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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大道)에서 수련

글/ 대륙대법제자 소봉(小鳳)

【명혜망 2008년 5월 27일】 늘 문제에 부딪쳐 안을 향해 찾을 때면 찾기만 하면 한 무더기의 사람마음을 발견하곤 한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본래 물질이란 바로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조성된 것이다. 저층공간에서, 표층공간에서는 층층마다 모두 명리정(名利情) 및 그것에서 파생된 각종 마음들이다. 그래서 명(名)가운데 명리정이 있고 리(利)중에도 명리정이 있다. 표현되어 나온 것은 고립된 문제가 아니다. 집착심도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가지 문제에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마음이 반영되어 나온다. 각종 마음의 배후에는 또 각종 마음으로 촉성되어 최후에 위사(爲私)로 귀결된다.

나중에 마음을 겨냥해 마음을 제거하고 이렇게 많은 마음에 대해 이것을 내려놓고 저것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뿐만 아니라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내가 현재 매우 상심해 있고, 내가 나는 상심하지 않겠다 나는 상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상심해있다.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정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나중에 교류를 통해 나는 활연히 깨달았다. 자신의 이런 상태는 마치 소도(小道)수련과 같으며 줄곧 한 층면에서 맴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대도는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 “오직 중간만이 대도(大道)이다”, “큰것에 착안하고,정정당당하게 수련해야 한다.”(『전법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대도(大道)수련인가? 중간이 대도라면 그럼 중간은 또 무엇인가? 무엇을 큰 문제에 착안한다고 하는가? 나는 그속의 한 층의 함의를 이렇게 깨달았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다. 우리는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려는 서약을 맺고 중생을 구도할 사명이 있으며 대법을 실증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간의 큰 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각종 정황 하에서 모두 큰 일에서 착안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가장 바른 정념이 있다면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으며 일체 사악은 자멸한다.

이 한 점을 깨닫고 나는 갑자기 왜 자신이 자주 이런 마음 저런 마음에 직면해 분명히 틀린 것임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고 매우 고뇌했가를 알게 되었다. 최후에 모두 도저히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을 더는 생각하지 않고 책을 본다. 그 결과 보고 보아도 책속에서 나의 집착심 문제에 관한 것을 볼 수 없다. 단지 법을 보고 보다보면 그런 마음이 대법에 연계되어 마음속에 중생을 품은 정념이 저절로 일어날 뿐이다. 이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방금 지나간 그런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담담해지거나 혹은 소실되었다. 바로 내가 중간의 큰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 한 증차를 돌파했으며 이리하여 이 한 층차의 각종 마음이 모두 동시에 해체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는 비록 마치 수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언제나 한 층면의 부동한 각도에 맴돌면서 매우 괴롭고 매우 힘들어 돌파도 매우 늦었던 것이다.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중에서 어떤 제자가 물었다.

“제자 문의: 저는 정서가 아주 쉽게 의기소침한 상태로 들어갑니다. 자신은 생명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이 고독이며 가족의 따사로움이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런 고독감이 제게 준 그늘을 제거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마땅히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저의 역사상 업력으로 조성된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저의 수련 속에서 제거해야 할 일부 요소입니까?

사부: 업력이거나 혹은 교란이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한 생명으로서 당신이 초기에 법을 얻을 때 그런 흥분, 이 대법을 얻은 후 그런 자부심,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하였는데 당신이 얻은 그런 느낌을 포함하여, 왜 지금은 없어졌는가? 정진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설령 진상을 알리는 중에 바빠서 자신을 감수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또한 대법 일을 하는 중에 조성된 것이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 속에서 조성된 것이다. 왜 고독을 느끼는가? 가서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절대 이런 느낌이 없다. 법공부 중에서, 정진하는 중에서 어찌 이런 느낌이 있단 말인가? 정진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런 속인의 그러한 느낌을 감수할 한가한 심정이 생기는데 이렇지 않은가? (박수)”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평소에 어떤 사람 마음이 폭로되든지 즉시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생각하면 이 일념을 쥐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치 하나의 만능열쇠처럼 어떤 집착의 자물쇠도 모두 열 수 있으며 사악의 만 가지 움직임도 정념 앞에서는 오직 모습을 감출 뿐이다.

이 문장을 쓰는 목적은 만약 어떤 동수들이 나와 유사한 상태에 직면해, 집착심을 마주하고, 분명히 틀렸음을 알면서도 질질 끌고 내려놓지 못한다면 시험삼아 이런 방법을 해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맴돌며 전문적으로 그것을 생각하지 말고 한번 또 한번 머릿속으로 자신이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며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책임, 자신의 서약을 똑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방법을 말하자면 단지 한 가지 형용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정념이 견정하면 집착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기 위해 정념을 견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념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롭게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5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5/27/1792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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