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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내 수련의 길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법을 얻다

나와 고등학교 동창 A는 오랜 친구 사이다. 결혼 후, 그녀는 한동안 건강이 아주 나빴고 우리 남편회사 숙소에서 살았다. 허약할 때에는 현관에서 창문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다.

한 동료가 그녀에게 파룬궁을 소개해주었고 수련 후 그녀는 신체적 변화가 아주 컸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전법륜’ 한 권을 주면서 집에 가서 보라고 했다. 안에 함의가 아주 깊고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배운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법을 얻게 됐는데 때는 1996년, 혹은 1997년 여름이었다.

그때 법의 소중함을 몰랐고 정진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법륜’은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책이고 내가 좋은 사람이기에 당연히 이 책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A동창은 늘 나보고 그녀와 함께 가부좌를 연습하고 함께 법공부를 하자고 했다. 처음에 나는 자신이 파룬따파를 배우지 못할 것 같았다. 이유는 A동창은 결가부좌를 30분 하지만 나는 반가부좌도 다리 한쪽이 높게 쳐들렸기 때문이다. 다리가 너무 아파 30분도 견지하기도 힘들었다. 이럴 때마다 A는 늘 나를 격려해주었다. “천천히 해.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그녀는 나를 이끌고 여러 법공부 팀에 가서 단체 법공부를 하고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배웠다. 나는 신난 새처럼 그녀를 따라 여기저기 다녔다. 출근하고 잠자며 밥 먹는 시간 외 대부분은 모두 그녀와 함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이튿날 일찍 일어난 어머니는 신기하게 집 근처에서 연공장을 찾으셨다. 지금에야 사부님 법신이 연공장을 찾도록 어머니를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주 빨리 우리는 또 근처에서 법공부 팀을 찾았다. 이렇게 나와 어머니는 비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곧 이 법공부 팀에서 공부했고, 주말에는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듣거나 설법 동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어쩔 수 없이 중단됐다.

처음 박해 받았을 때 정념으로 소굴을 뛰쳐나오다

2001년 하반기, 수련생은 자료를 나눠주다 불법 체포됐고 나도 연루됐다. 처음으로 인신자유를 잃었고 감방, 철문, 철창을 보면서 늘 가슴이 떨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막연하기만 했다.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심문 당하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때 울리는 족쇄 소리를 들으면 당시 두려운 마음이 강한 나로서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시 한 수련생이 나와 함께 이 임시 감방에 갇혔는데 조끼를 입으려 하지 않아 여러 번 고문을 당했고 심하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이 수련생 언니는 여전히 확고히 조끼를 입지 않았고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크게 놀랐다. 이후에 수련생 언니는 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이때부터 나에게 정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두려움도 적어졌다. 나도 조끼를 입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얼마 뒤, 나는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고 여기에는 수련생 네 명이 있었다. 내가 가기 전에 수련생들은 감방에서 정상적인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했다. 가끔 바람을 쐬게 하는데 수련생이 밖에서 바람을 쐴 때 연공을 했다가 심하게 맞은 적도 있었다. 내가 간 후, 감방 우두머리는 나보고 예전에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고 나는 외국 기업에서 영어번역을 했다고 답했다. 듣고서 그녀는 너무 기뻐했다. 2년 넘게 구치소에 갇혀있으면서 그녀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시간을 때울 겸 나보고 영어를 가르쳐 달라면서 친절하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열심히 가르쳤고 그녀 역시 열심히 배웠다. 영어 발음은 배우기 쉽지 않지만 나는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한 번 또 한 번 가르쳐주었다. 차츰, 그녀는 나와 수련생에 대한 태도를 개변해 예전처럼 그렇게 무섭게 대하지 않았다. 수련생을 예의 바르게 대했고 바람을 쐴 때 우리가 밖에서 동공을 연마하면 따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되도록 나와 수련생 안전을 보호해주었다. 이후에 나는 사부님의 ‘홍음’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고 그녀 역시 열심히 배웠다. 우리는 늘 사부님 ‘홍음’을 함께 외웠는데 감방에서 자주 우리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주 월요일이 되면 구치소에서는 늘 방을 들췄다. 그때 그녀는 나를 도와 사부님의 경문과 펜, 종이를 숨겨두고 들추러 온 사람이 떠나면 다시 되돌려주었다. 이후에 그녀는 다른 감방에 갇힌 수련생들이 적은 경문을 나에게 갖다 주었다. 보배를 얻은 것처럼 나는 모든 시간을 다그쳐 사부님 경문을 외웠다. ‘논어’, ‘진수(眞修)’, ‘깨달음(悟)’, ‘견정(堅定)’, ‘사부를 모시다(拜師)’ 등 ‘정진요지’의 경문을 몇 십 편 외우고, 이후에 잇따라 신경문 ‘가을바람 서늘하구나(秋風涼)’, ‘법정인간(法正人間) 예언’, ‘홍음’, ‘대법(大法)은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다’, ‘정법시기 대법제자’, ‘무엇이 공능(功能)인가’ 등 경문을 외웠다.

구치소에서는 종이를 얻기 아주 힘들기에 작은 종잇조각마저 아주 소중하다. ‘길(路)’ 이 경문은 당시 수련생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치약 통에 적어 전해준 것이다. 수련생이 치약 통에 쓴 비뚤비뚤한 글씨를 보면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이 소중한 경문을 외워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고 날마다 견지해 조금이라도 더 외웠다. 또한 발정념도 견지했는데 법을 외울수록 차츰 정념이 생기고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또한 밖에 있을 때 시간을 아껴 법을 외우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됐다. 사악에게 심문을 받을 때 빼고는 모든 시간을 아껴 법공부, 발정념을 했고 늘 수련생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같이 법을 외웠다.

어느 날, 한 수련생이 심문 받고 돌아온 후 우리 수련생 몇 명을 불러다 단식하는 것으로 박해에 항의하자고 했다. 한 명만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고 나는 참가하는데 동의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진정하게 법리에서 깨닫지는 못했다. 단체로 단식한 후, 즉시 대법제자가 없는 감방으로 옮겨졌다. 다른 감방에 간 후 나와 수련생은 모두 밥을 먹었지만 단식을 제의한 수련생만이 여전히 견지했다.

사악한 경찰은 이 수련생에 대해 음식물 주입을 강행했다. 매번 수련생이 끌려 나가 박해 받을 때 모두 내 감방을 지났는데 커튼 틈새로 수련생을 보면서 가슴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고 너무나 두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후에 나는 다시 단식하는 수련생이 있는 감방으로 옮겨졌고 이때 날마다 대량으로 사부님의 경문, ‘홍음’ 등을 외웠다. 우리는 법리에서 서로 교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련생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저도 단식할 겁니다!” 나는 묵묵히 단식했고 여섯째 되던 날 두 다리는 설 힘조차 없어 일어나지 못했다. 사악은 알게 된 후 밥을 먹으라고 협박했지만 나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끼손가락 두께만한 고무호스로 나에게 아주 짠 옥수수 죽을 강제로 주입했다. 식도가 뚫려 얼굴, 몸, 땅바닥에 온통 피범벅이었지만 교도소 의사는 여전히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단식을 계속함에 따라 내 몸은 갈수록 허약해졌다. 딱딱한 판자 침대에 누워서 고통에 시달렸고 늘 혼미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깨어나기만 하면 속으로 법을 외우고 발정념을 했다. 단식 9일 째, 나의 모든 생리 지표는 극에 달했고 눈을 뜨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 나는 감옥에서 관리하는 병원에 옮겨져 박해를 받았는데 떠나기 전, 감옥 우두머리는 내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시와 영어를 외우면서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온 감방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도와 신체를 닦아주었고 다들 목메어 울면서 묵묵히 나를 배웅해주었다.

감옥에서 관리하는 병원에 온 후, 의사는 나에게 한숨만 붙어있고 수시로 죽을 수 있기에 얼른 병보석을 해주라고 했다. 박해 받아 체중이 20~25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나를 보면서 감옥 여경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당직을 설 때 조금 지나면 나를 보러 왔는데 이불을 잘 덮어주고 조심스럽게 보살펴주면서 죽을까 봐 걱정했다. 우리 성(省) 감옥 병원에는 여자 감방이 두 군데 있는데 가장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여자 감방 옆에는 줄줄이 남자 감방이었다. 내가 여러 의학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잡부들은 들것으로 나를 들어 올리고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남자 감방을 지날 때 남자 수련생이 혼신의 힘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하오!” 이 소리는 오래도록 병원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가는 내내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비록 눈뜨고 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지만 대법제자의 마음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이 남자 수련생의 목소리는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감옥 병원에 간지 나흘째 되는 날, 병원 서기와 원장은 나를 보러 감방에 왔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온화하게 말했다. “○○, 당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법제자는 대단하고 파룬궁도 대단합니다. 당신을 집에 보내려고 우리가 다그쳐 수속을 하고 있으니 꼭 몸조심하세요!” 이렇게 단식과 단수한지 12일 만에 나는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웠던 자료점 시절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역 정법위원회와 ‘610(파룬궁 박해 전문조직)’요원들이 우리집에 찾아왔다. 내 신체가 거의 회복된 것을 보고 나보고 신앙을 포기하라고 협박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또 며칠 뒤, 친척의 부탁으로 아버지와 함께 은행에 환율을 보러 갔다가 돌아올 때 경찰차 한 대가 우리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더니 급히 우리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간 후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지혜롭게 피했고 아버지가 가서 알아보았다. 확실히 나를 붙잡으러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 몇 십 위안을 나에게 주었고 그때 나는 얇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하늘 가득히 거위 털처럼 흩날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꼭 몸조심하시고 저를 걱정하지 마세요.” 그 후 나는 수련생을 찾아갔다.

떠돌아다니다 나는 수련생 도움으로 성내 다른 소도시로 갔고 거기에서 현지 수련생과 함께 자료점을 세웠다.

자료점 운영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때, 나는 늘 오전에는 여기에서 자료점 일을 하다 오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 가는 것이 이미 흔한 일로 돼버렸다. 또한 수련생이 방금 세 맡을 돈을 가져왔지만 이튿날 이 수련생이 붙잡혀 자료점 자금이 극히 부족하게 된 등 어려움이 많았다.

안전 때문에 수련생은 나보고 혼자 자료점 일을 하라고 했다. 몇 차례 곡절을 겪어서야 자료점은 겨우 안정을 찾아갔다.

자료점이 방금 안정되기 시작했을 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바지를 입으려고 보니 바지에 곳곳마다 풀벌레가 있었다. 몸뚱이 양쪽이 아주 촘촘하고 두 줄 다리를 가진 흔한 북방 벌레였다. 평소 집에서 응석받이로 자랐기에 나는 파리, 모기도 감히 때리지 못했고 특히 벌레를 두려워했다. 텅 빈 집을 바라보면서 모든 두려움, 억울함, 불안, 고독, 괴로움, 무력함, 말 못할 답답함이 수문이 열린 홍수처럼 단번에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워 통곡하며 울었는데 눈물에 옷이 흠뻑 젖었다.

울고 나서 나는 이 일체가 무엇을 위해서인지 생각해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릴 때 사부님 경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대법제자는 위대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수련하는 것은 우주의 근본대법이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당신들이 정념(正念)으로 대법(大法)을 실증했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당신들이 거대한 난(難) 속에서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 사부님 법상을 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야.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고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어려움도 내 수련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어!”

눈물을 닦은 후 바짓가랑이를 잡고 힘껏 털었다. 모든 벌레를 다 털어낸 후 쓸어서 화장실 변기에 넣은 다음 연공하고 법공부하며 자료를 만들었다.

수련생은 날마다 내 자료점에 한 번 왔다. 하나는 날 보러 오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만든 자료를 갖고 가 배포하도록 현지 수련생에게 나눠주었다. 가끔 수련생은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는데 늘 하는 말이 또 어느 자료점에 일이 생겨 수련생들이 사용할 대법자료가 엄청 부족하니 좀 더 만들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생활수준을 최저로 줄였고 날마다 성심껏 자료를 만들었다. 거의 휴식하지 못했고 수련생이 급히 필요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가끔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 일하기도 했다. 그 후 여전히 낮에 밤을 이어 일했는데 이렇게 해도 수련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2002년 초봄, 사악의 광적인 박해 때문에 곳곳마다 적색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창춘 대법제자가 TV에 진상 내용을 삽입하고 사부님께서 경문을 발표하신 후 국내 곳곳마다 대법제자가 TV로 대법진상 영상을 삽입했다. 극악무도한 장쩌민은 대법제자에게 총을 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느 날, 수련생은 사진 몇 장을 갖고 와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우리 성의 모시 대법제자가 TV에 진상 내용을 삽입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그의 다리에 대고 총을 두 번 쏜 것이었다. 다행이 수련생은 탈출했다. 대법의 신기함에 놀랐고 피로 얼룩진 수련생 옷과 총알 사진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법제자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사무아(無私無我)하게 법을 실증하는, 세상을 놀라게 한 장거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 자료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대법제자가 되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수 있어 너무 영광스러웠고 긍지를 느꼈다.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에게 대량의 진상자료가 필요했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 또 여자 수련생 두 명이 와서 함께 진상자료를 만들었다. 우리는 밤낮을 이어가며 대량의 빅사이즈 나일론 비단 현수막, 정교한 스티커와 다른 진상자료들을 만들었다. 현지 수련생들이 제때에 이런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매달았기에 사악은 공포에 떨었고 현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에 자료점 협조인이 미행당해 나와 수련생은 다시 불법적으로 납치됐고 타지 구치소에 갇혔다.

구치소에서 우리 둘은 사악의 박해에 협조하지 않았고 한 글자도 입 밖에 털어놓지 않았다. 감방에서 우리 둘은 사형수에게 폭행당했고 둘 다 단식하며 항의했다. 이후에 둘 다 목숨이 위태로워 병원으로 보내져 구급 치료를 받았고 나는 다시 한 번 풀려났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와 함께 단식했던 수련생은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이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을 뜨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타지에서 온 수련생(나를 가리킴)은 어떻게 됐나요?”였다.

이듬해, 나는 재차 박해 받아 성 여자감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또 한 수련생이 이렇게 떠나갔고 나는 목이 메어 울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는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고 나를 격려해줄 것이다.

신사신법하면 감옥에 갇혀도 길을 잃지 않는다

2003년,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다 나는 또 박해를 받았다. 억울하게 3년 징역 판결을 받고 성 여자감옥에 갇혔다. 극도로 어두운 사악의 소굴에서 나와 수련생들은 수시로 잔인한 박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대법제자라면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기에 두렵지 않다.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았기에 나와 수련생은 늘 다른 형식의 체벌과 능욕을 당했고, 항상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가족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극히 사악한 환경에서 대법제자의 정념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한 번, 교도관은 형사범을 시켜 나에게 지극히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인 ‘버드나무 뿌리 뒤얽히기(柳樹盤根)’을 내렸다. 장기간 묶어두고 얼음같이 찬 시멘트 바닥에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나는 이 형벌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발정념하고 법을 외우는 일이었다. 동시에 ‘사부님, 저를 도와 모든 불편함과 고통을 전부 가해자한테 넘겨주세요’라는 일념을 내보냈다. 나는 한동안 지나면 큰 소리로 “이리 오너라!”라고 외쳤다. 몇 번 괴롭히더니 수감자들도 어쩔 방법이 없어 나를 풀어주었다. 단단히 졸라맸던 손목, 팔의 흔적도 금세 사라졌지만 박해자들은 한 주 동안 사지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시큰시큰 쑤시고 아파했다.

어느 한 번, 전국 공안계통에서 나를 감금한 성 여자감옥을 검사하러 왔다. 대법제자 한 명을 차출해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마침 내가 뽑혔다. 나는 바오자(包夾, 감옥 측에서 파룬궁수련생을 전문적으로 감시하고 박해하기 위해 배치한 형사범)의 대동 하에 교도관 사무실에 왔다. 그들은 나보고 파룬궁 수련생이 전향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는 말했다. “파룬따파는 마음을 닦고 선을 지향하는 고덕대법(高德大法)입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디로 전향하겠어요? 대법제자는 전향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룬따파는 좋고, 진선인(眞善忍)은 좋습니다!” 몇 분 만에 그들을 나를 돌려보냈다. 감옥 구역에서 파룬궁 박해를 주관한 모 대장은 내가 온 성 사업시찰에 먹칠하고, 내 표현은 그들이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전향이 실패했다는 것을 설명한다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새로운 박해를 강행했다. 그들은 나를 독방에 배치한 후 형사범 네 명을 시켜 교대로 나를 폭행했다.(나는 모든 고통과 불편함이 모두 가해자에게 가라고 발정념했다. 이후에 누구도 감히 나를 때리지 못했고 무서워했다.) 그들은 또 나를 자지 못하게 했다. 북방은 11월이 되면 집, 회사마다 난방을 돌리는데 나를 지키는 형사범도 솜모자, 솜옷, 솜바지 게다가 방한화까지 신고 전신 무장했다. 하지만 나는 반팔 티에 맨발을 하고 온 저녁 복도에 서 있어야 했다. 나는 법을 외웠는데 고요한 야경 아래 유수 같은 달빛이 피곤한 나를 지켜주었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춥지 않았고 특히 한밤중에 법을 외우다 피곤해서 복도 벽에 기대어 잠들었는데 깨어난 후 몇 분 만에 한 번씩 따뜻한 열기가 봄바람처럼 내 온 몸을 감쌌고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사부님의 법신이 제자를 지켜주시고 사부님께서 바로 내 옆에 계셨다!

어느 한 번, 사악에게 박해 당한지 한 달이 안 됐을 때 나는 감옥 우두머리(가끔 교도관을 대신해 일 함)에게 말했다. “덩 언니,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요.” 임시창고에 들어가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가 감옥에 들어온 지도 이제 몇 해 됐으니 파룬궁 수련생을 많이 접해보았죠? 그들 중에 나쁜 사람이 있나요? 파룬따파는 마음을 닦고 좋은 사람이 되며 남을 도우라고 합니다. 이건 불법(佛法)입니다.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면 당신도 복을 받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한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면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일을 끝내고 그녀는 나를 감시하는 죄수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를 정상적으로 자게 하세요.”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로서 당신들 오늘날의 표현은 위대한 것이며 당신들의 이 일체 선(善)한 표현은 바로 사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2] 대법제자가 박해자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과정은 다른 공간의 사악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사악이 철저히 해체되면 박해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박해를 감소하고 교도관, 이 불쌍하면서도 특수한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감옥에서 나가기 전 나는 파룬궁 박해를 주관하고 있는 감옥 모 대대장을 찾아갔다. 진지하게 그녀에게 파룬따파의 진상,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다는 이치를 한 시간 넘게 알려주었다. 마지막에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사무실 밖까지 바래다주었고, 나보고 나간 후 교훈으로 삼아 일은 하지만 안전에 주의해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계속해 감옥 1인자인 모 교도관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비교적 사악했기에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대법제자를 잘 대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다시는 대법제자에게 전기봉, 고문을 사용하지 마세요.” 그녀는 책상을 치며 화를 내면서 그건 관례에 따라 공무를 집행하는 것이기에 타인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나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그녀가 자신과 가족, 자식 미래를 위해 생각해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에게 부모님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부모님이 매달 한 번씩 보러 오는 것도 쉽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법을 얻어 온몸의 병이 사라지고 홀가분해진 아버지

2012년 설 기간, 나는 쓰레기를 버리러 층계를 내려갈 때 왼쪽 다리를 헛디뎌 굴러 떨어졌다. 왼쪽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복도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때 첫 일념이 ‘나는 사부님의 제자이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것이었다. 반시간 넘게 지나서야 겨우 기어 일어났고 오른쪽 다리로 뛰어서 층계를 올라갔다. 왼쪽 다리와 발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수련하지 않는 아버지는 나보고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사부님의 제자이기에 괜찮아요. 아버지, 쉬세요.” 그날 저녁, 화장실에 가기 쉽도록 나는 거실등과 화장실등을 저녁 내내 켜놓았다. 가끔 왼쪽 다리를 만져보면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법제자이기에 아버지가 돌봐주게 해서는 안 되고 빨리 나아야 한다.

이튿날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리 선생님 파룬따파에 서서 하는 연공동작이 있지 않느냐? 서서 연공해보렴.” 그렇다. 나는 연공해야 한다. 처음에는 신체 중심을 왼쪽 다리에 두려 했지만 사부님의 익숙한 구령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이고 자연스럽게 서 있으며 온몸에 힘을 빼라”가 들리자 중심을 두 다리에 두었다. 정말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나는 견지해 동공을 연마했는데 제4장 공법을 할 때 아래로 쪼그리는 폭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어쨌든 견지했다.

내가 동공을 마친 것을 보고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말했다. “앉아서 하는 연공도 있잖아!” 나는 잠깐 망설이다 침대에 올라가 계속해 가부좌를 했다. 왼쪽 다리는 부어서 빵 모양에 와인색이 됐고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다리를 올려놓았다. 사존의 구령을 들으면서 나는 ‘연공음악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다리를 내려놓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했다. 왼쪽다리 발가락에서 허벅지까지 심한 통증을 느껴 입정할 수 없었고 눈물이 펑펑 흘러내려 스웨터가 눈물에 젖었다.

아버지는 가슴 아파하면서 너무 아프면 연공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감당하신 것은 거대한 난입니다. 제가 감당하는 이 정도 업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나는 한 시간 내내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정공을 다 연마했다.

연속 3일, 나는 모든 시간을 아껴 법공부와 연공을 했다.

셋째 날,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었고, 넷째 날에는 학교에 가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주었다. 그 사이, 줄곧 오른쪽 다리로 절뚝거리며 견지해 밥을 하고 아버지를 돌봐주면서 조금도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대법의 신기함을 목격한 아버지는 감탄하면서 이건 병원에 가도 한 달 내에 낫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2014년 설날 때, 아버지는 급성 뇌혈액부족과 심근허혈을 일으켰다. 목숨이 위태로워 새벽 2시 반 나는 택시를 불러 아버지를 병원 응급실로 모셔갔다. 보름 입원한 후 병세가 좀 나아졌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고 나보고 안에 모르는 글씨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 글씨들은 내가 날마다 외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교통버스를 타고 학교에 수업하러 갔는데 버스를 타는 시간을 이용해 ‘홍음’, ‘홍음 2’, ‘홍음 3’을 외웠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아버지에게 가르쳐드렸다. 아버지는 “이 글씨는 ‘홍음 3’에도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아버지가 ‘홍음 3’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나에게 “네가 책을 갖고 있어?”라고 물으시자 나는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제가 학생들보다 빨리 도착하기에 애들을 기다리는 사이에 ‘전법륜’을 외웁니다.” 대법을 배우고 싶냐고 여쭙자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셨다. 나는 급히 수련생을 찾아가 ‘전법륜’ 한 권을 가져왔다.

이렇게 아버지도 법을 얻으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 다리가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을 보고 나도 배우고 싶어졌어. 오직 리 선생님만이 너의 병을 치료해줄 수 있어.” 심장이 좋지 않아 아버지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고 가끔은 온 저녁 한 시간도 자지 못하셨다. 자지 못하면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한 후 ‘전법륜’을 보셨다. 아버지는 끈기가 있어 새벽 2,3시에 일어난 후 아침 6시 발정념을 할 때까지 새벽마다 견지해 ‘전법륜’을 읽으셨고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아버지의 천목을 열어주셨다. 아버지가 책을 보고 있으면 위의 글씨가 차츰 금빛으로 변하고 입체감이 있으며 이어서 온 책이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또한 우리집에 수많은 만(卍)자 부호가 있는 것도 보셨다.

지금 아버지는 나와 함께 새벽 연공을 하신다. 83세 되는 노인이 온몸이 홀가분하고 귀와 눈이 어둡지 않으며 이해가 빠르다. 정말 사존의 자비로우신 제도에 감사드린다!

학생, 학부형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국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를 권하다

감옥에서 돌아온 후 머리가 온통 하얗게 된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나를 해외로 구출해주겠다는 수련생의 도움을 거절했다. 여기에 남아 부모님의 일상생활을 돌봐드리고 계속해 수련하기로 결심했다.

생계를 위해 나는 보충 수업반을 만들었고 주로 영어를 가르쳤다. 열심히 가르치고 말투가 부드러웠기에 학생들은 모두 내 수업을 듣기 좋아했고 성적 제고도 아주 빨랐다. 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학생과 학부형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한 학생이 있는데 장난이 아주 심했다. 학교에서 전혀 수업을 듣지 않았고 숙제도 하지 않았다. 부모와 선생님도 그를 상관하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수많은 보충 수업반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모두 담임선생님과 싸운 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나 여기에 온 후 여기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고 나서 일부러 나를 보러 찾아오기도 했는데 대체 어떤 선생님이 아들을 가르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그에게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려주었다. 아이는 듣기 좋아했고 나를 아주 신임했다. 차츰 나는 이 아이가 문제아이고 싸우기 좋아하며 사회 폭력배하고도 연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더욱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파룬궁은 마음을 닦고 선을 지향하는 불가(佛家) 상승공법으로서 자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우면 위험에 부딪혀도 길조가 나타날 거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늘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에게 들려주었고 나의 도움 하에 매번 패싸움에 참가하는 것을 피했다. 그는 감격하며 말했다. “만약 일찍이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남과 싸우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 부모님은 나에게 아주 고마워했다.

또 학생 한 명이 있는데 가정 경제조건이 좋았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가 많을 때 그를 낳아 그야말로 애지중지 응석받이로 키웠다. 아이는 공부하기 싫어하고 휴대폰을 하기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와 나는 동갑내기여서 늘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수업료는 적게 받아도 절대 건성으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모든 수업을 착실하게 대했다. 이 학생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줄곧 나에게서 배웠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는 모두 대법이 부여한 지혜로 그를 도와 풀어주고 해결해주었다. 대학 성적이 나온 후, 온 가족이 아이와 함께 입학통지서를 들고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왔다. 아이 엄마는 감동해서 말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선생님은 제가 만난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 선생님, 우리 온 가족은 특별히 선생님께 희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고 우리 사부님께 감사드리세요!”

내가 거주하는 중점학교 단지에서는 이런 학생도 만났다. 수업할 때 외할머니가 곁에 있어야 하고 걸핏하면 성질을 부렸다. 외할머니는 지식 수준이 낮아 아이를 때릴 줄만 알았다. 아이는 반항심이 아주 강해 외할머니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기회를 잡고 할머니에게 홍법했고 그녀에게 션윈CD 한 장을 주었다. 션윈CD를 본 후 할머니는 너무 격동돼 끊임없이 말했다. “너무 좋아요!” 결국 이 학생과 그녀 할머니도 인연이 닿아 법을 얻게 됐다! 나는 할머니에게 작은 스피커를 사주었고 TF카드를 꼽은 후 사부님 광저우설법, 연공음악을 다운받아 넣어주었다. 외할머니는 시간만 있으면 들었고 모든 내용을 다 들은 후 격동해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이제 완전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친척들을 삼퇴(중국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시켰다. 1년에 휴가가 두 번 있는데 휴가 때면 나는 이 아이에게 수업을 해주었다. 내 수업은 아주 특수했고 매번 2시간 30분 진행됐다. 나는 방석을 세 개 만들었는데 먼저 방석에 앉아 가부좌하고는 ‘전법륜’을 한 시간 읽은 후 몇 분 휴식하고 1시간 30분 영어 수업을 해주었다. 성적이 아주 빨리 향상돼 영어 성적은 올 때의 45점에서 100점으로 됐다.

아이의 영어성적이 이토록 빨리 향상된 것을 보고 선생님은 학부형을 불러 칭찬했고, 아이 엄마는 나를 보러 일부러 학교에 찾아왔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보면서 아이도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선생님, 왜 선생님은 저의 어머니나 외할머니가 아닐까요? 제가 이모라고 불러도 되나요?”

10년 가까이 강의하면서 이런 여자 아이도 만났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예쁘고 여성스러우며 우아하고 고상하지만 싸우기를 좋아했다. 감히 남자애와도 싸웠고 유치원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감히 그녀를 상대할 아이가 없었다. 어머니는 너무 고민돼 나에게 말했다. “유치원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늘 애가 싸워서 선생님에게 불려갔어요. 거의 매주 선생님이 학교로 불렀는데 정말 이름이 자자해요. 애들이 뒤에서 이 엄마를 손가락질하는데 선생님, 저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저에게 이런 아이가 생겼죠?”

상황을 알게 된 후 제때에 그들 모녀에게 왜 ‘삼퇴’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그들은 모두 탈퇴했다. 또한 그들에게 션윈 CD를 주면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마침 이 기간에 내 왼쪽 다리가 넘어진 지 3일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됐기에 그들 모녀는 대법을 아주 인정했다.

어느 날 저녁, 아이는 나에게 전화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대단합니다.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을 만나 정말 다행입니다. 선생님은 한 편의 전설입니다!” 이 여자 아이를 가르친 지 몇 달 만에 성적이 예전의 78점에서 고등학교 입시 모의고사 때는 126점(만점 150점)으로 향상됐고 소원대로 성 중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 어머니도 기쁘게 대법을 얻었다. 나는 ‘전법륜’과 대법 내용을 다운받은 작은 스피커를 그녀에게 주었고 5장 공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녀도 구원을 받았다.

법을 얻은 생명들을 보면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동시에 사부님의 홍대한 은혜에 감사드렸다!

법을 외우는 중에서 승화하다

속인일 때 나는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시 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5천년 전통문화에는 읽고 외울 수 있는 대량의 시가(詩歌)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시 쓰는 것을 좋아했고 취직한 후에도 현지 신문에 내가 쓴 시를 발표했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한동안 날마다 당시(唐詩) 한 편씩을 외우려고 했다.

법을 얻은 후, 사부님의 시는 하늘 아래 가장 좋은 시로서 함의가 박대정심(博大精深)하다고 여겼다. 버스를 타는 시간을 이용해 사부님의 ‘홍음’, ‘홍음 2’, ‘홍음 3’을 외웠다. 한 수련생 언니는 알고서 다른 사람을 통해 말을 전했다. “기왕 사부님 시를 외울 거면 왜 ‘전법륜’을 외우지 않나요?” 어느 한 번 몇 명 수련생 언니와 함께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헤어지기 전에 이 수련생 언니는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을 들여 ‘전법륜’을 외우세요. 공만 들인다면 외울 수 있어요.”

당시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 수련생 언니는 나보다 열 살 더 많지만 그녀도 ‘전법륜’을 외우는 것을 봐서 나도 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전법륜’을 외울 때 교란이 특별히 컸다. 외우다 멈췄고 간혹 통독하기도 했기에 한 번 외우는데 1년 가까이 걸렸다. 하지만 법을 외우는 중에서 분명히 아름다움과 말 못할 신성함을 느꼈고, 대법의 끝없는 함의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됐다. 가끔, 며칠 전에 외웠던 법이 일에 부딪히면 머리에 떠올랐고 어떻게 연공인의 심성에 따라 자신을 단속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나는 계속해 외우려고 한다. 이번에 나는 영어단어를 외울 때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던 순환 기억법으로 외우려고 한다. 그 해, 내가 영어를 가르친 학생이 전 시 최고점을 받았다. 나는 법을 외우려고 착실히 계획을 세웠고 아무리 어려워도 날마다 완성해 확실히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매달 한 번씩 수련생 언니를 만나러 가는데 둘 다 동시에 외웠지만 내가 훨씬 빨리 외웠다. 법을 외울수록 더 명백해지고 더 고요해졌다. 가끔 외우다 보면 세간의 만사만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나와 눈앞에 외우고 있는 ‘전법륜’ 책만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너무 신기했다! 그 무엇도 나를 교란할 수 없었고 나는 진정으로 한 생명이 법에 용해된 그런 상태를 느끼게 됐다.

지금은 예전보다 법을 외우는 속도가 더 빠르다. ‘밍후이 주간’에서 수련생이 ‘정진요지’도 외운다는 것을 보았는데 ‘정진요지’ 세 권도 빨리 외워보려고 한다.

법을 얻어 지금까지 비틀거리며 수많은 고생을 겪었고 평범하지 않는 20년을 보냈다. 사실, 신기한 일과 이야기가 수없이 많지만 안에 넣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디는데도 갖은 고생을 다 겪었지만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보호해주셨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나 이 못난 제자를 위해, 우주 중생을 위해 감당하신 일체를 생각하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제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존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연속해주신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전력을 다해 세 가지 일을 잘 함으로써 사존의 자비로우신 구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제14기 대륙법회 개최를 앞두고 자비로우신 사존의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제자의 위대함’[2]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이성(理性)’

원문발표: 2017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14기(2017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18/3562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