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자아’에 대한 재인식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자아(自我)’는 구 우주의 근본 속성 ‘사(私)’에서 생겼다. 많은 집착심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가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련생태가 좋지 못한 원인을 찾아보니, 자아를 깨끗이 닦아내지 못해 초래한 것이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그렇게 견정하지 못하고, 교란에 부딪히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면 진상 과정에서 순정한 마음으로 말하지 못했고, 분별심이 생겨 사람을 골라 말하고 싶었으며 마치 임무를 완성하듯 했다.

예전에는 불안한 환경에서도 마음은 확고했는데, 지금은 환경이 느슨해졌는데도 오히려 마음속에 그처럼 강한 견정함이 없다. 최근, 나가서 대면 진상을 알리다가 젊은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진상 자료를 볼지 물어보지 말자. 지금 젊은이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어봐도 소용없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도 입을 열기 싫고 한두 사람에게 말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상태를 돌파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자신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 와서 ‘전법륜(轉法輪)’을 보니 사부님께서 천목 문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단락이 있었다. “신체 표면은 매끄럽지 않으며 불규칙하다. 우주 중의 어떤 물체, 강(鋼), 철(鐵), 돌 모두 마찬가지로서, 그것 속의 분자 성분은 모두 운동하지만, 당신은 전반 형식을 다 보지 못하는데, 사실 그것은 모두 안정된 것이 아니다. 이 책상 역시 꿈틀거리고 있지만, 눈은 오히려 진상을 보지 못하는데, 이 한 쌍의 눈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각을 조성해 줄 수 있다.”[1] 이 단락을 보고 나는 눈앞의 현실 관념, 사람의 표면 현상에 교란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세인이 어떻게 좋지 않게 표현하고, 어떤 듣기 싫은 말을 해도, 진정한 그들은 구도를 바라고 있다. 다른 공간에 진정한 그는 아마 내가 더 알려주기를 바라고 구도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 이치를 알고 나니 강한 정념이 생겼다.

정념이 생겼지만, 아직 숨어 있는 좋지 않은 사람 마음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저녁에 밥을 하고 교류 문장을 들었다. 제목이 ‘법을 배워 미혹을 타파하고 억울한 옥살이 중에서 대법을 실증’이란 문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생각하다가 조용히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런 원인이 아니고 당신은 자신의 자유를 법을 실증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만약 한 수련자가 언제나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한다면 삼서(三書)는 쓰지 않습니다. 대법을 X교라고 무고함을 당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이런 말은 더더욱 쓰지 않습니다. 만약 한 생명이 자신의 생명과 자유가 협박받고 있을 때 먼저 자신을 보호하고 이익이 손해 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면 자연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것입니다.’”

이 단락을 듣고 나는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알았다. 나는 ‘자아’를 내려놓지 못했다. 바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그 가짜 나[假我]다. 동시에 나는 무엇 때문에 늘 밤 12시 발정념을 돌파하지 못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은 내가 편안함, 안일함을 추구하는 가짜 나를 진정한 나로 여겼기 때문이다. 편안함이 확실한 이익의 유혹이라 여기고 돌파하고 싶지 않았고 편안하고만 싶었다.

이제 진상 알릴 때 바르지 못한 상태의 원인을 찾았다. 가짜인 내가 불편한 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짜 나의 이익을 법 실증보다 중하게 놓았다. 계속 이렇게 내려간다면 이 가짜 나를 돌파하지 못해 갈수록 해이해져 더 돌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놀라웠는데, 안일은 정말 마치 독한 술 같다. 이런 것에 명백해진 후 마음이 탁 트였다.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수련해 집착을 제거한 미묘함도 느꼈다.

어떤 집착심은, 너무 강할 때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가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진정한 자기가 추구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짜 나를 너무 진실한 나로 여겨 마주하고 싶지 않고 참아내고 싶지 않으며, 제기하고 싶지 않은데, 모두 그 가짜 나의 작용이다.

‘자아’를 닦아내야만 내면에 더는 자신이 들어가 있지 않고 상대방을 마음에 두게 된다. 그래야만 자신을 작게 보고,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정체에 더 잘 협조하고, 더 많이 제고할 수 있어 진정으로 착실하게 수련할 수 있으며, 사를 벗어나 자비를 수련해낼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0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4/4079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