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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심 중에 당(黨) 문화 독소가 있다

글/ 청위(誠宇)

[밍후이왕 2010년 4월 25일] 수련생이 의뢰심을 담론한 것을 보고 나는 다른 한 각도로부터 말해 보고자 하는데, 중국 사람의 의뢰심은 상당한 정도에서 중공 사당 문화의 한 개 요소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자식이 18세가 되면 곧 독립한다. 뿐만 아니라 외국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돈벌이를 해서 자신을 먹여 살린다. 이는 그야말로 칭찬할만한 일이다. 예전에 대륙 어느 매체에서는 어느 어느 대통령의 자손들도 부모 품속에 안겨서 양육되길 기다린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사업이 있었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중국 아이들 상당수는 이렇지 못하다. 18세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아도 여전히 독립하지 못한다. 특히 취업문제에서 애들은 일자리가 없어 부득불 부모의 퇴직금에 의존해 살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사회에서 말하는 ‘컨라오족’(啃老族)이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 왜냐하면 이미 자연적인 것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당한 수 일부 사람은 중공사당의 삿된 말을 곧이듣고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중국 전통문화에다 밀어놓으면서 이를 중국인이 가정을 중시하고 윤리, 혈육 간의 정을 중시하는 일종 체현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전통문화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중국 사람은 가정을 중히 여기고, 윤리를 중히 여기며, 혈육 간의 정도 중히 여기는데, 정상 사회의 각도에서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역시 사회 안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을 중시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뢰한다는 것과는 절대 같지 않다. 물론 사람으로서 일에 부딪혔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가정에 의뢰심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역시 정상적이다. 하지만 이런 의뢰는 필경 장기적인 의탁으로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기생충이 되고 말 것인데 이 역시 중국 전통 가족교육 중에서 피면해야 할 내용이다.

중국인의 이런 의뢰심은 가정에 의뢰하는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잠재의식 중에 중국공산당에 대한 의뢰에서도 나타나며, 더 나아가 상당수 중국인이 의뢰하는데는 또 사회상의 모종 세력이 있다. 그런데 이 세력 자체는 아마 마피아와 관련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중공당도의 당성(黨性)은 사당을 이탈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절대로 없는바, 이런 의뢰는 상당히 강하게 나타난다. 또 예를 든다면 중공 정부나 기업, 사업단위에서 본 직장에 대한 직원들의 의뢰도 아주 강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단 이 직장을 떠나기만 하면 좋은 점도 따라서 잃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것이 바로 중공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중공은 정권이 세워진 시초부터 이미 이 체계를 강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 사회의 모든 재산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표현상으로 보면 그것 스스로 ‘중국인민의 구세주’라고 언명하는 속임수가 상당한 정도에서 그것의 지배적 지위를 결정해 주었다. 당신이 그것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당신의 절실한 이익이 영향 받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은 온갖 방면으로 당신에게 배척과 탄압을 감행할 것이다. 사당이 파룬궁을 타격하는 시초에 아주 사악한 구호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문을 잘 지키고, 자기 가족을 잘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가? 중공은 일찍부터 자신을 중국 사람의 가장이라는 지위에다 놓았던 것이다.

중공은 선전방면에서 이런 의뢰심을 교묘하게 중국인에게 주입했는바, 이를테면 사람들에게 “XX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 “부모의 정은 XX당의 은정보다 깊지 않다”는 노래를 가르쳤다. 마오쩌둥 전 중공 당 두목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성통곡 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세상을 떴으니 우린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개혁 개방 후 중공이 찍은 영화에서도 늘 이런 대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당이 영도하는 천하에서 내가 굶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런 장기적인 세뇌는 잠재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이 대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 국민이 모두 중공을 욕하는 오늘날에도 상당수 중국인들이 모두 이렇게 여긴다. ‘중공이 나쁘긴 해도 그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이런 의뢰 심리는 중공에 의해 상당히 심하게 강화됐다.

수련인으로서 이런 의뢰심은 상당히 큰 정도에서 아직도 부동한 정도의 당문화 요소로 남아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그는 중공에 그 어떤 의뢰심이 없는 것 같지만 문제에 봉착하기만 하면 곧바로 표현돼 나온다. 이를테면 어떤 수련생은 사당에게 납치된 후 위협하기만 하면 (판결만 하면 너의 퇴직금이 몽땅 없어진다) 그는 즉시 자신 이후의 생활을 연상하면서 ‘이 돈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지?’라고 생각한다.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의뢰심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필경 중공이 의식적으로 조성한 이런 환경에서 이미 이런 의뢰심이 생겨났다. 그가 중공에 의뢰하지 않는다 해도 또 동수에게 의뢰한다. 이런 의뢰심은 존재하기만 하면 중공에 대한 잠재적인 의뢰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좋지 못한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은 개인수련 중의 여러 방면에 반영된다. 우리는 마땅히 대법에 자기가 져야할 책임을 져야하고, 자기가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지도 의뢰하지도 말아야 하며, 일마다 손을 내밀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수련생을 위해 무엇을 좀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어떤 때 우리의 어떤 마음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는데 주요원인은 그것이 만들어진 근원과 위해성을 의식하지 못한데 있을 것이다. 인식했다면 우리는 그를 하나의 집착으로 여기고 버려보라. 아주 빨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마한 깨달음이니 동수께서 시정해 주시길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4월 25일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25/2221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