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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이성과 정신(正信)

‘4.25’ 만인 청원 목격

글/ 천샤오

[밍후이왕] 차는 천천히 앞으로 갔다. 선무는 조급하여 손에 땀을 쥘 지경이었다. 베이징에서 다년간 공공버스를 탔지만 이렇게 천천히 간다고 여긴 적이 없었고 십여 분이 마치 무한하게 연장되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이 빠지게 창밖을 바라보면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이번에 중남해 민원청원사무실에 청원하러 갔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할지 그는 몰랐지만 대법제자로서 강렬한 책임감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아침 선무는 샹산공원에서 연공할 때 연공장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적은 것을 보고 그곳에 있는 수련생에게 물어서야 톈진에서 45명의 파룬궁(法輪功)수련생이 붙잡힌 사실을 알았다. 정부는 현지 수련생에게 베이징에 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소식은 단번에 톈진에서 베이징에 전해졌다. 많은 수련생이 즉시 청원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파룬궁은 1992년에 사회에 전해지기 시작한 후 병 치료 효과가 탁월하고 사람의 도덕성이 향상되어 짧은 7년 사이에 1억 명이 수련했다. 파룬궁수련은 사회에 백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은 없었지만 중국공산당의 공포감과 위기감을 가진 천성 때문에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1996년부터 중국공산당은 암암리에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이르러 파룬궁 서적은 중국에서 벌써 출판 금지되었고 많은 파룬궁 연공장도 경찰의 교란을 받았다. 이번에 톈진 수련생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러 가는 것도 정부에 파룬궁을 알릴 겸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요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수련생이 붙잡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가족이 잡힌 것 같았습니다. 나는 대법에 공정한 말을 해야 할 책임을 느꼈습니다.” 선무는 그때를 회고하며 말했다. 그와 가족은 즉시 중남해 민원청원사무실에 가서 대법제자 청원 행렬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차는 간신히 푸우 가에 이르렀다. 거리 곳곳에 모두 대법제자가 보였다. 정연하게 도로 양측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이렇게 떠들썩한 베이징에서, 공공버스를 탈 때 아무도 줄을 서지 않고 비집고 타는 대도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우 질서 있고 조용하게 그곳에 서 있다니?’ 그 평화로움에 그는 감동했다. 그러나 이 선량한 수련인들을 보면서 선무는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스쳐지나갔다. 89년 톈안먼에서 청원하러 간 학생들을 대학살한 장면이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만일……” 선무는 몸을 돌려 함께 청원하러 온 가족에게 말했다. “탄압이나 총을 쏘는 일이 발생하면 나를 관계하지 말고 얼른 현장을 떠나오.”

생소함에서 기쁨으로

하이디는 그날 아침 연공장에 가지 않았다. 아침 6시 조금 넘어 집에서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동료가 무선호출기로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톈진 수련생이 붙잡혀 수련생들은 민원청원사무실에 가서 청원할 수 있습니다.’

하이디는 얼른 문을 나서 자전거를 타고 민원청원사무실로 향했다. 민원청원사무실에 가보지 못한 그녀는 가면서 길을 물었다. 약 30-40분 후에 푸우 가에 도착했다. 그땐 이미 7시가 넘었는데 길거리에는 벌써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수련생들은 오고가는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맹인 전용도로를 비켜섰다. 먼 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람들이 파룬궁수련생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모두 청원하러 온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하이디는 웃었다. “그때 나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앞으로 갔지만 어디로 갈지 몰랐습니다. 후에 나는 길가에 서서 책을 들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파룬궁수련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일부 단체 연공에 참여했지만 매번 몇 백 명이었고 가장 많았을 때에도 천명을 초과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많은 파룬궁수련생을 보고 하이디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다.

민원청원사무실에 오기 전에 그녀는 속으로 짐작이 가지 않았다. 민원청원사무실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일하기 시작한 그녀에게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올지? 가서 뭘 해야 할지? 내가 관련 담당자를 찾아가 정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다른 사람과 함께 할지? 그땐 머리에 아무런 개념도 없었습니다.” 하이디는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수련생을 봤을 때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일찍이 외지에서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으니 문제는 빨리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하이디는 현지의 아는 수련생을 만나 그들과 함께 서서 조용히 기다리면서 이번 청원이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했다.

대법에서 새롭게 태어난 생명

캉니는 그때 파룬궁 보도원이었다. 매일 아침 4시경에 카세트를 들고 연공장에 가서 수련생들과 함께 연공했다. 그때 연공할 때 그녀는 다른 수련생에게 청원하러 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6시 넘어 연공을 다 하고 그녀는 집에 돌아가 카세트를 두고 아직 잠자고 있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과 남편에게 야채 사러 간다는 쪽지를 남겨두고 조용히 문을 나섰다.

민원청원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캉니는 많은 경찰이 푸우가와 창안가 교차로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많은 외지 수련생들도 경찰에게 길을 물었다. 경찰은 수련생을 중난하이 서쪽의 푸우가와 북쪽의 원진가에 데리고 가 서있게 했다. 그곳은 수련생들이 꽉 차 있어 중난하이를 사이 둔 거리에서도 서로 보였다. 캉니는 마침 바깥쪽에 서 있었는데 후에 주룽지가 나와 수련생과 얘기 나눈 그 문에 서 있었다.

그때 캉니는 파룬궁을 수련한지 갓 1년밖에 되지 않았다. 30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수련하기 전에 온몸에 병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기에 성격도 좋지 않아 늘 집에서 화를 냈다. 그러나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병은 아주 빨리 다 나았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병고가 사라져 그녀는 기분도 좋아졌고 종일 즐겁게 지냈다. 몸이 약해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것 같던 그녀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감당하였고 남편을 위해 생활의 과중한 일도 할 수 있었다.

톈진 수련생이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 캉니는 매우 조급했다. 정부에 대한 믿음을 품고 그녀는 아침 일찍 중난하이에 가서 청원에 참가했다.

평온하고 이성적인 단체

19년 전, 선무, 하이디와 캉니는 약속이나 한 듯 1999년 4월 25일 당일 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중난하이에 가서 평화청원을 하여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쟁취하려 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은 보기에 평온했던 하루가 중국 대지에 피비린내 나는 박해 전의 마지막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 중국 근대사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청원의 증인으로 되었다.

캉니는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날 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조용히 도로에 서 있었습니다. 구호도 없었고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질서 유지하러 왔던 경찰은 원래 대적을 만나기나 한 듯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느슨해졌습니다. 도로에는 2-3명씩 서서 담배를 피우면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버린 담배꽁초마저 수련생들이 주워 쓰리기통에 버렸습니다.”

속세에서의 수련생들의 평화와 이성은 현장에 있는 경찰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원에 참가한 수련생들도 감동과 격려를 받았다.

그해 광경을 생각하며 선무는 말했다. “나는 온 종일 앞줄에 서있었기에 가끔 나에게 물을 마시겠는지? 뭐를 먹겠는지? 묻는 수련생이 늘 있었습니다. 누가 일이 있어 잠시 떠나면 뒤에 있던 사람이 바로 앞으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었습니다. 경찰이 앞에 다가오면 대법제자들은 그들과 인사하고 우리의 요구를 알려주어 당직 경찰들은 우리를 이해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낯설면서도 매우 친절한 수련생들을 보면서 나는 이 단체가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들 중의 일원이 되어 자랑스러웠습니다.”고 하이디는 말했다.

아침에 총총히 청원하러 온 캉니는 지갑을 집에 두고 몸에 지하철 교통카드만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그날 온 하루를 그곳에 서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힘든 줄 몰랐다. “오후 6시가 되자 우리 대열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주머니가 주머니에서 몇 십 전, 몇 전짜리 잔돈을 꺼내어 아는 우리 몇 사람에게 제일 싼 아이스크림을 1인당 하나씩 사주었습니다. 모두 그녀가 평소 아이스크림을 판돈입니다. 이 일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땐 무엇이 정념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이 평온하고 매우 상서로웠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 심정을 회고하며 캉니는 좀 울먹였다.

수련생 대표는 하루 동안 정부와 교섭하여 일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톈진정부는 무조건 붙잡은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하고 아울러 중앙 정부도 시민들의 연공 활동을 간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좋은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서 있던 파룬궁수련생들은 조용히 흩어졌다.

캉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집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청원하러 간 사실을 알고 종일 나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내가 평안하게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그는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길 맞은쪽의 CCTV

청원하러 간 날 하이디, 캉니와 선무는 모두 대오의 맨 바깥쪽에 서 있었다. 하이디는 맞은편 창문에 CCTV와 카메라가 수련생 대오를 사진 찍고 촬영하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지나가는 차들도 자주 있었는데 차 안에 있는 사람이 그들을 촬영했다.

“그때 나는 나에게 두렵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얼굴이 찍혔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89년 6.4가 생각났고 공산당에게 사살된 학생이 생각났습니다. 요행히 살아남은 학생들이 돌아갔을 때 신발은 피에 젖어있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이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았습니다. 사실 속으로 선택해야 했습니다.”고 하이디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려하고 완전히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평화적인 우리 단체는 잘못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톈진 수련생이 붙잡히고 매체에서 파룬궁을 모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우리가 청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뒷줄에 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앞에 섰습니다.” 이번 사건을 겪은 뒤 3개월 후 박해가 정말 발생했지만 하이디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 그녀는 계속 수련하는 것이 본인이 선택하여 걸어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의 증인

‘4.25’ 만 명 청원이 보기에는 원만하게 끝난 것 같았지만 그 다음날 위험과 압력이 은밀하게 청원에 참여했던 모든 수련생에게 다가왔다.

“이튿날 직장 상사가 우리를 찾아와 이야기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청원하러 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우리 직장에는 누가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매체에서는 합법적이라고 말하면서 전혀 탄압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상 감시가 점점 심했습니다. 사복경찰이 연공장에 점점 많이 와서 우리를 감시했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전형적인 공산당이 때를 기다렸다가 보복한 겁니다. ‘4.25’ 평화청원은 해결됐지만 결국 공산당과 장쩌민은 집요하게 탄압하기로 결정했습니다.”고 하이디는 말했다.

선무는 청원에 참가한 후 수련의 엄숙성을 더 의식했다. 7월 20일 박해가 발생한 후 청원에 참가한 것도 학교에서 그를 박해한 구실이 되었다. 그때 중국과학원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그는 (학위 논문)디펜스 성적이 우수했지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중국과학원은 그에게 박사학위를 발급하지 않아 그 후 그의 생활과 일자리에 매우 큰 어려움을 주었다.

박사를 졸업한 후 선무는 고향으로 돌아가 현지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되어 출근했다. 신혼생활을 얼마 하지 않았을 때 아내가 진상 편지를 부치다가 경찰에게 잡혀 후에 노동교양소에서 경찰의 고문을 받아 사망했다. 또한 선무 본인도 학생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었고 집에서 7년 연금됐다. 후에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오게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여러 차례 전전하다가 중부 미주리 주(州)의 세인트루이스에 자리 잡았다.

하이디도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을 떠나 외국에 유학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일자리 변동으로 그녀는 미국에서 여러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남편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 왔다.

출국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캉니는 박해가 발생한 후 베이징에서 계속 생활했다. 매일 붙잡히고 고문 받을 위험이 있었지만 그녀는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9년 캉니는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가족에게 연루될까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유리걸식했다. 금방 대학입학 시험을 마친 그녀 딸은 어머니가 박해 받아 대학에 다닐 수 없어 마지막에 출국하여 유학을 선택했다. 캉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출국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여 최선을 다해야 했다.

19년 전 서로 모르던 그들은 용기와 정신(正信)으로 본인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중난하이 만 명 청원에 참가했다. 몇 년 뒤 운명의 안배는 고향과 멀리 떨어진 세인트루이스에서 다시 만나 함께 현지 시민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박해를 저지하게 됐다.

그때 청원하러 간 날의 이모저모를 돌이켜 보며 그들은 모두 감개무량했다.

“역사 의의가 있는 시각은 우리 일생에 아마도 한 번의 기회밖에 없을 겁니다. ‘4.25’ 평화청원에 참가한 것은 나의 생명에 이런 역사 시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9년의 반박해 수련에서 나는 ‘4.25’ 평화청원은 역사가 중국공산당에게 준 선량함을 선택할 기회였는데 공산당은 사악한 본질이 있기에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에 대한 박해를 선택했습니다.” 선무는 돌이켜보며 말했다.

“대법제자들은 다년간 공산당의 거짓말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사람들은 점차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박해 받은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역사무대에서 도태될 날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4.25’ 청원을 생각할 때마다 서로 모르는 대법제자들이 육친을 만난 것처럼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돕던 정경이 생각납니다. 박해가 매우 잔혹하긴 했지만 나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대법제자가 나와 함께 수련을 견지하고 반박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캉니는 말했다. “그때 그 환경에서 대법 수련인이 보여준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고상한 경지, 정의와 양심을 수호한 그런 도덕적 용기는 나에게 매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과거 십여 년 속에서 ‘4.25’ 청원을 생각하면 매우 감개무량합니다. 대법제자 이곳은 정토입니다.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나는 견정하게 지금까지 수련하고 있습니다.”

 

원문발표: 2018년 4월 21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4.25’ 청원
원문발표: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4/21/3643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