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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正信), 정오(正悟), 실수(實修)하면 병업 박해는 당신에게 얼씬도 못할 것

글/ 다칭 대법제자 징수이(淨水)

[밍후이왕] 몇 년간 수련 가운데서 나는 각종 방면에서 수련생이 수련 중 시련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불법 체포, 수감과 소란 방면의 박해뿐만이 아니라 또 병업 방면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정법시기에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발휘할 것이 필요할 때, 수련생이 박해당하는 것은 사람 구하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자신이 보고 접촉한 수련생의 상황을 써내어 수련생과 교류하려 한다. 각 지역 수련생, 무릇 병업 박해를 당하는 이는 속으로는 적게 많게 모두 병업 가상을 진상으로 여긴다. 아래에 나는 몇 가지 방면으로 자신의 천박한 수련 체득과 깨달은 이치를 수련생과 교류하려 하는데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서는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일사일념을 지켜야

병업이 올 때 보통 증상과 감각이 속인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수련인으로서 몸에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어떻게 보는 것과 판단은 아주 중요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1] 그렇다면 제일 첫 번째 염두가 아주 관건적으로서 마땅히 파악해야 할 곳이다. 신체적 병업 방면의 반응이 있게 되면 사악이 박해할 요소도 있게 된다. 수련인으로서 순식간에 생기는 몸에 대한 습격과 교란을 파악하고 우선은 ‘나는 괜찮다, 수련인은 병이 없다’란 일념을 지켜야 한다. 만약 당신이 주저하거나 한 가닥 잡념이라도 섞어 넣기만 하면 박해를 연속하거나 시간을 끄는 등 일을 빚어낼 것이다. 3년 전 어느 날 아침, 내가 막 일어나 연공하려고 발을 바닥에 닿자마자 현기증이 나면서 하늘땅이 빙빙 돌았다. 나는 이것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님을 의식했다. 나는 순간에 침대를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대법제자다, 나는 사부님께서 관여하시는데 너는 자격이 없다.’ 바로 몇 초 사이에 나았고 약 보름 후에 몇 번 이런 반응이 나타났지만 모두 지나갔다.

2. 확고한 신사신법(信師信法)

수련인이 수련 가운데서 나타나는 각 방면의 상태 역시 수련인에 대한 시련이며, 그 중에서도 법에 대한 자신의 신사신법 정도를 체현해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수련 전에는 안경을 썼는데 한 쪽 눈은 근시이고, 한 쪽 눈은 난시였다. 내가 수련한지 약 2년쯤 어느 날, 나는 길가 맨홀 시멘트 덮개 위에 서서 차를 기다렸다. 내가 머리를 숙이는 순간 안경이 대번에 시멘트 뚜껑 위로 떨어지면서 안경알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안경을 쓰지 말라고 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후에도 여전히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약 2년 남짓한 동안은 모두 이런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안경을 쓰지 말라고 하시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나의 눈이 나을 것이라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내 염두는 눈이 나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사부님께서는 제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실 뿐이며 제자가 믿는가 안 믿는가에 대한 검증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다시 안경을 쓰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2년 후, 내 눈은 서서히 정상으로 됐다. 작은 ‘전법륜’ 책을 볼 때 팔을 쭉 편 거리에서도 글자가 아주 잘 보였다. 아무리 작은 글자도 나는 다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나는 기사 수련생(안경을 씀)과 함께 국도에서 차를 몰고 갔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앞에 차가 어느 차선에 있어요?”(약 1.5킬로미터 거리) 나는 우리와 동일한 차선에 있다고 대답했다. “무슨 차예요?” 큰 화물차이고 안전표지가 빛을 반짝이고 있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빨리 몰아 앞차에 접근 한 후 그가 말했다. “아저씨, 눈이 참 좋으시네요, 이렇게 먼 곳도 다 똑똑히 보시다니요.”

지금에 와서도 나의 눈은 먼 거리나 가까운 거리나 모두 정상 시력이다. 그런데 나와 거의 한 해에 안경을 벗어버린 노인 여 수련생은 안경을 벗어버린 한 동안 보이지 않아 안경을 다시 맞추었다고 했다. 10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이 수련생은 여전히 안경을 끼고 있다.

믿음이 먼저고 보는 것이 나중이라. 만약 당신이 나는 잘 보인 다음에 가서야 안경을 벗겠다고 하면 일념지차라, 눈이 정상으로 회복될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시간은 신이며, 매 한 수련인을 시험한다. 이러한 시간 앞에서 어떻게 바르게 믿고 바르게 깨닫는지 시험한다. 수련이라 어떤 때는 희망이 없는 것 같고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건 아마 승화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오직 법에서 정신(正信), 정오(正悟), 실수(實修)하기만 하면 도달하려는 목표를 볼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다.

3.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다

나는 많은 수련생이 시련 속에서 거의 모두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있고 또 가족이 수련생을 보살피는 것도 있었다. 어떤 수련생은 연공도 별로 하지 않고 식사마저 남의 도움을 받는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드러나 보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主元神(주왠선), 副元神(푸왠선) 외에 사람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각종 관념, 선악 양성(兩性)이 있는데, 또 외래 요소도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의 행위 표현, 그것이야말로 이 사람의 진실한 체현이다.”[2] 병업 가상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자신을 대하는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는 매번 병업이 나타날 때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분발한다. 네가 나를 연공하지 못하게 하면 나는 더 많이 연공하고, 네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나는 곧 외출해 뭘 해야 하면 무엇을 한다. 네가 나를 괴롭게 하면 나는 너를 마음에 두지 않고 수시로 발정념해 제거해 버리겠다, 네가 나를 잠자지 못하게 하면 나는 더 자고 발정념으로 교란을 제거하겠다. 매번 나는 모두 쾌속으로 돌파했다. 반 날, 몇 시간, 몇 분이면 지나갔다. 고통과 어쩔 수 없다는 표정마저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의 표현되는 것 역시 당신 사상 속 상태의 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될수록 시간을 끌지 않았고, 더욱 많은 정념으로는, “내 신체의 세포는 이제 고에너지 물질로 대체됐고, 삼계 내의 어떤 물질도 나에 대해서는 작용을 일지 못한다. 나에게는 사부님 관할이 있으니 너는 자격이 없다!” 그러면 아주 재빨리 정상으로 회복된다. 수련인은 병이 없다. 사부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당신이 ‘병’이란 이 글자를 꺼내기만 해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1]

한 번은 한 수련생의 신체가 박해당해 정공할 때 가부좌를 가장 길어야 40분을 더 초과하지 못했고 아주 오랫동안 한 시간을 돌파하지 못했다. 나는 40분을 돌파하면 안 되겠는지 물었더니 너무 괴로워 안 되겠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을 것이다.”[3]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가부좌하는 게 머리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 괴로운가? 그녀는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대법의 위력 하에 이 수련생은 가부좌를 견지해 사흘 만에 한 시간을 돌파했다.

18년 동안의 비바람 속에서 수련생들이 오늘까지 걸어온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수련생은 수련 가운데서 사람마음으로 수련을 대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해 동안 그러했다. 예를 들면 어떤 수련생은 자기 아이가 몇 년 되도록 배우자를 찾지 못해 아주 걱정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 아이가 배우자를 찾을 수 없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점을 쳐 달라고 했다. 어떤 이는 신체가 심한 박해를 당할 때 사전에 수의를 해놓거나 유서를 써놓는다. 박해가 발생할 때 우선 생각하는 것이 사부님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거나 120 구급차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우리집에 무슨 유전병이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수련 전에 남이 나에게 점을 쳐 주었는데 어느 해는 위험하다고 했다는 등,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나중에는 박해를 초래하게 된다.

또 속인의 연속극, 소설을 보거나 광장에 가서 광장무를 추기도 한다. 또 가족 및 다른 수련생과 장기간 모순에 처해 있거나 가족 및 수련생을 원망하고 미워한다.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보지 않는다. 수련 중에서 자신 행위에 엄숙하지 못하고 돈과 물건을 쓰는데 엄숙하지 못하다. 어떤 수련생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생하려 하지 않으며 연공을 수시로 빼먹는다. 생활 속에서 건강식품을 중시하고 집안 온도가 조금만 낮아도 전기담요, 더운 물 주머니를 쓰며, 정공할 때면 솜이불을 쓰는 등이다. 어떤 수련생은 떠도는 소문을 듣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공간의 어떤 정보를 환청으로 듣고는 교란을 당한다.

만약 집에 구멍이 하나 생겼다면 당신은 바람과 비가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일시적인 누락과 집착은 모두 박해를 불러오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당신에게 구멍이 아주 많은데 당신이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는다면 바람과 비는 아무 때건 당신을 침식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박해당하게 하고 싶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련 중에서 장시간 자기를 수련할 수 없고 길을 바르게 걷지 않는다면, 사부님인들 어떻게 하시겠는가? 사부님께서 그가 나의 제자이니 뒷거래를 하겠다고 하시겠는가? 특수화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주의 이치이고 무수한 신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일사일념마저 다 놓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련으로부터 말하면 우리는 오직 안으로 찾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바르게 닦아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버리고 우리를 잘 수련하고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으면, 박해는 자연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주동적인 것으로서 박해의 근본을 진정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밖에 또 어떤 수련생은 비록 수련상에서 뚜렷한 잘못은 없지만 늘 마음에 부담을 지고 있고 늘 후회한다. 심지어 장기간 자신을 책망하면서 자신에게 부정적인 그림자를 씌워 준다. 결국 수련에 게을러지고 몸은 영향을 받게 되어 역시 육신 한 방면에 박해를 불러온다.

또 어떤 수련생은 고난을 너무 크게 보는데 이 역시 사람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한 방면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오늘 잘못했지만 내일은 잘할 수 있다.’ 수련인은 더구나 소침해서는 안 된다. 내가 오늘은 잘하지 못했지만 내일은 잘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마땅히 나에 대한 법의 표준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부담을 갖지 말고 잘못을 했으면 다시 잘하라. 이전의 일은 생각지도 말고 이후에 어떻게 잘할 것인가만 생각하여 당신 자신과 중생을 위해 진정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4]

수련에는 작은 일이란 없다. 제한된 시간에 마땅히 어떻게 잘할 것인가는 입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잘해야 한다. 각 층차에서 법의 우리에 대한 각각의 요구에 진정으로 도달하고, 정신, 정오, 정진실수 하면 박해는 당신에게 얼씬거리지 못할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5-2005년 맨해튼 국제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폭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순회설법’

 

원문발표: 2018년 1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3/3591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