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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박해당한 동수와 교류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10월 10일】『명혜주간』을 읽고서 많은 동수들이 여러 번 불법체포 당하여 박해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박해당한 동수 중, 일부분은 전열에서 가던 사람들로서 확고하게 수련하던 동수였다. 그럼 왜 ‘확고’해도 여러 번 박해 당했는가? 본 문에서는 자신이 지금 있는 층차에서의 법리상의 인식을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하는데 동수들이 교류에 참여하시길 더 없이 바란다.

나 역시 여러 번 불법 박해를 받았고 부단히 안을 향해 그 중의 진정한 원인을 찾을 때, 문제 하나가 나를 줄곧 곤혹스럽게 하였다. 『명혜주간』393회에서 ‘단지 ‘확고’함 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라는 이 교류 문장을 읽은 후부터 이 곤혹이 풀리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마음속에서 돌덩이 하나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아 그야말로 사람의 집착으로 하여 조성된 법리상의 잘못된 구역으로부터 걸어 나온 것 같은 그런 해탈감이었다. ‘정념’으로 나온 수련생은 단식으로 나왔든, ‘병업’ 표현 방식으로 나왔든지 간에 모두에게 혹은 경하게 혹은 중하게 근심(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원인이라면 법리가 분명하지 못하여 자신은 단식 등 이유 때문에 나왔다고 잘못 인식 하였던 것이다. 특히 표면신체가 안되어 나온 동수들에게 이런 부담이 더 쉽게 생겼다. 건강이 좋아지면 사악이 또 잡아가지 않을까, 혹은 나는 이미 불법판결 몇 년 형을 받았다는 등등이다.

법에 있지 않고 또 구세력을 승인하는 아주 관건적인 이 일념(一念)을 버리지 못하고 눌러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단일하게 이 염두를 ‘두려운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또 이 ‘두려운 마음’을 버리려고 법 공부를 많이 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이처럼 구하는 마음을 갖고 법 공부 하였으니 효과가 어떠한지는 생각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서, 약간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양각색의 순정하지 못한 사상을 품은 채 그 법을 보고 그 책을 보면, 아무 것도 보아내지 못하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람들, 많은 대법제자들이 박해 받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법을 볼 때 마치 제고가 없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사실 당신들이 그때 머릿속에 담은 것은 모두 박해의 일이어서, 그 마음이 조용해지지 못했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 당신이 반드시 순정한 상태로 아주 솔직하게 보고 수련해야만 비로소 제고가 있을 수 있고 수확이 있을 수 있다.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머릿속에 박해 일만 생각하고, 또 ‘두려운 마음’을 버리려는 목적으로 법 공부하다가 일단 몸이 회복 되어 사악한 요소가 교란 하기만 하면 ‘집을 떠나 박해를 피하자’ 라는 염두가 쉽게 나온다. 특히 여러 차례 단식으로 나온 동수에게 이같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 ‘관념’이 쉽게 형성되는데 어떤 땐 이런 관념을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때 만약 법에서 제대로 바로잡지 못한다면 점차적으로 인식상에서 법을 이탈하게 될 것이며, 그로부터 또다시 사악한 요소의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

나는 박해 받은 동수한테서 이런 경과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수련생이 감옥에서 단식 하였는데 목적은 나가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단식을 아주 오랫동안 끌어, 사람은 시달리다 못해 잘못될 형편이었으나 악경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중 한 경찰이 다른 한 대법제자를 찾아와 그 대법제자에게 그가 단식하지 말게끔 권해 보라고 하였다. 그 대법제자는 그럼 그를 놓아 주라고 하였더니 경찰은 그가 집에 가고파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라고 말하였다.

신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구세력은 대법제자가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일단 박해 구실을 잡기만 하면 한사코 틀어 잡고 놓지 않는다. 그가 당신을 박해하여 죽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법을 두려워하고 사부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절대로 당신이 단식을 한다 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진정으로 생사를 내려놓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라야 만이 그것은 비로소 대법제자를 감히 박해하여 죽이지 못한다.

한 수련생은 외지로 피해 갔지만 사악의 교란을 피하지 못하였다. 처음 몇 년은 경제상의 박해로 법 공부 할 때면 잡념이 교란했고, 최근에는 ‘병업’의 박해로 생명을 잃을 뻔 하였다. 적지 않은 돈을 팔아 병원에서 입원치료 하느라고 사람과 재산이 빈털터리로 되었고 오늘까지도 복구 중에 있다. 세가지 일을 한다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사악의 박해를 해체하기 위해서 한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여러 번 마난을 겪었지만 인식이 아직도 이 한 층차에 머물러 있으니 구세력 요소는 번번히 박해를 더 가중하고 있다. 사람마음이 안정되지 않을수록 자신이 없고 잔혹한 박해를 인위적으로 더 가중시킨다. 많은 사람의 집착은 예를 들면, 두려운 마음 등은 모두 반박해 중에서 숨겨졌는데 당신은 그것을 분명히 가려내지 못하고, 부정하지 못하며 닦아버리지 않고, 낡은 경험에 의거하여 나는 단식하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재간으로 어찌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한단 말인가? 요행으로 나갔다 해도 ‘그것’은 당신을 지켜 보면서 시기를 기다렸다가 당신을 박해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도법’이란 문장에서 진작 지적 하셨다. ‘매번 마난(魔難)이 닥쳐올 때, 본성(本性)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邪魔)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마난 속에 빠지게 한다.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으로, 法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으로, 인위적으로 당신들 神의 일면을 억제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이미 수련 성취된 그 부분을 억제하여 그들이 法을 바로잡음을 저애하였다. 아직 수련 성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하며, 이미 法을 얻은 일면을 억제할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하여 그것이 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 (『정진요지』〈도법〉)

이 일념차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역시 위사위아한 일면의 체현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최대한도로 속인상태에 부합되게 수련하도록 안배하셨지 제자더러 집을 떠나 떠돌이 하라고 하지 않았고, 가정을 이탈하고, 사회 환경을 떠나 수련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때문에 ‘확고한 수련생이 박해 받는다’ 중의 ‘확고함’은 사람의 확고함이고, 이런 ‘확고함’ 중에는 사람의 강대한 집착을 지니고 있다. 내가 수련하려 하고 내가 신이 되려면 반드시 이 같은 ‘확고함’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 수련하는 사람은 밧줄을 타고 동굴에 들어가서 수련성취하지 못하면 목말라 죽고 굶어 죽었다. 그렇게 ‘확고’했다 할지라도 법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만이 비로소 우리의 사전대원이며 비로소 우리가 수련하는 길이다.

이렇게 ‘확고’했던 연고로 여러 번 교란 박해를 받은 동수들께서(나 자신을 포함하여) 얼마 남지 않은 정법수련 시간 내에 더 법 공부를 잘하여 바른 믿음을 수립하기 바란다.

정법홍세가 추진됨에 따라 대법제자에게는 모두 사악은 정말로 지탱하지 못하게 됐다는 느낌이 보편적으로 있다. 이전의 그처럼 잔혹한 사악의 장은 이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회를 빌어 이전에 사악의 극에 달하는 압력을 무릅쓰고 걸어나온 대법제자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당신들은 이미 그렇듯 사악한 환경에서 걸어 나왔는데 지금은 또 무엇이 두려운가? 업력을 소멸할수록 마난도 갈수록 적어질 것이며, 환경이 느슨할수록 사악의 장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깡그리 소멸될 것이다. 대법제자는 갈수록 신통해 질 것이고, 정법홍세를 주도하는 세간 형세의 법리는 갈수록 명확해졌고 지금은 더욱 명확해졌다. 정법이 사람을 구하는 때에, 사부님께서는 더구나 대법제자더러 감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며, 감옥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신다.

개인의 깨달음으로서 타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동수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고 아울러 교류에 참여하길 바란다.

문장발표: 2009년 10월1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9/10/10/210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