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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유별(男女有別)을 다시 깨닫다

오랫동안 단둘이서 함께 일하는 남녀 수련생에 대해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우리 지역의 한 남녀 수련생은 이전에 오랫동안 단둘이서 함께 자료를 배포하고 대법 일을 했다. 숭배하는 마음과 남녀 정(情)이 생기기 때문에 주변 수련생들이 그들과 적지 않게 교류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나중에 관계가 생기면서 지금은 잘못을 알고 고쳤다고 말하지만, 또 매일 단둘이서 진상을 알린다며 재래시장을 돌고 있다. 가족들이 이해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수련생들이 일깨워줘도 여전히 이렇게 하는 것은 문제없다고 고집했다.

남녀 수련생이 오랫동안 단둘이서 함께 일해 온 경우가 줄곧 있었고, 나중에 문제가 생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 지역에도 한두 가지 사례에 그치지 않았다. 숭배하든지 아니면 동작 하나하나에 뚜렷한 남녀의 정서가 드러나는 등 초기의 가장 순정하고 순수한 느낌이 유지되지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수련생은 중생을 더 잘 구하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고 말해서, 주변 수련생들은 이런 형식이 도대체 맞는지 틀리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모호하고 명확한 인식이 없었던 이유는 내가 이 부분에서도 닦아야 할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밍후이왕에서 관련된 수련생들의 문장을 다운 받은 후 한 번 공부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닦아야 할 색욕심뿐만 아니라 행위상에서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색욕심만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기준도 규범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선 법에서 말씀하셨다.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懷大志而拘小節)”[1] 속인이 말하는 ‘남녀유별’은 바로 남녀지간에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 삼계 안에서 수련하는 것이고, 정욕이 넘치는 이런 환경에서 수련하고 있다. 사람이 수련하기 때문에 닦아버리지 못한 사람 마음이 있다. 그럼 오랫동안 가까이서 함께 지내면 정이라는 물질이 역할을 발휘해, 자주 만나다 보면 정들기 마련이다. 전통문화에서 ‘남녀유별’ ‘남녀부동석’ ‘남녀부동거’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이다. 만약 남녀 간에 함께 지내는 관계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고, 신이 정한 남녀의 경계선을 넘어서면, 색마가 자랄 수 있는 토양과 빈틈을 파고들 기회를 제공해준다.

당시, 대법제자와 대법제자 사이에 가장 순수하면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일종 ‘대법 책을 손에 들면 차에 부딪혀도 두렵지 않다’는 이지적이지 못한 행위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한 수련생은 남녀의 감정이 생기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오랫동안 단둘이서 함께 일하면 비난과 가족 갈등으로 인해 번거로움과 다른 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속인들도 모두 알고 있듯이 부부 외엔 무엇을 하든 남녀가 단둘이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좋지 않은 현상이고, 가족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는 대법 수련자이다. 더욱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길도 후세 사람들에게 남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1] “속인 중의 모범 인물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2]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수련인이다. 수련인은 수련인의 기준이 있지만, 이 기준은 속인의 기준보다 훨씬 높으며, 절대로 낮지는 않다. 심지어 속인 층차의 이치와 도덕적 행위 준칙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법의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더욱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구세력의 교란을 이야기했는데 당신들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역시 이런 견제(牽制)의 요소이다! 구세력, 구우주는 무엇을 가장 중하게 보는가? 바로 색(色)이며 남녀 사이에 단속하지 않는 이런 것을 가장 중하게 본다.”[3] “말하자면 그들은 이런 일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그러므로 누가 이 방면에서 계(戒)를 범했고 누가 이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다면, 그 구세력, 그 우주의 모든 신이 다 당신을 보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 당신을 아래로 밀어버릴 것이다.”[3] “그것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다. 일부 사오(邪悟)한 자들, 당신은 그가 진심으로 사악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가? 거기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3]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방향은 밍후이왕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사자 수련생은 무시하면서 “법에는 부동한 층차가 있고, 밍후이 문장은 개인의 인식일 뿐 법이 아닙니다. 각자 층차가 부동한데 어느 법리에 우리가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나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만약 사부님께서 법에서 무엇이든지 다 확실히 알려주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나는 남녀 간의 도덕적 예의에 관한 전통문화를 찾아보았는데 나름대로 수확도 많았다. 워낙 많은 문화가 있어 우리가 원래부터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禮)’가 뭔지 모른다면 ‘비례(非禮, 예의가 아닌 것)’와 ‘월례(越禮, 예의에 벗어나는 것)’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관점을 어떠한 수련생에게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거나 기준을 모르는 수련생과 함께 참고하여 함께 제고하려고 할 뿐이다.

중국의 전통 예의는 일종 도덕 문화로서, 예의를 배우고 준수하는 것은 선량하고 고상한 인격을 갖추는 중요한 길이다. 옛사람에게는 예의를 기재한 경전이 있는데 ‘의례(儀禮)’라고 부른다. ‘의례’는 전통문화에서의 행위규범이자 제도이다. 사람들에게 ‘예(禮)’, 본분(本分), ‘비례’, ‘비분(非分)’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예’를 따르고,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하여 각자 분수에 맞게 행동하여 서로 피해를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는 기본적인 도덕 행위규범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점이 있어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입어례(立於禮)’는 위인지선(爲人之善)의 근본이고. 행어례(行於禮)’는 처사지선(處事之善)의 기준이며, ‘양어례(讓於禮)’는 교왕지선(交往之善)의 너그러움이다.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수양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하다.

‘의례’ 중에는 남녀지간의 행동규범에 관한 지극히 치밀하고 엄격한 요구사항이 있다.

예를 들어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남녀 사이에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고, 타인이나 기구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녀 간에 어떠한 신체 접촉도 차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예를 들면 ‘남녀가 한방에 같이 동거할 수 없다’, ‘남녀부동석(한자리에 같이 앉으면 안 된다)’ 등 이런 것은 남녀 간의 교제를 규범화하는 척도와 거리 등이다.

책에서 “남녀지간의 교제 예의, 분별,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남녀 간에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속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수련인들도 이런 생각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녀 간에 마지막 경계선까지 넘지 않으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또 자기가 한 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생각할까. 우리의 관념은 미끄러져 내려온 후의 변이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신이 사람에게 남긴 전통문화의 도덕규범으로 비교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세 중의 속인의 관념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통(正統)적인 사람의 도덕규범이 부족하면, 대법의 기준을 더욱 논할 수 없다.

비록 시대가 달라졌지만, 신이 사람에게 정해준 규율과 이치는 서로 통한다. 즉 오늘 사회 중의 정인군자(正人君子)와 예의를 알고 자중하는 사람은 모두 남녀 간에 거리 두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교제를 많이 하지 않는다. 지나친 사적 교제는 이미 ‘비례(非禮)’로, 신이 정해 놓은 ‘남녀유별’의 도덕규범을 어겼다. 시일이 지나면 반드시 정이 들기 마련이다.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발전해 나간다면 정욕이 자라는 토양을 주게 되어, 결국 색심이 범람하고 색마에게 조종당해 궤도를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기에 남녀 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고, 사회 도덕적 예의 규범에 부합되어야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가정윤리를 파괴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타인의 비난과 가정의 풍파, 사회의 불안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대법제자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 구하는 효과도 크게 떨어진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를 언급하겠다. 즉 ‘의례’에서 부부간 행동규범에 대해 언급했는데 외부인들 앞에서도 ‘남녀수수불친’을 해야 한다는 점이 나를 크게 촉동했다. 글에서(원문이 아님) 이렇게 말했다. 공공장소에서도 부부 사이는 ‘수수불친’이 돼야 한다. 예를 들어 술주전자를 상대방에게 건네주면 남자는 술주전자 손잡이의 위쪽을, 여자는 술주전자 손잡이의 아래쪽을 잡아야 하며, 부부의 교제도 손이 서로 접촉해서는 안 된다. 즉 “부부라고 해도 대중 앞에서 예의를 반드시 지키고, 신체적 접촉을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정통, 규율, 엄격한 문명 풍모를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은 부부가 수련생이다. 때로는 집을 나서면 무심코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는데 현대 속인이 볼 때는 지극히 정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에게 남기는 것은 모두 바른 요소가 아니라 정욕의 장(場)이다.

이 글은 오랫동안 남녀 수련생이 단둘이서 일하면서 나타난 문제들에 대한 일부 소감이다. 인식 중에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대법의 길을 바르게 걷고, 함께 제고하기 위해 수련생들께서 바르게 잡아 원용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성자(聖者)’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로스앤젤레스시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8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4/4100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