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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사소한 일에서 마음을 닦다

글/ 일본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나는 관(關) 넘는 것을 청성하게 대하기 위해 줄곧 사부님의 이 말씀으로 자신을 일깨웠다. “여러분 알다시피 우리는 수련(修煉)이다. 기왕 수련인 이상 우리의 수련 이 길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1] 그러나 나는 일부 큰 관을 넘을 때는 단번에 알아차리지만,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작은 일에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이치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발견했다. 깨닫지 못했던 이런 모순은 늘 내 마음을 충동질해 내가 속인처럼 소용돌이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집안의 가족들은 매일 함께 생활하는데, 그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반응을 보인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선입견을 만들게 되며, 그들이 곧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여기면서 하나의 고유한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나를 건드린 것은 무슨 일이 아니라 나의 어떤 마음이라는 걸 모를 수 있다. 이밖에 이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므로 그들에게 정을 느끼고 심지어 정이 몹시 깊은데, 그래서 평소에 말을 아주 제멋대로 해도 거의 반응이 없다. 그러나 설령 더욱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수련과 시시각각 관계가 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바로 그들을 중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므로 내가 정한 남편의 표준을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내 자녀이므로 내가 어떻게 훈육해야 한다면서 그 아이가 자녀로서 내 말을 어떠어떠하게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남편이 화를 낼 때, 아이가 나를 무시할 때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모든 일에 우연이 없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줄곧 망각한다. 나는 늘 어떤 수련생이 “나는 모모 수련생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도 최근에 그들의 여러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지’ 않았는가?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나는 왜 받아들일 수 없을까?

그렇다. 왜 나는 받아들일 수 없을까? 수련에 소양이 있는 수련인이라면 마땅히 영욕에 담담하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들이 온갖 표현을 할 때, 내가 그들의 그런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시험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내 수련의 길에 공들여 배치해 주신 관이 아닌가? 나의 사유는 어째서 늘 사람의 이치에 머물러 있는가? 사람의 이치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 사람의 층차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나는 관념을 개변해 더는 사람의 사유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관건임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줄곧 사람의 층차에서 배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수련인인 나는 반드시 일체 흔들림 없는 상태에 도달해야 하며, 더욱 큰 광풍과 폭우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했다. 바로 아래에 밝히는, 더는 평범할 수 없는 가정의 사소한 일이 나를 사고하고 깨우치게 했다.

나와 남편은 전염병 때문에 집에서 일했고 아이들도 집에서 쉬었다. 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이가 나를 도와 저녁 식사를 차렸다. 당시 딸은 손에 호떡을 든 채 나에게 호떡을 쉽게 담을 수 있도록 냄비를 화덕 위로 옮겨 달라고 말했다. 내가 냄비를 내려놓는데, 화덕 위의 묵은 때와 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이전에 여러 차례 말을 했는데 아직도 제때 청소하지 않아 또 이런 상황이 나타났다며 딸을 야단쳤다. 뜻밖에 딸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에 든 호떡을 곧 떨어뜨릴 것처럼 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빨리!”하고 소리쳤다. 나도 큰소리로 “지금 이걸 바로 안 닦고 계속 가열하면 더 지우기 어렵잖아!”라고 대꾸했다.

바로 그때 남편이 갑자기 큰소리로 “지금 회의 중이니까 좀 조용히 해!”라며 외쳤다. 눈을 부릅뜬 남편의 표정을 보자 단번에 반감이 올라왔다.

나는 화로를 닦으면서 계속 아이를 야단쳤다. 그러나 아이는 내 말을 듣기는커녕 더 큰소리로 나를 독촉했다. 화로 위에 있던 더러운 것들은 단번에 닦이지 않았고, 아이의 손에는 호떡이세 개나 들려 있었다. 한 손에는 두 장이 한꺼번에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얌전히 들고 있지 않아 내용물이 곧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또 “왜 세 장이나 들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고 아이를 야단쳤다. 딸은 더 큰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이쪽에서는 딸이 재촉하고, 저쪽에서는 남편이 일을 방해한다며 야단을 쳤다. 남편은 심지어 회사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모두 들어 체면을 잃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잘못이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에만 몰두해 그들과 다투었고, 그 모든 것이 내 수련의 관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우리가 관을 넘지 못할 때는 틀림없이 자신이 옳고, 자신이 도리에 맞으며, 상대방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이른바 도리에 아무리 옳다고 한들 모두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나는 냉정을 되찾고 발정념으로 자신의 모든 바르지 못하고 법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과 물질을 청리했다. 이후 사부님께서 일부 물질을 제거해 주시는 것을 느꼈고, 나는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제고할 기회를 또다시 놓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사부님께서는 다시 나에게 하나의 의념을 떠올려 주셨다. 나는 재빨리 당시 그들의 심태(心態)가 어땠는지를 생각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당시의 기분을 생각하자 즉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조용히 해야 했고, 회사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손에 들린 호떡은 원래 들고 있기 힘든 것인데도 나는 재빨리 냄비를 놓아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이가 급했을 테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니 내가 그렇게 형편없고, 그렇게 못됐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자비를 수련해낼 수 있는지를 줄곧 몰랐고, 내가 자비를 수련해내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그런데 자비는 조금씩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이렇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작은 일을 놓치고, 수련의 매 한 걸음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언제 자비롭고 상화(祥和)한 심태에 도달하며, 언제 신의 경지에 도달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남편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뉴질랜드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529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0/5/29/4069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