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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고집쟁이가 대법을 수련해 환골탈태

글/ 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저는 71세로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 22년 동안 환골탈태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았고 타인을 위해 생각할 줄 알게 됐습니다.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나의 고상한 경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 수련 후 환골탈태하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집스럽고 난폭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친정에 있을 때, 저는 고집스럽기로 유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황소고집이었고 제 성질은 불같았는데 화를 낼 때면 아무도 못 말렸습니다. 어른이 타일러도 듣지 않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항했습니다. 어떤 때는 화를 내기만 하면 벽에 가서 부딪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사용하는 물건은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빗 같은 물건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결벽증이 있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도시락을 챙길 때 누군가 제 도시락을 한 입 맛보면 저는 굶는 한이 있더라도 먹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식사할 때도 같은 접시에 반찬을 담아 먹지 않았는데, 설령 한 접시에 담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쪽 절반을 먹고 저는 제 쪽 절반을 먹곤 했습니다. 그가 제 쪽으로 젓가락을 뻗어와 제 쪽의 반찬을 먹으면 저는 더러운 것이 떨어졌다는 듯 접시를 엎어버렸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새벽 3시가 넘으면 저는 아이를 모두 깨웠습니다. 저는 청소를 시작했고 창은 밝고 책상은 깨끗했습니다. 침대 시트를 잘 펴놓고 세 아이를 작은 의자에 앉히고는 침대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남편이 야근하고 돌아오면 저는 이불을 단정히 갠 후 남편이 이불을 덮고 자지 못하게 해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당(黨)문화에 중독돼 많은 중화민족의 전통 미덕이 제 몸에서 사라졌습니다. 집에서 남과 의논하지 않고 제멋대로 결정했고 여성이 갖춰야 할 부드러움과 현숙함, 그리고 남편을 자상하게 대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실, 제 방법은 매우 이기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생각한 것은 자신뿐이었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았고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상처 주게 된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저를 개변했고 제 인생은 환골탈태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혼기념일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법을 얻은 날만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습니다.

1998년 7월 11일은 제 생명의 분수령입니다. 그날, 한 부부 고객이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공장으로 저를 보러 왔다가 제게 파룬따파를 소개해줬습니다. 남자는 목공소 공장장이었습니다. 그는 말했는데,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일본인이 남기고 간 것이라 한밤중이면 귀신이 나타나 그는 사무실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배전반에 불이 났습니다. 경비는 노인이었는데, 그는 불이 난 것을 보고 당황해 전기 화재는 물로 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대야에 물을 담아 배전반에 뿌렸습니다. 결국 작은 건물에 불이 거의 다 붙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장장의 사무실에는 불이 붙지 않아 모든 물품이 온전하게 보존됐습니다. 그렇게 맹렬한 불길에 왜 그의 사무실은 운 좋게 면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천서 ‘전법륜(轉法輪)’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공장장의 아내는 원래 복부에 종양이 생겨 5~6천 위안(약 86만~104만 원)을 써도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병이 나았습니다. 아이도 대법의 신기함과 기적을 목격하고 파룬따파를 배우게 됐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신기했고 수련이 그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알고 저도 서점에 가서 ‘전법륜’ 한 권을 사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은 살 필요 없어요. 제가 한 권 드릴게요. 인연이 있으니 가져가서 읽어보세요. 하지만 당신이 볼 수 없다면 인연이 없어서 배울 수 없는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그녀는 제게 ‘전법륜’ 한 권을 갖다 줬습니다. 당시에 저는 마침 재봉틀로 베갯잇을 만들고 있다가 그녀가 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책을 받아들고 읽었습니다. 책을 볼 때, 머리 위에 돌 같은 것이 아래로 내리누르는 것 같아 저는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습니다. 공장장의 아내는 제게 근기가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근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당신은 인연이 있어요. 배워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집 근처에 연공장이 하나 있다고 말해준 그녀의 말을 듣고 저는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이 일만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무신론 독해를 당해 아무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저에게 신, 귀신 등에 대해 말씀하셔도 저는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며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날 새벽 3시가 넘어서 저는 공원으로 갔습니다. 남쪽 문에서 줄곧 북쪽 문까지 걸어가 북쪽 문 부근에서 연공장을 찾았습니다. 모두 연공하고 있었고 저는 옆에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습니다.

보도원은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제게 법공부 장소까지 알려줬으며 그로부터 저는 매일 아침 연공장에 가서 연공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으면 저는 또 법공부 장소에 가서 6시까지 법공부를 했습니다. 법을 얻은 후, 모두 함께 법공부 하면서 저는 이미 22년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저는 신기하게 같은 날 법을 얻었습니다. 남편은 외지에서 기쁘게 대법을 얻었는데, 창춘에서 인테리어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파룬궁을 소개해줬습니다. 그런데 이후 남편은 믿지 않았고 기연을 놓쳤습니다. 저는 법을 얻은 후, 너무 늦게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남편이 기연을 놓친 것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을 일찍이 배우지 못한 것이 그야말로 유감이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제 간, 신장, 기관지는 모두 병이 있었고 요추 네 마디에 골 증식이 있어 밤에 일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했으며 부축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허리를 굽히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고통이 말도 못했습니다. 저는 또 기관지염, 비염에 시달렸는데 매년 겨울에 주사를 맞지 않으면 기관지염 때문에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비염으로 코가 막혀 머리가 아팠고 목이 아팠으며 코부터 목의 기관지가 있는 곳까지 칼에 에는 듯 아팠고 누런 고름이 흘렀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가 ‘전법륜’을 들 때마다 사부님께서 제 신체를 청리해 비염을 제거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비몽사몽간에 머리 위에 돌 같은 물건이 아래로 누르는 것을 느꼈고 줄곧 비강 부위까지 눌러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거의 견딜 수 없을 무렵 코 안이 시원해진 것을 느꼈고 한 가닥 시원한 바람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비염이 나았습니다. 한 달 뒤, 제 허리와 다리 통증도 모두 나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침대 위에 누워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신체 위의 맥이 손가락만큼 굵으며 눈처럼 새하얀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일어나 앉은 뒤 남편에게 “제 신체의 맥이 모두 흰색으로 변했어요”라고 말하자 남편은 “좋은 일이잖아. 사부님께서 당신에게 맥을 통하게 해주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몸의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미 22년간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신체는 건강하고 마음은 편안합니다. 그런 환골탈태하는 변화는 인간 세상의 얼마만큼의 돈으로도 바꾸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저를 화내지 않게 하고 성질을 부리지 않게 하며 난폭하지 않게 한 파룬따파는 정말 대단합니다. 대법을 배운 후, 저는 몸의 불량한 습관을 모두 고쳤으며 늘 싱글벙글합니다. 저는 신체적으로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물론 인생관과 도덕 수준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진선인(真·善·忍)’이 저를 다시 만들었고 파룬따파가 고집스럽고 난폭하던 저를 관용적이고 선량한 사람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2. 대법의 기적을 목격

저는 몸이 뚱뚱해서 처음 연공을 시작할 때 반가부좌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딸이 결혼했고 다른 두 아이는 외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남편은 외지에서 인테리어 일을 했습니다. 저 혼자 집에서 매일 가부좌를 연습했고 온밤 잠도 몇 시간 자지 못했으며 종종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곤 했습니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저는 마침내 가부좌를 틀 수 있었지만 ‘쿵’ 소리와 함께 또 다리가 떨어졌습니다. 한 번씩 가부좌를 틀면서 실패할 때마다 저는 절대 낙심하지 않았으며 늘 가부좌를 연습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서 저는 반가부좌를 틀 수 있게 됐습니다.

가부좌를 연습할 때, 저는 벨트 또는 넥타이를 목에 걸고 다른 한쪽을 다리에 걸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발과 얼굴이 같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2개월 뒤, 저는 결가부좌를 틀 수 있었습니다. 비록 2분밖에 틀지 못했고 두 손으로 발을 감싸고 있었지만 제게 있어서 큰 기쁨이자 돌파였습니다.

저는 결가부좌 시간을 매일 몇 분씩 늘렸습니다. 10여 일 뒤, 저는 결가부좌를 반 시간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주방에 가서 연공했습니다. 연공하기 전, 저는 먼저 탁자와 의자를 옮겨두었습니다. 사부님 법신께서 제 주변에 한 바퀴 둘러 앉아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부님 법신 가운데는 곱슬머리 법신, 도사 모습의 법신이 있었고 일반 사람과 같은 키였습니다.

진실하게 이 모든 것을 보고 저는 더욱 정진하게 됐습니다. 밥을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저는 사부님의 ‘홍음’을 펼쳐 들고 한 편으로 밥을 지으면서 한 편으로 법을 외우면서 한 번 살펴보는 것마저 잊은 채 이어서 외우곤 했습니다.

사당 장쩌민 깡패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뒤, 저는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헤이룽장(黑龍江)성 여자 감옥 마의 소굴에서 죄수들로부터 욕설을 들으면서 음산하고 어두운 협소한 독방에 갇혀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제 두 손은 판자 침대의 철제 고리에 채워져 있었고 이른 아침부터 줄곧 밤 9시까지 앉아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맨발로 양말도 신지 못하게 했습니다. 담요가 없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차가운 판자 침대 위에 눕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벌레가 위에서 기어 다니곤 했습니다.

그곳에 누워 잔다고 말하지만 양손을 등 뒤로 비틀어 다시 철제 고리에 채워진 채로 얼굴을 젖혀 위로 향하고 10여 분 누워있다 보면 철제 형구에 받혀 통증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몸을 모로 뉘어 널빤지 위에 붙이고 있으면 금방 뒷면 마비가 와서 저리고 아팠습니다. 하지만 저는 팔이 다른 사람에 비해 짧아서 전혀 누울 수 없었고 두 손은 모두 채워져 부었습니다. 저는 매일 밤 앉아있었습니다. 협소한 독방의 복역자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감방문을 열고 들어와 저를 부축해서 눕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8일 밤낮으로 앉아서 지냈습니다. 8일째 되던 날,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어떻게 눕게 됐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감방에서 저는 매우 달콤한 잠을 잤을 뿐만 아니라 몸 위에 이불을 덮은 것 같았고 머리 꼭대기에 전등이 훈훈하게 저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름답고 성스러운 느낌은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눈앞은 여전히 음침하고 음산한 감방이었으며 전혀 이불이 없었고 훈훈한 전등이 없었습니다.

이 기적은 저에게 중공이 선전하는 무신론은 사람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3. 매일 마음속으로 며느리에게 감사

제 작은아들은 모 대학교 컴퓨터 학과를 졸업한 뒤 계속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여자 친구를 소개해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40대가 됐습니다.

몇 년 전, 그는 밖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둔 여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아 아들은 결혼할 생각이 생겼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아들은 설을 쇠러 왔다가 제게 이 일을 말했습니다. 저는 만나보자고 제안했지만 여자 측에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만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어찌 됐든 원하는 것은 연분이지만 단 한 가지, 대법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은 신이 창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서양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하며, 동방에서도 여와가 사람을 창조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사람이 되는 표준을 규범화해주셨지만 중공 통제하에 사람은 도덕적 최저선이 없어 신을 반대하고 불법을 비방하며 멸불(滅佛)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앞으로 대형 전염병이 닥쳐와 사람을 도태시킬 무렵이면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위험합니다.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혼사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룬따파 수련 이후, 저는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여자 측에 대법을 반대하면 안 되며 미래의 며느리가 큰 전염병 등 재난 가운데서 평안하게 남을 수 있게 되어 아름다운 미래로 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게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정월 초나흘에 아들이 며느리 집에 놀러 갔다가 정월 초열흘이 되어 큰 차 한 대가 우리 집 문 앞에 왔습니다. 며느리 측에서 집을 이사해 아이도 데리고 온 겁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어서 저는 제 살림살이를 빼고 그들을 들였습니다.

어떤 때 저는 단수 입장해 발정념하면 며느리는 소리 없이 조용해지곤 합니다. 때때로 제가 밥을 다 지으면 며느리는 먹지 않았으며 몇 번을 불러도 먹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가 옥수숫가루 죽이나 옥수수죽을 만들면 며느리가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옥수숫가루 죽을 좋아했지만 며느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들지 않았고 식사를 준비할 때면 가능한 며느리의 입맛을 배려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어떤 때 불편하면 곧 ‘이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편은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유로 박해당해 사망했다. 딸과 아들도 모두 각자 자신의 가족이 생겼다. 나는 혼자서 생활해 마찰이 없으면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도 폭로되어 나올 수 없다. 며느리가 온 것은 정말 큰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로 안으로 찾아 자신이 어떤 부분을 잘하지 못했는지 살펴보고 다음번에는 가능한 한 잘하고 바르게 하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며느리가 제 심성 제고를 도운 것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며느리 사이가 틀어질 때면 저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삼퇴수첩(三退手冊)’, ‘금종자(金種子)’ 등 진상자료를 보여 주었고 며느리는 당, 단, 대를 탈퇴해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며느리는 집을 장만하라고 아들을 재촉했습니다. 당시 날씨가 추웠지만 저는 매일 나가서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한 번은 거의 40년간 만나지 못한 옛 동료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직장 책임자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저와 여동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우리는 줄곧 점심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두 노인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들은 진상과 대법이 훌륭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당, 단, 대를 탈퇴했으며 그의 부인도 단, 대를 탈퇴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었고 제 연락처를 저장했으며 저를 도와 집을 찾아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결국 아들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저는 먹고 쓰는 것을 아낀 돈을 꺼내 아들에게 아파트를 사줬고 인테리어를 마친 후 그들은 입주했습니다.

저는 며느리와의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낮에는 출근해 바쁘다 보니 어떨 때는 제가 장을 본 뒤, 그들이 와서 가져가게 합니다. 때때로 딸이 생선이나 고기를 보내와도 저는 그들에게 가져가게 합니다. 제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은 며느리의 아들도 사당 조직을 탈퇴한 것입니다. 아이는 실습을 시작했고 올해 돌아올 때는 제게 우유 한 박스를 사다 주었으며 저는 그에게 세뱃돈 훙바오(紅包)를 주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 저는 출근해 돈을 벌어요. 제게 세뱃돈을 주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말해서 저는 싱글벙글 웃으며 “넌 실습하잖아. 아직 정식 출근도 안 했으면서!”라고 말했습니다.

며느리는 집에 있을 때, 아들의 월급날이 되면 아들과 며느리는 과일과 요구르트 등을 사 들고 저를 보러 오곤 합니다. 며느리는 아르바이트해서 월급을 받아도 선물을 사 들고 저를 보러 옵니다. 한 번은 우리가 한담을 나누다가 무의식적으로 “나는 언 감은 먹기 싫어. 산둥에서 나오는 아삭아삭한 감이 좋아.” 며느리는 마음에 기억해두었다가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어느 날 사장 부인이 그런 종류의 감을 먹는 것을 보고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본 뒤, 퇴근한 다음 다 팔리는 것이 걱정돼 서둘러 가서 사 왔습니다. 사 들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며느리는 웃으면서 “어머님께서 좋아하셔서 제가 사 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니 정말 그런 종류의 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과 며느리는 외지에서 아르바이트합니다. 설 쇨 무렵이면 모두 제게 돈을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서 5백 위안(한화 약 8만 원), 1천 위안(한화 약 17만 원)을 부쳐 보내옵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긴 하나 저는 진상을 알게 된 며느리도 중화민족이 어른에게 효도하는 전통적인 미덕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 전염병이 폭발적으로 발생한 뒤, 저는 마음속으로 놀라움은 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며느리와 며느리가 데려다준 큰 손자와 친척, 그리고 친구들, 십여 년간 제가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게 된 많은 세인이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고 중공의 당, 단, 대 조직을 탈퇴해 사당의 낙인을 지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심각하든지 막론하고 그들은 모두 평안하게 재난을 지나갈 것이며 아름답고 훌륭한 미래를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파룬따파는 저를 고집스럽고 난폭하며 이기적이던 사람에서 관용적이고 참고 양보하며 선량한 수련자로 환골탈태하게 했고, 저는 ‘진선인(真·善·忍)’이 인류에게 준 아름다움과 빛을 깊이 느낍니다.

 

원문발표: 2020년 8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17/4106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