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병업’ 교란에 대한 인식

글/ 둥베이(東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소위 병업 가상은 ‘7·20’ 이전이든 이후든 줄곧 존재했다. ‘7·20’ 이전에 우리는 그것을 본인이 신사신법(信師信法)과 심성의 시련으로 여기고 소업, 좋은 일로 여겨 아주 빨리 지나갔으며 반복이 아주 적게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 왜 병업 교란이 여전히 보편적인가? 구세력의 교란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법리에서 알다시피 진정한 수련인은 병이 없다. 병업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시험이고 소업은 일종 표현이다. 우리의 세 가지 일까지 교란하고 우리 일상생활마저 교란하면 그럼 구세력이 우리의 어떤 방면의 수련이 법에 있지 않은 틈을 탄 것이기에 우리는 정념으로 이 일을 대해야 한다.

1. 법리가 뚜렷하면 교란을 돌파할 수 있다

한번은 나는 온몸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손으로 긁어 군데군데 벌겋게 됐고 긁을수록 가려웠으며 가려울수록 긁고 싶었다. 낮에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저녁이 되면 심했다. 발정념도 할 수 없었고 법 공부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무튼 괴로워 몸을 다 긁어 피가 나와야 좀 괜찮을 것 같았다.

이 현상이 막 나타났을 때 나는 나에게 어느 방면에 누락이 있는지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몹시 괴로웠고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무슨 방법으로 고통을 덜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렇게 약 일주일간 지속하였다.

하루는 법으로 이 일을 가늠해봤다. 나는 왜 그것에게 이끌리는가? 왜 방법을 생각하여 이 고통을 해결하려 하는가? 나는 이것을 병으로 대한 것이 아닌가? 심해져 봤자 생사 시험이 아닌가! 나는 나에게 물었다. ‘죽는 게’ 두려운가? ‘죽는 게’ 두렵다면 왜 두려운가? 속인 중의 명(名), 이(利), 정(情)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사람 중의 일부 집착에 미련을 둔 것이 아닌가? 나의 주왠선(主元神)은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이 공간을 이탈할 뿐 생명이 진정으로 사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명인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익인가? 상관없다. 육친 정인가? 사람은 각자 운명이 있거늘 내가 좌우지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可死).”[1]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또 말씀하셨다. “사람과 신(神)의 구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사를 내려놓는다면 당신은 바로 신(神)이며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사람이다. 바로 이 구별이다.”[2]

나는 법리에서 내려놓지 못할 것이 없고,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석하게 인식했으면 뭐가 또 두려운가! 법리에서 뚜렷해지고 마음을 조절하고 신체의 느낌을 주의하지 않았더니 나도 모르게 몸이 좋아졌다.

2. 제때 안으로 찾고 교란을 부정하다

또 한번은 갑자기 한쪽 귀가 울리기 시작했고 이후에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손으로 귀를 막아야 들렸고 손을 떼면 소리가 극히 작게 들렸다. 더 발전하면 전혀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왜 이 일이 나타났는지 안으로 찾았다. 나는 지나간 일을 회고했다. 나의 장인은 귀가 먹어 말소리가 낮으면 듣지 못해 텔레비전을 볼 때 소리를 아주 크게 틀었다. 이웃들은 시끄러워 편안할 수 없어 나는 장인의 동의를 구하고 보청기를 사드렸다.

사 온 후 장인은 보청기를 끼면 불편하다고 한두 번 하고 끼지 않아 텔레비전 소리는 여전히 그렇게 높았다. 이웃집 한 학생이 시험 칠 때가 됐는데 학과를 복습하는 데 방해받아 여러 번 찾아왔지만, 나의 장인은 여전히 조심하지 않았고, 텔레비전을 볼 때 소리는 여전히 아주 컸다.

어떤 때는 속으로 불평했다. ‘왜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을까? 보청기를 사드려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비싼 것을 그곳에 두는 것은 낭비가 아닌가! 사용하지 않으면, 내가 늙어 들리지 않을 때 사용할 거다.’이 생각이 나왔을 때 당시 나는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척했다. 나는 그때 이 생각 때문에 나의 귀도 잘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 원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 주위에도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낀 수련생 A가 있다. B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A는 이전에 잘 들었습니다. 이후에 협조인이 된 후 부동(不同)한 의견을 듣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은 ‘헐뜯었습니다.’ 기왕 부동한 의견을 듣지 않으려고 한 이상, 아예 소리를 못 듣게 한 겁니다. 심성을 닦지 않아 빚어진 겁니다.”

당시 나는 B 수련생에게 구세력의 교란을 받지 말고 수련생 사이에 간격을 형성하지 말며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보지 말고 자기를 찾아야 한다고 귀띔했지만, 나의 내심에도 B 수련생의 생각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A 수련생이 일하는 것이 법에 있지 않은 것이 많고 그와 소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그는 듣지 못했다.

내가 A 수련생에게 견해를 가져 나의 귀도 잘 들리지 않은 게 아닐까? 나에게도 부동한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정황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도 이런 관념이 있는 것 같아 이 방면에 많이 주의하도록 나를 일깨워주고 이 귀를 생각하지 않고 내려놓았다. 언젠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자신이 병업 교란을 받는 시험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병업 교란이 왔을 때 주이스(主意識)가 명석해야 하고 법리가 또렷해야 한다. 관념에 따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그것을 대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울러 가장 이른 시간에 안으로 찾아 왜 이때 이런 일이 나타났는지를 찾아야 한다. 나의 어느 방면에 대한 시험인가? 구세력이 나의 어느 방면의 빈틈을 탄 것인가? 원인을 찾아내면 가장 좋고, 찾아내지 못하면 새로운 집착이 형성되지 않도록 이 일을 늘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란을 너무 크게 보면 넘기 어렵다. 소업이라 여기고 생사 일념의 시험으로 여기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이다.

수련인에게 어떤 일이 나타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밖에 나에게 교란이 나타나면 나는 신사신법해야 하고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큰 교란이라도 내가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3. 자기를 잘 닦아야 다른 사람을 더 잘 도울 수 있다

C는 장기간 병업 교란을 받는 고난 속에 처했다. 많은 수련생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그녀를 도왔다. 물론 우리가 한 어떤 일이든 다 자기를 닦는 것이지만 도와준다는 이 단어로 이 일을 설명할 뿐이다. 흔히 수련생들은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기 수련을 홀시하고 완전히 속인의 방법대로 한다. 예를 들면 C를 도와 옷 빨고밥 지어주고야채 사주고 생활용품을 사다 주며 집 안 청소를 해주는 일을 한다. C를 격려하여 C가 할 수 있는 일부 수련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정상인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길어지자 수련생 C는 의지하는 마음, 게으른 심리가 생겨 수련에서도 태만해졌다. 차츰 자기도 모르게 수련생들이 그녀를 도와 한 어떤 일이든 다 마땅한 것으로 여겼고 수련생들이 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노하고 원망하며 질책하고 질투했다. 그녀를 도와주러 간 수련생들도 당신을 도와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다니, 억울하고 거꾸로 그녀를 질책하고 원망했으며 C 수련생을 의논했다.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보는 환경이 형성되어 모순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간격이 끊임없이 나타나 구세력이 이런 것을 이용하여 C 수련생의 난을 크게 했다.

나는 수련생 C를 도와주러 간 사람은 모두 자원하여 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이 일을 열심히 잘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진정하게 수련생 C를 도울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수련의 각도에서 말하면 수련생 C를 도와 하루빨리 고난에서 걸어 나오게 하려면 하나는 발정념을 통해 그녀를 도와 외래 교란을 제거해주고 수련생의 주이스를 강화하고 수련생의 정념을 강화해주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녀를 도와주는 수련생은 그녀와 법 공부나 법을 외우는 것을 통해 교류 등 방식으로 본인에게 자기의 부족한 점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하고 구세력에 틈을 타게 한 누락을 찾으며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을 찾아 하루빨리 제고해 올라오게 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점을 바로잡고 항상 각 방면에서 높은 표준으로 자기를 요구하고 자기를 잘 닦아야 하며 시시각각 우리가 한 어떤 일이든 모두 자기를 수련하는 것이지 속인 중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수련인의 방법에 따라 해야지 속인의 방법으로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수련생에게 직접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하책이고 그녀 스스로 깨닫고 제고해 올라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배후에서 수련생을 의논하는 것은 더 취할 바가 못 된다.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생 C를 도울 때 C에 대한 요구가 너무 높다. ‘C는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고(사실 수련한 시간의 길고 짧음은 무엇을 대표하지 않음. 수련을 잘하고 잘하지 못한 것은 수련생의 심성과 법에 대한 이해를 보아야 한다. 사실 이런 것도 보아서는 안 되고 평가, 분석하지 말고 수련생이 잘 수련했는지 못했는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잘 수련한 그 일면은 표현되어 나오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 수련생에게 큰 난관이 왔는데 이렇게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을 왜 본인은 보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지나가지 못할까?’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길어지자 수련생 C에게 집착이 생기고 간격이 생겼는데도 모르고 있다.

흔히 우리가 일할 때는 목적이 있다. 목적에 도달하면 기뻐하고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노력했으면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일을 하는 중에서 마음을 바로 놓고 하는 과정에서 시시각각 대법으로 자기를 대조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수련하고 결과를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할 일을 하면 정말 해내면 결과는 반드시 좋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無求而自得).”[3]

요 몇 해 우리 현지에도 많은 수련생이 ‘정체 협력 중’에서 세상을 떴다. 어떤 수련생은 자신의 원인이고 어떤 것은 우리 책임도 있다. 오늘 이 일을 말하는 취지는 교류하려는 것이지 질책이 아니다.

내가 왜 ‘정체 협력 중’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수련생에게 병업 교란이 아주 엄중하게 나타났을 때 어떤 협조인은 수련생 중에서 의논하고 이 사람의 병업 상태를 분석하고 수련생을 조율하여 광범위하게 병업 중의 수련생을 돕도록 했다. 물론 협조인의 출발점은 좋지만 안배해서 간 수련생의 심성, 경지가 다른 것을 홀시했다. 어떤 수련생은 명의상으로는 수련생을 동반하여 법 공부, 발정념하러 갔지만, 그곳에 가 법으로 병업 중의 수련생을 가늠했는데, 수련생이 눈에 차지 않아 질책하고 비꼬았다. 법 공부, 발정념할 때의 사상은 수련생의 옳지 않은 것을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가서 좋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병업 중의 수련생은 적합한 몇 사람이 가서 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수련생을 조율하여 가게 하면 한 방면으로는 일부 수련생의 정상적인 세 가지 일을 교란할 수 있어 구세력이 다른 수련생을 시험한다는 구실로 병업 중의 수련생의 고난을 크게 할 수 있다. 구세력은 그녀가 정체에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는 구세력의 계략을 반드시 간파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예전에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실제로 속인 사회에서, 오늘날에 발생된 일체 일들이 모두 대법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촉성(促成)된 것이다. 비록 구세력이 존재해도, 당신들에게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방법이 없다.”[4]

4.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보고 거꾸로 자기를 보아야 한다

한번은 큰 팀 법 공부가 끝난 후 한 수련생이 말했다. “D 수련생의 지금 상태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 법 공부할 때 구절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말을 또렷하게 하지 못하며 법을 읽다가도 잡니다. 시간이 꽤 되었습니다.” 그녀가 다 말하자 한 협조인이 앞장서서 D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말했다. 그는 여기가 법에 부합되지 않고 저기도 법에 부합되지 않는데 그에게 여러 번 언급해도 듣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련생들은 너 한 마디, 나 한 마디씩 모두 D의 부족한 점을 말했다. 방법을 대어 어떻게 D를 도울 것인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모두 자기 내심의 불쾌함을 털어놓았다.

D가 박해받아 불구가 된 후 많은 수련생이 그에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부었고 심지어 많은 돈을 썼다. 우리가 수련생을 돕는 것은 내심에 우러나와 한 것이 아닌가? 원망과 후회가 없어야 하지 않는가?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불가는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도 없으며, 조건 없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련생들에게 아주 많은 일을 해줄 수 있다.”[5] 나는 20, 30명이 있는 장소에서 대부분 사람이 이 일을 의논하면서 모두 수련생의 부족 점을 찾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주 괴로웠다. 수련은 자기를 수련하는 것인데 왜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는가?

나는 D 수련생의 상태는 다른 수련생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면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 기술 방면의 어떤 일이든 수련생들이 다 그를 찾았다. 어떤 때 D는 밤낮없이 바빴지만 그를 대신하여 분담한 수련생이 아주 적었다. 자신도 모르게 D에게 아주 강한 일하는 마음이 형성되어 D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적었고 법을 잘 배우지 못해 구세력의 교란을 받았다. 생활 방면에서 D 수련생은 먹고살기가 괜찮았고 생활을 스스로 하는 데 문제없는데도 많은 수련생이 늘 돈을 들여 그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사주고 그를 도와 집안일을 해주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를 위한 것 같지만 사실 서서히 그에게 의지하고 게으른 습관을 키워주었고 먹고 마시고 가지려는 욕망을 키워주었으며 돈에 대한 강대한 집착 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나는 수련생들의 논의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수련생들을 원망하고 밖으로 찾는 마음이 있어 나의 심리 상태가 좋지 않을 때 한 말은 평온하지 못해 수련생을 질책하는 정서가 나와 모순을 쉽게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그때 협조인이 나와 모순이 아주 커서 나는 아직 자아를 내려놓지 못해, 말하면 우리 사이 모순을 더 크게 하여 다른 수련생에게도 영향이 미칠까 봐 말이 목구멍까지 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조절했다. 아직 잘 조절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되어 수련생들은 흩어졌다. 당시 나는 지적하지 않아 이후에 아주 후회했다. 이튿날 수련생 D가 땅에 쓰러졌는데 중풍 증상이 나타나 반신을 움직이지 못했고 말을 똑똑하게 하지 못했다. 수련생이 7시 넘어 그의 집에 법 공부하러 갔을 때야 발견했다. 이후에 D 수련생은 수련생들의 적극적인 협력 도움으로 몸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됐지만, 결국 세상을 떠나 현지 조사정법에 일정한 손실을 빚었다. 상세한 정황을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교훈은 심각하다. 우리가 이런 일을 거울로 삼기 바란다.

끝으로 사부님의 한 단락 법으로 수련생들과 서로 격려하고자 한다.

“신: 제가 보기에 신(神)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더 미루지 마시지요. 사실 그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부: (혼잣말) 인간 세상 속에서 그들은 참으로 너무나 깊이 미혹되었다. 최후엔 다만 이럴 수밖에 없다. 최후에 사람마저도 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신: 사실 새로운 세계에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괜찮은 것입니다. 우주 중에서 역사에 의해 도태된 무수한 고층 생명과 비교해 보면, 이미 비할 바 없는 행운입니다.

사부: 나는 아직도 더 기다리고자 합니다. 인류를 파괴하는 더욱 미시적인 물질을 깨끗이 청리(淸理)할 때, 다시 어떠한가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필경 그들은 법을 얻고자 온 것이니까요.

신: 현재 이 한 패의 사람들을 놓고 말하면, 그들 어떤 사람이 법을 공부하러 옴은, 인생 목표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변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인식을 품고 있습니다.

사부: 이러한 사람은 신수련생이 비교적 많습니다.

신: 그들 중에는 또 그들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법의 일면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그들 자신이 법을 전부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일면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 이러한 것은 노제자 중에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

신: 이러한 문제는 이미 몹시 심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떠어떠하다고 그들이 본 것으로 반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부: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청성(淸醒)하게 하며 그들의 환경을 진정으로 수련하는 환경으로 만들어 진정한 신(神)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6]

층차가 제한되어 있으니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溶於法中)’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4] 리훙즈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

 

원문발표: 2019년 7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17/3901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