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가정 환경은 자신의 수련 상태의 반영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7월 11일 】수련 과정중에서 속인의 생활은 마땅히 어떤 상태여야 하는지, 여기서 이미 아주 긴 한 시기 곤혹스러웠다. 수련인은 되도록 속인에 부합되는 상태에서 수련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역사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 속인중에서 속인과 똑 같아야 하지만 다만 심성이 아주 놓고 심태가 아주 바른 이런 하나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가끔 무의식중 수련 상태를 떠나 속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법에 가늠하여 안에서 자신을 찿지 못하고, 정념으로 자신이 직면한 일체를 대하지 못한다. 때로는 진상할 때에도 사당의 박해를 무의식중 사람의 박해로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정념의 부족한 탓이다.

표면에는 법리가 명확한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일에 봉착하면 바로 정념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정념이 아주 충족하게 표현 될때에는 그 일체를 잘 해 나가지만 가끔씩 정념이 부족할 때에는 속인식의 논쟁에 따라 속인식의 조급함에서 결과를 추구 하였다. 한 마디로 법공부를 잘하지 못하였끼에 수련중에서 자신의 일사일념을 잘 파악하지 못하였다. 진상하는 과정중에서 여러 번이나 좋은 진상의 기회를 의식하지 못했다. 문제는 결과에 대하여 너무 집착이거나 혹은 자신의 감수를 너무 중히 여긴 탓으로 번마다 기회를 놓치였다.

수련이으로서 관건적인 시각에 능히 자신을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정념이 충족하여 무슨 일이나 모두 능히 할수 있다. 간혹 일상 생활중에서 항상 모두 아주 순정한 염두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바로 사상중에 저층인의 사유가 쉽게 침법하여 사람의 형식에 치후치게 된다. 심지어 진상하는 중에서 속인과 쟁론을 초래하여 원래의 신성한 일을 신성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이따금씩 심지어 진상을 모르는 속인으로 하여금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만들어 대법에 먹칠하게 될 때도 있었다.

나는 일찍 불법으로 노교소에 들어가 박해 받은적이 있는 대법제자이다. 집으로 돌아온후 남편에 대한 정이 정념을 대체하였다. 남편에게 고생을 많이 시켰으므로 더는 그에게 너무 걱정시키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에서 (사실 바로 정념이 부족) 이 대가를 갚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결과 그는 늘 손실이 여하여하 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나는 법리로 박해 받은 이 사실을 진상에 연관시키지 못했고, 누구를 막론하고 대법에 대가를 치르면 그만큼 복을 받을 수 있고, 선악에는 보응이 있으며, 대법제자의 가족에도 큰 복이 있을 거라는 등등 이러한 근본 문제를 생각지 못했다.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바로 그러한 반면적인 상태가 표현 되었다. 제가 법리에 명백 하였을때 그는 다시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저도 속인식의 불안한 마음이 없어 졌으며 능히 정념으로 이 일을 대할수 있었다.

수련 과정중에서 나는 일찍 남편이 나에 대한 교란이 아주 크다고 느꼈다. 내가 어떻게 그에게 이야기 하든지를 막론하고 그는 속인중에서 아주 완고한 사람이였다. 그는 모두 나를 무식하다고 인정하면서 내가 어떻게 말을 하든지 모두 반면으로 받아 들였다. 속인으로 볼때 그는 정말로 구할수 없는 사람이였다. 매일 자신은 아주 힘들어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수련생은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게 구세력이 당신의 생활에 대한 미련이 심한것을 보고 당신에게 세간의 생활에 대한 미련의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98년도에 수련을 시작하였을때 그는 반대하지 않았을 뿐더러 또 나를 지지하면서 함께 시어머니 한테가서 비디오 설법을 듣게 하였다. 바로 99년 7.20이후 점차적으로 대법에 대하여 위화감으로 변하였다. 도대체 누구의 문제인가? 나는 마땅히 어떻게 하면 잘 할수 있을까?

이사하고, 또 출산하였으며, 출산한후 휴가 등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주 오랜 시기 동수들과 동떨어진 상태였다. 정법의 홍류중으로 돌아온후 부단히 안에서 찿음에 따라 나는 정념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인중의 이치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자신의 일사일념을 잘 장악하고 무엇을 하기 싶어도 바로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항상 나한테 직면한 일체를 정념으로 대하였다. 때로는 사부님께서 속인의 입을 빌어 나를 나무람 하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 적으로나 한 말을 당신을 모두 받아 들이지 않는다. 틀려도 듣지 않고, 맞아도 역시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조용히 하고 자세히 사고해보면 본래는 제가 속인과 옳고 그름을 논한 것이였다. 설령 속인중의 이치로서 이겼다면 역시 맞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으로 가늠하면 마땅히 수련해 버려야할 집착을 도리어 수련하지 못한것이다. 나는 무얼하러 왔는가? 속인의 “맞다”는 이치을 위하여 존재한 것인가? 제가 이겼다 해도 거기에 또 무슨 의의가 있는가? 결국에는 방법을 다하여 없애 버려야 할 것들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법으로 가늠하면서 속인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제가 간혹 심성이 아주 똑바를 때 자신이 이러한 마음은 어려서부터 양성한 관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완고하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버리기 비교적 힘들었다. 바로 남편에게 “당신이 또 무슨 말 해요, 내가 당신과 쟁논하지 않으면 되지 않아요.”하고 말하면 그는 듣고 아주 격동되여 하면서 “정말로 그렇다면 좋아 나도 더는 고통을 받기 싫어!”하고 대답했다. 나는 속인중의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9년 7.20이후 남편의 그러한 반면으로 변하게 된데는 나에게도 아주 큰 책임이 있었다. 우리 수련인이 잘하지 못하면 정말로 중생을 회멸하게 된다. 그 후에 능히 잘 할수 있은것은 사부님께서 역시 속인의 입을 빌어 우리를 표창하고 격려하였끼 때문이다.

나는 수련인의 집착은 속인들이 우리에 대한 태도라고 인식하였다. 바로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하여 집착한다면 세인들에게 보여지는 위치와, 형상이 진상을 잘 할수 없는 이유로서 중생을 구도할 수 없다. “사람의 관념으로 정법과 대법제자의 수련형식을 가늠하지 말아야 하며, 늘 사람의 마음을 써서 당신들이 인식을 제고하는 과정을 길게 늘이지 말아야 한다.”(《새해문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틀어쥐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사람의 사상 양식에서 벗어나 신의 정념으로 정법 수련자의 사상 방식으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 합시다.

문장완성:2009년 7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7/11/20432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