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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잘할 것을 요구해 중생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펼쳐보이자

글/당산(唐山)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1월 27일】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영상을 본 후 마음이 오랫동안 평온하지 않았다. 안으로 자신을 찾아보니 사부님께서는 비록 호주 수련생들을 겨냥해 설법하셨지만 자신에게도 아주 많은 집착과 사람 마음이 있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방면에서 동수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표현은 직접적으로 중생구도의 효과에 영향을 준다.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여러 차례 중생 앞에서 우리의 형상(形像) 및 동수 사이의 모순 표현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의 표현이 좋지 않으면 중생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하나는 대법에 먹칠을 하고 이 외에도 이 생명이 우리 자신이 조성한 나쁜 영향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아주 엄숙한 문제이다.

자신이 처음 법을 얻었을 때를 회상해보면 나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격동이 있었고 또 일찍이 아내에게 함께 수련하자고 극력 홍법한 적이 있다. 우리 지역에는 당시 법을 얻은 사람이 비교적 적은 편이라 어떤 때는 밖에 나가 홍법하기 위해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나는 본래 성격이 조급하고 거친 편이라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을 때린 적도 있다. 가정 관계를 잘 원용하지 못해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이 아주 컸다. 그녀는 내게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대법에 대한 인상마저 나빠졌던 것이다. 이는 아내가 법을 얻는 것을 아주 어렵게 했고 심지어 내게 사부님과 자신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번은 동수에게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테이프를 주고 늦게 돌아오자 내 따귀를 때린 적도 있다. 나중에 나는 법학습을 통해 안으로 찾았고 자신의 씬씽을 제고하자 아내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내 성격이 좋아졌다고 했고 아내 역시 이때부터 수련의 행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은 온 가족이 많은 시련 속에서도 사부님의 자비하신 가호 하에 근 10년을 걸어왔다. 이 과정 중에 넘어지면서 우리는 성숙했고 이지적이며 청성해졌다. 아울러 가정 자료점을 세워 주말에는 셋이 함께 진상자료를 나눠주며 중생을 구도한다.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이 나온 후 우리 가족은 함께 앉아 사부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한 후 자신의 수련체험을 결합해 우리는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대법제자의 형상과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건 모두 자신이 대법제자이고 수련하는 사람으로 신의 길에서 걸어가는 사람임에 주의해야 하며 수련인의 상화함과 정념을 유지하며 정확하게 제고 환경 중에서 수련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를 대해야 한다.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고 다른 사람을 질책하거나 방법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제자 사이에 모순이 나타났을 때 지나간 후 자신의 부족을 인식할 수 있고 집착을 제거할 수 있으며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면 영향이 작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필경 수련하는 사람 사이에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에 부딪혀 안을 향해 찾으면 환경이 좋아질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수련하지 않는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특히 우리가 처한 환경인 가정이나 사회에서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남겨놓은 나쁜 인상을 통해 우리는 사실상 대법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중생이 구도될 수 없게 하는 장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중생을 훼멸하고 있는가? 아울러 우리는 이런 문제가 출현하는 것이 두려워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마땅히 법을 잘 학습하고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청성하고 이지적이며 지혜롭게 가서 한다면 중생을 훼멸시키는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표현은 단지 간단하게 개인의 표현이 좋고 나쁜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중생은 직접 우리의 표현을 통해 사부님과 대법을 보며 우리 자신이 잘하지 못하면 중생은 곧 대법이 좋지 않다고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아직도 시시비비 중에서 끊임없이 자아표현에 집착해야 하는가? 아직도 자신이 잘하지 못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대법에 먹칠할 수 있는가? 정말로 자신이 중생 앞에서 좋지 않은 표현으로 인해 중생을 지옥으로 밀면서 구도 받을 수 없게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자그마한 ‘존엄’, ‘명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와 마성 상태의 표현이 줄곧 자신이 어떻게 힘들고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할 뿐 대법을 위해 책임지고 중생이 구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대법제자는 시시때때 곳곳에서 모두 그 어떤 환경 하에서든,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 바른 인상, 좋은 인상, 선한 인상, 자비로운 인상을 남겨야 한다. 이 역시 법을 실증하고 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법을 잘 학습하지 않는다면 사부님과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없고 더욱이 개인 수련 상태에 대한 요구마저 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욱 잘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중생에게 자비롭고 선량한 표현을 줄 수 없다면 또 어떻게 중생들로 하여금 대법과 대법제자를 인정하게 할 수 있고 어떻게 중생을 구도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비록 우리가 수련 중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구체적인 환경 중에서 씬씽을 제고하는 요소가 있을 때 이지적이지 못한 표현은 이런저런 집착을 제거하는 일이 발생하게 할 수 있고 심지어 속인의 표현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집착을 지니고 밖을 향해 찾을 수 없다. 그럴 때면 곧 자신이 수련인이고 대법제자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어떻게 정념으로 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만 비로소 수련인의 상태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부처는 마음속에 있다’는 법리를 잊었는가?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면 곧 명백한 것 같지만 잠시 후면 또 명백하지 못하고 주의식이 자신을 주재하지 못하는데 바로 자신을 잃는다. 한 사람이 정념을 느슨히 하면 무엇이든 다 당신을 교란할 수 있고 정념이 족하면 그 어떤 것이든 교란할 수 없다.

뭇 신과 중생은 모두 대법제자의 표현을 보고 있다. 신이 대법제자의 표현이 좋은 것을 보면 그에게 층차와 경지를 제고할 기회를 줄 것이며, 중생이 대법제자의 표현이 좋은 것을 보면 대법을 인정하고 대법이 좋다고 말해 구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법리이다. 기왕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의 부족을 지적하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동수, 세인, 중생 중에서 사부님 법의 요구에 따라 잘하여 그 어떤 생명에 대해서든 자비롭고 선량하며 바른 인상을 남겨야 한다. 설령 한 생명이 정말로 구도 받을 수 없다면 우리 역시 자신의 과실로 인해 이 생명이 구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정법에 대한 생명의 태도가 결정하는 것으로 생명을 없애고 남기는 것을 가늠하는 대법의 표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법을 실증하고 있고 법을 수호하는 기초 위에서 중생을 구도하기 때문에 대법제자는 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이것이 대법의 명예를 수호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또한 중생을 구도하는 대법제자가 반드시 구비해야 할 소질과 상태이다.

이상은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비디오를 본 약간의 깨달음이다.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동수들이 자비롭게 수정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11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1/27/16728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