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아이와 함께 법 속에서 성장하다

글/ 캐나다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교류할 제목은 ‘아이와 함께 법 속에서 성장하다’입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저는 진상 알리기 항목과 업무에 바빠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줄곧 가족들이 맡아주었고 저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같은 수련생인 어머니께서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아이를 꼭 살펴봐야 한다.”

어느덧 아이는 두 살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아빠, 나 여기 오기 전에 아빠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요?” 제가 물었습니다. “어디에 있었니?” 아이가 답했습니다. “하늘에 있었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가족 중 누군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련하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이와 비슷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아이가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꼭 저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하루는 또다시 아이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저는 장난스레 되물었습니다. “하늘에서 뭐 했는데?” 아이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계속 보고 또 보다가 아빠를 선택했어요.”

저는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축하해, 잘 골랐네.” 그러자 아이가 곧바로 물었습니다. “왜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아빠가 너를 수련의 길로 인도할 수 있으니까.”

제 대답이 아이의 어떤 기억과 연결된 듯, 아이는 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머리만 대면 잠이 들던 저였지만, 그날 밤은 뒤척이며 쉽게 잠들 수 없었습니다. “아빠가 너를 수련의 길로 인도할 수 있어.”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순간의 기지처럼 보였지만, 실은 제 머릿속으로 뚜렷이 스며든 일념(一念)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의 점화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대법제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 아이가 틀림없이 법을 위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엄마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훨씬 더 가까웠고, 평소에 저를 보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은 꼭 저에게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건 마땅히 제 책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자신의 업무를 조정해, 촬영 지원 부서로 옮겼습니다. 비록 수입은 줄었지만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비교적 규칙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아이를 이끌고 첫걸음을 떼다

그때 아이는 두 살이 조금 넘었고 태어난 이후로 매일 법을 듣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살이 넘은 아이는 응당 스스로 법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를 데리고 《홍음(洪吟)》을 읽기 시작했고, 단어 표면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틀 연속으로 읽으면, 셋째 날에는 아이가 더듬더듬 외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홍음》의 첫 번째 시 ‘마음고생(苦其心志)’을 외우도록 격려했습니다. 외우게 된 뒤, 아이는 매우 기뻐했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시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 1년이 지난 뒤, 아이는 《홍음》을 완전히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논어》를 외우게 했습니다. 하루에 한 문장씩 외우게 했고, 문장이 길면 반 문장씩 나눠 외우게 했습니다. 법을 외우는 시간은 아이가 유치원에 가는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약 1년이 채 되지 않아 아이는《논어》도 유창하게 외울 수 있었습니다.

2. 진일보 성장하다

그 후 아이와 함께 거의 2년에 걸쳐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끝까지 공부했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기 직전, 저는 아이에게 《전법륜》을 암송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루에 한 문장씩 암송하며, 동시에 전에 외운 내용을 복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제1강을 외우는 전반부 몇 개월 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성장하면서 배워야 할 것도 많아졌고, 저도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가장 자주 하게 된 말이 “빨리 해, 시간 없어”였습니다. 퇴근만 하면 오히려 바쁜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고, 늘 압박감과 불안함 속에 살았습니다. 아이가 굼뜨면 계획한 일을 끝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고, 하루의 할 일을 다 마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늦게 쉬게 돼 수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점점 아이에게 집착하게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아이도 제가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에게 주는 압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늘 말을 잘 듣는 편이었고, 수업 후 법 공부와 연공, 그리고 매일 해야 할 일들도 최선을 다해 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늘 아이가 좀 더 집중하고, 시간을 좀 더 아껴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아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며, 정작 자신만의 여유 시간조차 거의 없는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도록 마음속으로 아이를 대신해 무엇을 줄일 수 있을지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법 암송과 연공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이 점점 느슨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서양 사회에서 자라는 만큼 영어도 중요하고, 중국어는 더욱 중요합니다. 지금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배우기가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리고 나중에 아이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려면 음악과 리듬을 모르면 안 됩니다. 그래서 피아노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만 알고 체력이 없으면 소용없으니 수영도 놓칠 수 없었습니다.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줄넘기도 매일 해야 하고요.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도무지 무엇 하나 줄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명혜 라디오에서 한 13살 어린이 대법제자가 교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여름방학 동안 매일 10시간씩 법을 외워서 방학 기간에 《전법륜》 한 권 전체를 암송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그 교류를 제 아이에게 다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곧 여름방학이야. 너는 형처럼은 안 해도 되지만, 우리 제1강만이라도 다 외워보는 건 어때?” 아이는 생각도 하지 않고 아주 기쁘게 “좋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제1강을 외우려면 매일 반 페이지 분량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이전에 외운 내용에 대한 복습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법을 배우고 암송하는 데 7~8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저는 아이가 아직 겨우 여섯 살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다만 계속 아이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 아이는 매우 성실하게 열심히 외웠고, 제 요구를 많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날은 “오늘 두 문장 더 외울 수 있어요”라고 말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아이가 법을 외우는 동안 저는 제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가끔 참여하는 항목 팀에 갈 일이 있을 때는, 제가 나가기 전까지 아이가 새로 외울 부분을 다 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아이가 어떤 문장에 막혀 외우지 못할 때면, 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왜 이걸 못 외워? 집중하지 않은 거 아니야?” 아이는 억울해하면서 몹시 서럽게 울었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저는 늘 후회했고, 아이에게 너무 지나치게 요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면 저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졌습니다. 그 여름방학 내내 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좀 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저 삶이 저를 계속 몰아가는 느낌이었고 진정으로 안으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 마지막 날, 아이는 마침내 《전법륜》 제1강 전체를 다 외웠습니다. 아이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저 ‘내일 드디어 개학이네, 다행이다’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3.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

개학 첫날, 아이는 명혜학교 2학년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 학생은 아이 혼자뿐이어서, 1학년 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매일 학교에서 아주 즐겁게 지냈지만,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그 댁 아이가 우리 아이를 울게 만들었어요”라는 불만이 자주 들려왔습니다. 학교 친구들도 종종 저에게 찾아와 제 아이가 말투가 거칠다고 고자질했고, 선생님 역시 비슷한 피드백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매일 아이를 데리러 갈 때면 누군가 제게 다가오기만 해도 ‘또 누가 아이에 대해 불평하러 오는 건 아닐까?’ 하는 긴장감이 생겼습니다.

사실 아이는 두 살 때부터 일반 사립학교에 들어가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고, 당시에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아이를 좋아해 주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여름방학 동안, 아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게다가 이번 여름방학 동안 아이는 대부분 시간을 법을 암송하며 보냈는데 말입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저를 학교로 불렀고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관찰에 따르면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어디서 배운 걸까?’ 선생님 사무실을 나서는 제 마음은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 무거웠습니다.

그날 하교 시간,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저에게 다가와 오늘 제 아이가 그를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왜 친구를 때렸니?” 그러자 아이는 “안 때렸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한마디 “안 때렸어요”에 저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낮에 선생님이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던 말씀이 떠오르며, 저는 ‘이게 바로 눈앞에서 거짓말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화가 치밀어올라 아이에게 다그쳤습니다. “다시 묻겠다, 너 왜 친구를 때렸니?” 아이는 여전히 “안 때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주차장 구석에서 몰아붙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안 때렸으면, 걔가 왜 너한테 맞았다고 했겠어? 너 때렸지?” 제 격앙된 감정과 말투에 놀란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으나, 아이는 여전히 매우 억울해했고, 울면서도 자신이 때리지 않았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아이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매우 실망스러웠고, 지난 몇 년간 아이를 위해 기울였던 모든 노력이 ‘왜 결국 이런 아이를 만든 걸까’라는 깊은 자괴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는 가부좌를 틀고 제인(結印)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대법 음악이 흐르자 마치 마음속에서 날뛰던 만 마리의 말이 멈춘 듯, 복잡했던 생각들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이 피로, 억울함, 무력감 같은 속인의 감정들을 서서히 지워주었습니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저는 무심코 사부님의 설법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때 《맨해튼 설법》에서 이런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법이 있으며, 정념 중에서 대법과 당신들은 같이 있는바, 이는 거대한 보장이다. 정념이 부족해 법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법의 힘에서 이탈할 것인 즉, 고립되어 도움을 받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고립되어 도움을 받지 못하다(孤立無助)’ 이 표현이야말로 그 순간 제 마음 상태를 정확히 표현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는 듯 보였지만, 법 공부를 건성으로 대하며, 일하는 것을 수련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대할 때에도, 저는 수련인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아이에게만 요구해 왔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서 아이는 과연 수련이 즐거운 일이라고 느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정말 아이를 수련으로 이끌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오히려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걸까요?

사실 아이를 교육하는 문제에 있어 사부님께서는 이미 《전법륜》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

저는 제 상태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아이를 도와 선생님과 친구들이 지적한 부족한 점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4. 자신을 개변하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다

다음 날, 아이가 하교한 후 저는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아빠가 어제 화낸 건 수련인의 모습이 아니었어.” 그리고 아이에게 사과했습니다. 식사 중 저는 아이에게 수련자는 반드시 정직해야 하며, 사부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알려줬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때 저는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고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기쁘게 식당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기석 근처에 분재 장식물이 있었는데, 아이가 부주의하게 유리로 된 장식 구슬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저는 화내지도,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에게 스스로 직원에게 자신이 깼다고 말할지 선택하게 했습니다. “넌 영리한 어린이 대법제자야. 아빠는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 믿어.”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제 손을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유리구슬을 제가 깨뜨렸어요.”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니.” 저는 혹시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직원에게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식당을 나와 저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쪼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넌 정말 용감하고 정직한 어린이 대법제자야.” 아이는 해맑게 웃었습니다. 저는 문득 이것이 사부님의 세심한 안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아이에게 정직이란 무엇인지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저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 근본 원인이 저의 과도하게 엄격한 태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평소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다면, 아이도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부모의 어느 방면에 문제가 있다면 어린이도 표현하게 되는데, 일부러 표현하여 대법제자에게 보이고 부모에게 보인다.”

원래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아이는 저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문제의 근원은 저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주 후 다시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기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쯔샹(子翔)이는 이제 거짓말하지 않아요. 학교에서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친절하고 인내심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점화에 감사드렸고, 아이를 세심하게 보살펴주신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 학부모 몇 분과 만났는데 그분들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싸우고 놀아요. 댁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가 크잖아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넘어지죠. 걔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저는 아이가 억울하게 눈물을 흘렸던 그날 일이 떠올랐고, 마음속으로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빠가 오해했던 일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고, 저에게 항상 밝은 미소와 맑은 눈빛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기간 지나온 일들을 돌이키며 저는 문득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는 말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이며, 바로 우리의 심성(心性)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법을 암송할 때 저도 함께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아빠도 법을 외우는 거예요?” 저는 “응, 아빠도 너랑 같이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려고”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암송이 끝난 후, 우리는 서로의 암송을 점검하고 오류를 바로잡아주었습니다. 아이가 외우기 어려워하는 부분은 저 또한 자주 틀리는 구절이기도 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예전 아이가 암송에 어려움을 겪던 이유가 단순히 아이의 집중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글자 한 글자 진지하게 법을 외울 때, 제 머릿속에 층층이 쌓여 있던 혼탁한 물질을 사부님께서 청리(淸理)해주시고 대법이 깨끗이 씻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머릿속이 맑아지고 사고가 명료해졌으며, 마음도 고요해졌습니다. 거의 1년간 저를 짓누르던 조급함, 불안, 압박감 같은 물질이 언제부터인지 사라져 있었습니다. 점차 아이와 함께 법을 암송하는 시간이 저에게 다시금 예전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이처럼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을 암송하는 시간을 거치며, 저는 자신에게 더 많은 집착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강압적인 아버지가 아니며, 아이에게 “이건 해야 해”, “저건 하면 안 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리듬에 따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실수도 허용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변했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제가 사람 마음을 내려놓자 아이도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이가 성심껏 법을 배운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5. 진일보 집착을 내려놓다

아이와 함께 정상적인 편안한 법 공부와 학습, 생활 상태로 돌아간 후, 제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한 영화의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저를 찾아와, 자신들의 영화 촬영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 상사는 그들이 촬영장에서 저에게 기술을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며, 이런 기회는 정말 드물다면서 저보고 꼭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쪽에는 아이에 대한 염려가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비운 동안에도 아이가 법을 외우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느슨해지지는 않을까? 외지에서 촬영하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걱정이 마음속에서 자주 올라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가족으로부터 아이가 전날 밤 꾼 꿈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가 깊이 잠든 후, 방 한쪽 구석에서 갑자기 구멍 하나가 생겼고 그 안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으며, 순식간에 그 빛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끌어 갔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금빛 찬란한 세계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천녀(天女)들이 꽃을 뿌리고 있었으며, 또 층층마다 금강(金剛)과 부처님들이 가득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노란 가사를 입은 사부님을 뵈었는데, 사부님께서 환히 웃으시며 아이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법을 잘 배우고, 연공도 잘하고, 춤도 잘 추렴. 키도 쑥쑥 자라서 션윈에 가야지.” 저는 이 꿈이 사부님께서 아이에게 보내주신 격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에 대한 일깨움이기도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어린 대법제자를 지켜보고 계시니 저에게 걱정하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점화였습니다.

6개월간의 촬영 프로젝트는 저에게 큰 수확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촬영 날, 철수 작업이 끝난 시간은 아침 7시였지만 촬영장을 나서는 저는 조금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햇살을 맞으면서 바람을 느끼며 차를 몰고 귀가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습니다. “수련은 정말 좋구나, 사부님이 계셔서 정말 좋구나!”

맺음말

어느 날 밤, 아이와 함께 법을 암송하고 책을 덮은 뒤 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아빠, 제가 아빠를 선택한 건 틀리지 않았어요.” 아이가 불쑥 내뱉은 이 말, 저는 그것이 사부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격려임을 알았습니다.

아이의 순수함과 선함은, 생명이 본래 지녀야 할 상태가 어떠한지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아이는 제 거울이 되어 제 집착심을 비춰주었고,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법에 따라 자신을 바로잡고 더욱 잘하도록 노력하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아이 또한 완벽하지 않은 아빠를 보면서, 아빠도 수련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수련 속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교육이라고 하면 아이를 수련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주는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2025년 캐나다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7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22/4973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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