도 억울하게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당(黨)은 중국의 전통 지식인을 거의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중국에서 전통 지식인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반우파 투쟁은 지식인의 척추를 꺾었고, 문혁은 이른바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타파한다는 이름으로 중국인의 사상 성장과 지혜의 선택에 금지구역을 설정했다. 이는 곧 전통문화를 진정으로 발양하는 것도,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전통의 요구에 따라 사람답게 살라는 이 단순한 요구조차도 무지하고 낡은 추구라 여겨졌다. 그리해 지식인들은 무시는 물론이고 배척을 받았으며, 심지어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가짜 학자, 가짜 과학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지식인들은 중공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수요에 봉사하는 방향에서 연구하고 사유하도록 제한됐다. 이처럼 극도로 엄격한 사상과 학술의 통제하에서 중공이 필요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 현대 중공 지식인이 만들어졌다. 나와 같은 지식인은 완전한 교육 과정과 중공이 교과서와 교사를 조종해 길러낸 것이었다. 최소한의 영향이라 해도 유물론과 무신론을 진리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고, 신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기 어려웠다.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학과만 해도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노학자들이 강단과 학술연구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그들 각자의 철학적 사유는 일반적으로 유물론적이었다. 오직 중국 철학 원작을 비교적 공정하게 연구하는 극소수의 학자만이 유가의 정통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관찰했다. 그들도 철학적 견해를 발표하려 할 때 유물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립을 매우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중국에서 유물론 철학자라면 기본적으로 모두 마르크스 철학의 입장에 서게 됐다. 나는 스스로 서방 철학을 있는 그대로 연구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고, 서방 사상이 진정으로 어떠한지도 알지 못했다. 사실 유물론이라면 결코 기독교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전통적인 사람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도성(道性), 불성(佛性), 신성(神性)을 인정했다. 도덕의 기초는 신의 가르침에서, 자신 안의 불성에서 나왔다. 신앙이 없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믿을 수 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유물론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철학도 믿지 않는다. 서방 현대철학은 비록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껏해야 이성 속에서 인간에게 종교적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신의 존재와 종교 정신을 실재론적으로 ‘존재하나 논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신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같은 부류였다. 철학자들이 이미 보편적으로 신을 믿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자라면 모두 마르크스주의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었고, 그들의 철학적 입장과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성을 위한 인식을 도울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신에 대한 진실한 신앙이 없는 소위 이성은 근본적으로 당문화였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신의 창조 관념에서 보지 않고 인위적 인식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의 자부와 오만은 현대 서방 철학의 보편적 특징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가 더욱 쉬워진다. 왜일까?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현실 이익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외 철학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단어만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분석철학, 또 하나는 소위 내재의식을 탐구하는 현상학이다. 이 학문들은 현실 이익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민중이 알 수 없고 파악하기도 어렵다.

내가 배운 철학도 이와 같았다. 형식상 민중과 공적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영역을 모두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넘겨줬다. 진정한 신앙이 없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이겨낼 내적 힘이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생활 속의 실천 목표를 내줬을 뿐만 아니라 의식과 언어 영역에서 신을 몰아내고 종교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적 이성의 역할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신을 부정하는 동반자가 됐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상호 보완하며 완전한 반신(反神)적인 전반 문화 체계를 구성하게 됐다.

3. 현대 철학은 지식과 문화의 허구

서양 현대 철학의 두 갈래인 분석철학과 현상학을 깊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두 철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알아야 한다. 표면적으로 현대 철학은 다양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방법론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바로 분석철학과 내재 의식의 현상학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전문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이 두 체계에 속한다. 이 두 체계의 방법론적 규범을 엄격히 따르지 않고서는 철학의 전문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언어 분석철학의 대상은 언어다. 대체로 두 가지 출처가 있는데 하나는 프레게, 러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분석철학에서 유래했고 다른 하나는 무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명한 일상 언어 분석철학에서 비롯됐다. 분석철학이 분석철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절대로 언어의 경계를 넘지 않고 결코 참된 신을 건드리지 않으며 신의 계시를 인식하려 하지 않고 다만 신에 관한 ‘어휘’와 그 어휘가 문화에 미친 작용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 분석철학의 방법론적 기초는 실재론에서 신을 인정하지 않고 엄격히 배제하는 것이다. 물론 실재론의 유물론도 배제한다. 간단히 말해 ‘물질’과 ‘신’은 모두 언어 현상이며 ‘어휘’라는 것이다. 물질 현상은 기본적으로 ‘과학 어휘’의 범주이고 ‘신’은 ‘종교 어휘’의 범주다. 전자는 ‘서술 언어 체계’의 일이고 후자는 ‘생활 언어 체계’의 한 분지다. 분석철학의 방법은 절대로 언어 현상을 한 걸음도 넘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의 모든 사물을 언어 현상으로 연구하고, 언어 현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럼 어떻게 연구할 수 있겠는가?

그 근본 방법은 언어 현상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실재인가? 언어 연구는 언어 체계를 연구해야 한다. 만약 창세기와 우주 진화론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분석철학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세기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종교적 서사이고, 우주 진화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적 서사라고. 이 두 서사 방법은 따르는 규칙이 다르다. 과학의 언어 구조가 어떤지, 종교의 서사 구조가 어떤지는 모두 인류가 언어를 운용하는 능력과 기호나 습관 같은 요소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언어를 활용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아 오래 전승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모두 이러한 서사 방법의 전승이다. 그들은 실증적 분석에서 출발해 이런 언어가 왜 인류 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는지 연구한다. 솔직히 말해 과학과 종교는 모두 언어의 구성물이며 인류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끊임없이 풍부하게 만들어 형성된 것이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의 지식도 없고 인간의 문화도 없다.

그래서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신은 당연히 실재이며 진실이다.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계가 진실이고 물리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인류가 언어를 활용한 언어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해 벗어날 수 없게 되니 그것이 실재가 되고 심지어 유일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철학의 마술은 모든 문제를 언어 문제로 바꿔버린다! 이 학설의 핵심은 인류 신앙의 참된 기초를 없애고 인간과 신의 진실한 연결을 끊어버리는 데 있다.

두 번째는 인류 의식의 현상학이다. 이 방법론 학파의 창시자는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다. 후설은 인간의 내재 의식을 관찰하고 분석해 지식과 문화의 내포를 드러내려 했는데 그 기초 역시 보통 사람의 내재 의식의 구성과 상태에 입각했다.

현상학에서 가장 유명한 방법은 ‘괄호치기’다. 물질과 신 같은 실재에 대해 철학은 분석할 수 없다. ‘실재’는 괄호를 쳐야 하는데 곧 참된 실재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학과 전통적 연구의 한 가지 구별은 ‘기술적’이라는 점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이전 철학자들의 연구는 ‘규범적’이라 불린다. 규범적 연구는 실재와 가치에 대해 자연스러운 태도로 존중하고 긍정한다. 자연스러운 태도에서는 사유 속의 사물을 실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은 모두 현상학이 연구할 수 없는 것이며 현상학은 오직 인류 의식 활동의 현상만 연구할 수 있다. 현상은 본질적으로 의식의 것이다. 실재란 의식 속에서 ‘실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괄호치기의 의미다. 어떤 것들은 실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후 현상학의 발전은 종종 인간의 행위와 연결됐지만 방법은 의식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분석철학은 언어를 넘지 않고 현상학은 의식과 의식적 행위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철학의 방법론적 기초다. 이들의 공통 특징은 물질과 신의 문제를 직접 탐구하는 것을 가짜 문제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철학은 기초 연구로서 언어 현상으로든 의식 현상으로든 연구한다. 우리는 종교 경험과 과학 경험이 매우 다른 두 가지 경험임을 안다. 종교와 과학의 진정한 구별은 사실 문제인 동시에 가치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 문제의 핵심은 하늘에서 계시된 진리다! 우리가 신을 믿지 않으면 인간과 신의 연결은 끊어진다. 그런데 끊어졌다고 해서 신과 무관하게 되는가?

서양 철학의 신에 대한 태도를 보면,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의식과 언어가 의심할 여지없이 내심에서 생성되지만 인간과 신의 상호작용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참회와 기도를 할 때 어떤 사람은 예수가 듣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 무슨 뜻인가? 《성경》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 예수의 말씀은 정말로 예수의 말씀으로 작용하며 책 속에 진실로 예수의 말씀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은 이런 현상을 연구할 수 없다. 이유는 의식과 언어가 서술 가능하거나 실증 가능하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미 신을 배제한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현상, 도덕 현상의 존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의 신성이 작용했기 때문이며 그의 신성한 부분이 신과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은 오직 참된 신앙인의 행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입증될 수 없다. 철학자가 신을 믿지 않으면 철학은 영원히 신을 입증할 수 없고 심지어 신앙을 가진 사람의 의식이나 언어에 진정으로 접촉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의식과 언어가 사실 세계나 가치 세계에서 일종의 선량한 허구인가? 현상학에 따르면 그렇고 분석철학에 따르면 역시 그렇다. 하지만 신의 세계가 신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이 없으면 신의 세계도 없고, 신의 능력이 없으면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현대 철학은 본질적으로 신을 믿지 않으며 심지어 반신적이다. 그러므로 현대 철학은 신앙에 대해 선천적으로 불공정하다. 참된 신앙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 의식을 표현하는 언어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시작해 칸트 철학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은 실재론에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철학과 현상학 전통은 우리에게 인간과 신의 관계가 의식과 언어 속에서도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앙 문제는 의식으로 보든 언어로 보든 특별한 가치가 없으며, 사실상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내재 의식과 언어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식론에서 신과 종교의 가치를 배제했다. 의식이든 언어든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계몽운동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시작됐다. 데카르트 철학의 반성은 선천적인 종교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첫째, 그 시대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고 신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데카르트 철학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데카르트가 인간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선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도덕을 엄격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이런 양심과 능력은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한 양심이 진실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양심이 없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진리를 인식하고 선악을 구분하며 도덕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이자 가장 진실한 이유다. 반대로 진리를 인식할 수 없고 선악을 구분할 수 없으며 도덕을 지킬 수 없다면, 사실 그 생명의 품성은 양심이 사라진 것이다.

서양 종교에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누구나 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해 인간이 된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 타락했을 때 에덴동산이 더 이상 그들이 생활하는 진실한 세계가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에 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부분적으로 여전히 에덴동산의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갈망이 없다면 에덴동산의 진실한 존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더 높은 신의 존재이며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는 인간의 사유로 접근하거나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으려면 먼저 믿어야 하고 그러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믿음이 없으면 볼 수도 없다. 이것은 종교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 경험이다. 믿는 자는 항상 믿고, 믿지 않는 자는 항상 믿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차안에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피안을 동경할 수 있다. 피안은 신을 믿는 사람의 내심 생활의 진실한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 인류는 대부분 진화론의 관념을 받아들여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여긴다.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영혼은 인간의 양심을 기초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라는 문화적 허구가 양심을 대신해 세계와 인생을 이해할 때, 철학은 인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철학이 역할을 한다면 단지 현대 문명 속에서 신을 배제하는 요소를 강화할 뿐이다. 진화론은 단순한 문화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인류 현실 생활의 원칙을 구성하고 있다.

과학과 진화론은 단순히 인류의 지식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이 인류에게 주입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 배후에 사탄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진화론을 믿음에 따라 양심이 사라져 마귀가 우리의 의식과 언어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도 대답하기 어렵다. 칸트 철학은 실재론에서 신앙 문제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했지만 인식론에서 신앙을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현대 분석철학과 현상학의 발전을 거치며 인식론에서도 신앙 문제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부정하게 됐다. 신앙의 시대에는 신앙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장 큰 정신적 가치와 실재성을 지닌 영역이었다. 그러나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는 과학이 유일하게 물질적 가치와 실재성을 지닌 영역이 됐다. 심지어 인간이 고등 동물의 논리대로 생활하는 것도 유행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이 됐다. 그러나 철학은 신앙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데, 회피 방법은 이른바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이성에 부합하는 방법론으로 허구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4. ‘이론적 이성’은 인간성 타락 앞에서 무력하다

대법을 수련하면서 나는 내가 추구해온 ‘가장 우수한 지식인’이라는 목표에 얼마나 많은 변이와 심지어 타락까지 포함돼 있는지 알게 됐지만, 아직 진지하게 정리해본 적은 없었다.

신의 인도와 신앙의 지침이 없는 문화에서 이성이 자처하는 목표는 매우 강한 배타성을 지닌다. 가장 먼저 배척하는 것이 바로 종교,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다. 종교가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실증과학과 현대기술의 발전이 유럽 전체의 이성화 과정과 보조를 맞췄고, 이 이성화가 실현한 것은 바로 순수 이성 발전의 결과였다. 그 속의 지식인들이 마주한 것은 더 이상 인류의 궁극적 문제가 아니라 세속 생활에 봉사하는 도구였다. 유럽 문명의 이성화 과정은 신이 전한 문화를 이성으로 허무화시킨 것이며, 종교를 제거하고 정통을 제거하는 과정이었다고 매우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럽 문명 이성화 과정의 본질이다.

종교가 사라지자 이성은 대체 불가능한 권위가 됐다. 인류는 이성과 질서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생활의 이성과 질서는 바로 이러한 ‘이론적 이성’의 반성과 비판에 의존하며, 이것이 인류 생활의 최고 지침이 됐다. 이성은 신이 아닌 신성, 하늘의 이치가 아닌 천리가 돼 인류의 추앙을 받았다. 이성은 마치 가장 영예로운 재판관, 가장 대단한 권위인 양 모든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며 마음대로 강산을 지적하고 도처에서 적절함을 가늠하지만, 유독 천리와 양심만은 가늠하지 못한다. 언어분석철학은 천리와 양심을 일종의 신비한 서사로 취급했다. 현상학은 천리와 양심을 괄호 안에 넣고 건드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성이 점점 신과 정통 종교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인류 경험의 수요를 만족시키면서 초래한 결과는 바로 생활의 타락과 규칙의 변질이었다. 이러한 이성을 기준으로 삼으니 종교와 도덕이 점점 우매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종교 시설조차 세속 생활에 대한 종교 자체의 입장을 더 이상 견지하지 않고, 세속에 타협하며 변이된 문화에 양보했다. 양보를 통해 교회와 성당의 이익이 늘어나고 교회의 세력과 영향력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타락은 이른바 인성의 계몽과 인본주의적 입장에 부합했다. 타락한 생활의 이른바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종교의 계율은 완전히 무력해졌고, 인위적 규칙(법률 포함)은 심지어 계율이 해이해진 인생을 보호하고 타락한 생활방식을 보호하며, 심지어 마성이 판을 쳐도 모두 규칙의 보호 아래 있다. 법률은 타락한 생활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건강한 생활을 수호하는 힘을 처벌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모두 서구 문명의 이성화가 가져온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300여 년간 문화 변이 과정에서 조금씩 누적된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 면목을 알아볼 수 없게 돼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대략적으로 현대 문명 발전의 맥락을 묘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성찰》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저한 《공산당 선언》까지 약 200년이 걸렸다. 《공산당 선언》 발표부터 마오쩌둥이 베이징에 입성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고, 중국공산당 건국부터 장쩌민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앞의 200년은 이론적 이성 발전의 실천이었고,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자 마르크스는 방향을 바꿔 이전의 이성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요구하는 것은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절반의 영역이 마르크스의 세계 개조라는 완전한 요구에 협력해 마르크스가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것을 도왔다. 고전철학은 실재론 측면에서 신과 종교를 부정했고, 현대철학은 언어나 의식 현상 측면에서 동시에 인식론적으로 더욱 깊이 신과 종교를 부정했다. 고전 시기의 이론적 이성은 마르크스가 이론적 이성의 힘을 빌려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선전하는 데 기초를 닦아줬고, 현대 서양철학은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에 개입하는 데 호응을 제공했다. 갖가지 마르크스주의 학설이 인류의 현실생활에서 점점 더 창궐했지만, ‘순수 이성’은 오히려 뒤에서 언어와 의식 현상을 분석하며 신이 없는 생존 현실을 무덤덤하게 이해할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서구 지식인의 역사적 운명이며, 바로 ‘이론적 이성’의 역사적 운명이다!

5. ‘이론적 이성’ 배후의 사악한 물질이 수련과 수련 환경을 교란하는 것을 경계하라

이론적 이성은 왜 현대인의 보편적인 인성 타락 앞에서 무력한가? 왜 이론적 이성은 마귀가 규칙과 법률로 진정한 신앙을 공격할 때 조금도 긍정적 작용을 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왜인가? 신을 부정하는 배후에는 반드시 신을 부정하는 초월적 힘이 있으며, 이 힘은 바로 사탄으로부터 온다. 오직 사탄만이 인류를 증오하며 하느님 앞에서 사람을 질투하고 증오하며 훼멸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장 우수한 지식인’의 배후에는 바로 사탄의 그림자가 있다.

사탄의 그림자는 ‘이론적 이성’의 배후에 잠복해 있으며, ‘이론적 이성’을 이용해 진리를 추구하는 현대 ‘우수한 지식인’의 관념과 행위 방식 속에 잠복해 있다. 사부님께서 개창하신 정법수련 과정에는 반드시 사탄과의 정면 결전이 포함된다. 그러나 만약 사탄이 자신의 사상과 행위의 세부 사항 속에 숨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과 싸울 것인가? 구세력은 이 일을 배치할 때 사부님의 수련자에게 도전을 제기했다. 구세력은 그들이 파괴하려는 수련자에게 말했다. “너는 대법이 있지 않느냐? 너는 대법을 중시했느냐?” 사부님은 계책을 역이용해 구세력의 배치를 이용하시고 우리에게 필승의 법보(法寶, 법력이 있는 보물)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 안으로 찾고, 자신의 더러움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자신의 사악함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자신의 명성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탄을 찾아내고, 이 더럽고 악취 나는 구우주 쓰레기에서 나오는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진수(眞修)·실수(實修)다! 나는 대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대법이 있고, 또한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이 계신다. 이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갱신되고 원만하는 최대 보장이시다.

우리는 심각한 난법(亂法) 현상과 갖가지 대법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현상에서 모두 하나의 보편적 특징을 보았다. 전염이다! 우리는 감옥이나 노동수용소에서 전향 도우미를 했거나 사악에게 전향당한 수련생이 전향된 사악한 물질을 지니고 있어 말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악한 물질을 전파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독소 전파 방식은 상대적으로 예방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전향 도우미의 표시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분별하기 어려운 것은 진수 대법제자의 신분으로 나타나 자연스럽게 이런 것을 지니고 있는 경우로, 이것이 가장 방어하기 어렵다. 사실 구세력이 참여해 배치한 이런 일들 중에 만약 누군가 이런 것을 지니고 있다면, 수련생들이 감탄하고 찬동하며 감상하고 심지어 인정하는 등의 심리 상태에 영합해 사탄의 독극물을 전달하게 된다. 전통적인 중국인은 문화 교양이 있는 사람을 숭상하고, 현대인은 이른바 교수, 과학자를 숭상하며, 특히 ‘우수한 지식인’에 대해 보편적으로 호감을 갖는다. 진수 대법제자는 법을 스승으로 삼아 이러한 속인의 마음을 제거하기 바란다.

내가 일찍이 속인 중에서 ‘우수한 지식인’으로 자처했을 때, 사탄의 독소가 일찍이 몸에 존재했었다. 사탄으로부터 온 이 타락한 물질은 ‘이론적 이성’의 진리를 추구하는 형식으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 생애에 실제로 존재했다. 세인이 부러워하는 교수 생애에서 중공과 협력해 이른바 고상한 학문을 전수했는데, 사실 바로 학생들에게 독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법을 얻지 못했다면, 사부님의 구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가장 사악한 물질에 이끌려 형신전멸(形神全滅)의 지경으로 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을 얻기 전에 사악이 대법을 시험하고 사부님의 정법을 파괴하기 위해 일찍이 배치해놓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1999년 ‘7·20’ 이후 전면적으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쪽으로 전환하도록 배치하셨고, 우리는 비로소 구세력의 배치에서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위치로 밀어주셨다. 사악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집착해 사부님의 배치를 바꾸고 이런 사악한 물질을 강제로 주입했다. 이것이 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사부님을 실증하고 법을 실증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며, 난법 행위가 나타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나는 일찍이 최대한 노력해 나의 행위를 표면적으로 완전히 대법에 부합하게 해 난법 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안으로 찾지 않고 사악의 죄악의 배치를 찾아내지 못하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법제자에게 사악한 물질을 강제로 주입하고 이런 사악한 물질을 조종해 이용함으로써 초래된 모든 행위는 바로 이 대법제자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배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 직접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법에 대한 범죄이며, 사부님께서 제자를 성취시키려는 배치에 대한 범죄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자비가 무한하시며 정법 중의 모든 일을 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나와 관련된 모든, 사악에게 사악한 물질을 강제로 주입받은 수련생들이 함께 강대한 정념을 발해 사탄을 거부하고 제거하며, 사악을 거부하고 제거하고, 구세력의 배치와 참여를 거부하고 제거하자. 정법이 점차 끝나가는 최후의 관건 시각에, 진상이 크게 드러날 새벽에, 자신을 깨끗이 씻고 순수하게 사부님을 도와 법난을 끝내는 전투에 참여해 유감없이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자.

이상은 개인의 체득이며, 층차와 경지가 제한돼 있으므로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은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9/2/499053.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9/2/499053.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