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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팍한 시어머니의 변화, “며느리도 딸입니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했다. 대법을 얻은 뒤 심장병, 만성 후두염, 중이염(왼쪽 귀는 청각장애), 부인병, 장염, 다리가 아픈 등의 질병이 모르는 사이에 다 나았으며 사상 경지도 승화됐다. 이제 내가 어떻게 대법의 요구에 따라 시어머니를 선의의 마음으로 대했는지 이야기하겠다.

1. 시어머니에 대한 원한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이 둘, 딸이 하나인데 내 남편은 집안의 장남이다. 결혼 후 남편은 내게 늘 가정폭력을 일삼았는데 이유 없이 욕하고 때렸다. 사실 나는 모든 조건이 그보다 좋았고, 특히 월급이 항상 두 배나 더 많았지만 내 삶의 모든 것이 그에 의해 통제됐다. 나는 체면을 위해 이혼하지 않았다. 친정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그에게 무슨 약점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내 일생의 행복은 모두 그가 망쳐버렸고, 인생의 99%의 고통은 남편에게서 비롯됐기에 나는 남편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몹시 미워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는 법리에서 이것이 인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어느 세(世), 어느 생에서 그에게 빚졌을 것이다! 알면서도 내려놓기는 어려웠다. 동시에 나는 또 남편이 나를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사정을 아는 시어머니가 아들을 통제하거나 제지하지 않았기에 시어머니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심지어 한 번은 내가 시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나를 겨울밤에 바닥에 알몸으로 서 있게 하면서 잠을 못 자게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아들 방에 건너가서 큰소리로 웃으면서 “너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대하냐, 하하하……”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머릿속이 텅 비어 뒤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 당시에 시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화를 입지 않고, 며느리가 업신여김을 당했기에 마음이 아프지 않고 별일이 아니며, 또 고소해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거기서 생겨났다. 내가 대법 수련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남편과 이혼했을 텐데 시어머니도 그걸 아셨을 것이다.

2. 묵묵히 시어머니를 돕다

나는 수련 후 비록 시어머니를 겉으로 잘 대해주었고 시어머니도 큰며느리가 얼마나 좋다고 늘 얘기하곤 하셨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원한이 남아 있었으며, 시어머니의 사람됨과 각박한 일 처리 방식에 대해 무시하기까지 했으므로 나 자신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평소에는 숨어 있다가 일이 생기면 발작을 일으켰다.

대략 2010년에 시어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친정 올케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의 사진을 앞으로도 친정어머니가 생전에 쓰던 방에 모시라고 무리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 지역 농촌의 관습은 이럴 수 없었고, 반드시 사진을 무덤에 묻거나 궤 꼭대기에 엎어놓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모시지 않으면 큰 소동을 일으키려 하셨다. 이러면 결국 남매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인데, 시어머니는 친정에 오빠 한 분뿐이고 다른 가족은 없다. 시어머니의 비이성적인 처사는 시어머니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이로울 수 없으며 시어머니는 훗날 크게 후회하실 것이다. 시누이도 걱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방법이 있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람의 일면은 시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생각했다. ‘왜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하지? 소동을 부리면 부리라고 하지.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그러나 나의 정념은 자신에게 경고했다. ‘언제 그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너는 무조건 노인을 잘 대해야 한다!’ 내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갈등을 겪었는데 그것은 정말 치열한 정사 대전이었다. 결국, 정념이 우세했다. ‘나는 오늘부터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잘 대할 것이며, 더 미루지 않고 바로잡겠다.’

그래서 나는 시누이에게 시어머니의 조카며느리를 찾아가서 조카며느리가 우리 시어머니에게 마을의 규례를 설명하게 하고, 장례의 다른 방면에서 시어머니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만족시켜 드리라고 했다. 나는 시어머니가 조카며느리와는 다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그만뒀고, 사진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시면서 이 소동이 지나갔다. 시누이는 이 일로 내가 다시 ‘삼퇴’를 권하자 곧 승낙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머니도 친정 올케도 사이가 좋아졌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오빠와 아주 친한 사이다.

3. 성심껏 시어머니에게 잘해드리다

내가 비록 시어머니를 위해 그 일을 했지만, 원한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았다. 바로 그해에 시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집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고 시어머니도 나이가 많으셔서 우리 집에 잠시 머무르시라고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번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표리여일(表裏如一: 안팎이 같음. 생각과 언행이 완전히 일치함)하게 시어머니를 잘 대할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원망을 버리면서 시어머니의 음식과 기거에 관심을 가졌으며, 시어머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했다가 그것을 사서 만들어 드렸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바로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늦으면 안 되고 일찍 해서도 안 되는데, 나는 시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시어머니를 잘 대했고, 시어머니의 명백한 면은 나의 변화를 알기에 시어머니도 진심으로 내 딸에게 “다른 집 고부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네 엄마를 보면 친엄마와 딸과 같지 않니?”라고 말씀하셨다.

4. 쓰레기 줍는 시어머니, 화가 나고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에서 이해하게 되다.

나중에 시어머니는 혼자 살기를 원하셔서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2017년, 80세 가까운 시어머니가 점점 몸이 허약해져 스스로 생활하기 힘들게 되자 시동생이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 1년을 살았다. 시어머니와 동서의 갈등도 작은 소동에서 큰 소동으로 일 년이 됐는데, 결국에는 서로를 상대하지 않게 됐으며 동서도 자주 집에 오지 않았다. 시동생은 시누이에게 “엄마와 네 올케 사이의 갈등은 엄마의 잘못이 90%, 네 올케의 잘못이 10%야”라고 말했다. 그 뜻은 어머니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동생은 내 남편에게 “어머니를 형 집에 묵게 해줘.”라고 간청했다. 마침 그때 딸이 외지로 등교하게 되어 우리는 시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셔왔다. 남편은 나에게 어머니를 우리 집에 계속 머무르게 할 것이며, 다시는 시동생 집에 돌아가서 제수로부터 미움을 받게 할 수 없다고 말해 나는 동의했다.

이번에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 후에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아주 큰 결점이 하나 더 추가됐다는 것을 알았다. 시어머니는 팔 수도 없고 쓰지도 못할 나뭇잎, 담뱃갑, 담배꽁초, 요구르트병, 튀긴 음식을 꿰는 참대꼬챙이, 설탕 종이, 입 닦은 종이, 각종 작은 음식의 포장지, 다른 사람이 버린 가방, 상자 등등 쓰레기를 주워 집에 쌓아 놓았다. 주운 물건이 방에 가득 차서 침대 커버 아래, 베개 아래, 난방기 틈새까지 온통 방바닥에 걸을 곳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고, 때로는 자신이 주워온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도 하셨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몰래 틈틈이 버렸지만, 만약 발각되면 시어머니는 크게 소란을 피우셨다. 한 번은 양로원에 가겠다고 협박까지 하셨다.

처음엔 시어머니가 주운 물건을 보면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대법에 대조해 보면 화가 올라오는 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버려야 한다. 시어머니가 집 쓰레기통에서도 물건을 줍기에 나는 쓰레기봉투를 제때 버려야 했다. 때때로 출근길에 깜박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잊은 것이 떠오르면 즉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면 역시 쓰레기통에 내가 버린 기름때 묻은 천이나 상자 따위가 없었다. 내가 샅샅이 찾아도 어디에 집어넣으셨는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점차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심지어는 약간 겁나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퇴직 교사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자식들도 다 잘살고 있는데 왜 이러실까?’ 시어머니는 무엇도 다 소중하다고 하셨다. 나중에 법을 학습하고, ‘9평’을 보고, 또 수련생들의 깨우침을 통해 실은 시어머니도 사당(중공)의 영향을 받아 가난해진 사람들이 가난이 두려워 지나치게 물건을 아끼고 절약하는 데서 조성된 것임을 알았다. 나는 마땅히 시어머니를 도와 정념으로 이런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이해하니 시어머니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남편은 가끔 화가 나서 그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아, 정말!”이라고 하면 나는 부드럽게 “화내지 마세요.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이 말에 역시 내가 시어머니를 얕잡아 볼까 봐 걱정했던 남편은 내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가짐이 변하자 시어머니도 물건을 줍는 횟수가 조금 줄었다. 우리는 함께 있기에 나는 시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고 시어머니가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을 만들 수 있었다.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다양하게 만들어 드렸지만 가끔은 조금 억울하고 귀찮을 때도 있었다. 나는 즉시 이 사람의 마음을 닦아버리고, 자신에게 선을 닦으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무슨 억울한 일이 있겠느냐고 자신에게 경고했다. 이렇게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자기 뜻대로 했으며, 정신 상태도 점점 좋아졌으며, 이따금 흥얼흥얼 노래도 부르셨다. 동네에서 할머니들을 보면 맏며느리도 딸 같아 딸이 둘이라고 자랑하셨다.

5. 시어머니가 대법을 인정하기 시작하시다

과거, 시어머니는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에 대해 풍자와 비난을 하셨다. 시어머니는 1년 반 우리 집에서 생활하면서 두 며느리의 엄청난 차이를 보셨고, 또 내가 시어머니를 잘해드릴 뿐만 아니라 성미가 욱하는 남편과도 다투지 않으며, 그들 두 모자를 세심히 배려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파룬따파는 정말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최근 반년 동안, 시어머니도 대법 서적을 보시기 시작했다. ‘전법륜’, ‘정진요지’, ‘전법륜법해’를 모두 한 번씩 보셨다. 시어머니는 수련 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가능한 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일을 하겠다고 하셨다.

대법은 중생에게 은혜를 주었는바 나는 마음속의 경솔함과 원망을 버리고, 대선지심(大善之心)을 닦아내 까다로운 시어머니가 구원되셨다.

 

원문발표: 2020410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0/4034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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