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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리를 똑똑히 인식하고 동수 구원과 관련된 문제들을 정념으로 대하자

글/길림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1월 25일】 길림시 대법제자 왕립추(王立秋), 목춘홍(穆春红) 등이 이미 일주일 전에 장춘(長春) 여자감옥에 불법으로 비밀리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주 무거웠다. 9개월간 구원 활동을 전개했지만 여전히 잡혀갔고 여러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구원에 참여한 동수들과 발정념에 참여한 동수들은 모두 아주 풀이 죽었고 일부는 헛된 일을 했다고 하며 일부는 정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며, 또 일부는 동수에 대한 사악의 박해를 묵인했는데 우리가 무능하고 힘이 없다고 여겼다. 아울러 그것을 사람에 대한 사람의 박해로 여겼다.

그럼 이런 말들은 무슨 작용을 일으키는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수련생을 아래로 밀어내려 본래 겨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악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 이는 사람의 관념과 수구를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럼 왜 우리가 여러 방면으로 구출했는데도 여전히 이러한가? 도대체 어느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어떻게 정념으로 대해야 하는가?

나는 이 일을 겨냥해 동수들과 나의 작은 깨달음을 교류하고자 한다. 만약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롭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1. 사람을 구하는 것과 결과에 집착

우리는 헛된 일을 했는가? 답안은 물론 아니다. 이것을 어찌 헛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9개월 동안 우리는 공안, 검찰, 법원 각 부문에 찾아가 끊임없이 진상을 알리고 발정념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법에 대한 적의(敵意)를 감소시키는 동시에 사악을 진감시켰다. 다른 공간에서는 또 적지 않은 사악들이 철저히 제거되지 않았는가? 그럼 왜 우리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이 있었는가? 우리가 강렬하게 결과를 추구하는 사람 마음을 안고 있어 기점을 잘못 잡은 것이다.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을 중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원했던 부분을 보지 못하자 아주 실망하고 풀이 죽었고 심지어 원망하기도 했다. 왜 우리의 마음은 늘 표면 현상에 이끌리는가?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단호한 믿음이다! 만약 우리 대다수 사람들이 모두 수련생이 풀려나는 데 집착한다면 그것은 강대한 집착이 아닌가? 강대한 파동이 아닌가? 우리 정체에 나타난 큰 누락이 아닌가? 그럼 또 사악한 요소에게 틈을 타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그럼 우리가 동수에게 마난을 가해준 것이 아닌가? 우리의 손실이 아직도 적단 말인가? 동수여,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일사일념을 잘 파악해야 한다.

2. 법리에 똑똑하고 정념으로 문제를 봐야

우리는 왜 수련생을 구원해야 하는가? 표면에서 보자면 사악이 우리 수련생을 박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공안, 검찰, 법원 및 만날 수 있는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을 구도하는 것이고 동수에 대한 구원활동을 진상을 알리는 좋은 기회로 여기는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즉, 환경을 전반적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그럼 이 한 기점에 서서 가늠하면 우리의 이 9개월이 헛되이 보낸 것인가? 아니다. 헛된 일이 아니고 이미 역사의 휘황을 닦아놓았다. 매 한차례의 교전(交戰)은 매번 정과 사의 대전이다. 그들이 왜 이렇게 오래도록 송치되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는가, 바로 우리에게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왜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렸는가? 여기에는 어쩌면 우리의 정체적 협조가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 우리에 대한 법의 표준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요소가 있다. 우리는 착실하게 안을 향해 찾아 각종 집착과 간격을 제거하고 원용불파한 정체를 형성해야 한다. 정체가 제 위치에 도달해야 비로소 잘할 수 있다. 그럼 수련생이 하루라도 풀려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를 견지해야 한다. 수련생이 어디에 있으면 우리는 마땅히 어디까지 해내야 하고 매 입자는 모두 이 과정에서 바로 잡히고 잘할 수 있다. 구하지 않아야 스스로 얻게 되니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을 모두 구원한다면 사악은 모조리 해체되고 바로 잡혀야 할 환경은 모두 바로 잡히며 수련생은 당연히 풀려날 것이다.

어쩌면 백 걸음의 노정에서 우리는 이미 아흔 아홉 걸음을 걸어 한 걸음이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등산을 하는 것과 같은데 가장 어려운 그 단계를 올라서야 비로소 그 “절묘한 봉우리를 마주한다”는 미묘한 풍경과 내심의 소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사존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고 있다면 또 무슨 의문이 있겠는가?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전법륜』) 결과는 필연적이다.

3. 무조건 안을 향해 찾아 정체적으로 제고

사존께서는 우리더러 일에 부닥치면 안을 향해 찾고 우리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며 이는 우리가 제고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렇다며 수련생을 구원하며 나타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람 마음이 들떠 소극적으로 대하거나 밖을 향해 찾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안을 향해 찾음은 우리가 박해당한 동수 혹은 다른 동수의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개입된 매 한 명의 동수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적인 구원 과정에서 나는 정념으로 문제를 대했는가? 내 마음은 어떻게 움직였는가? 나는 정말로 제 위치에 도달하도록 행했는가? 나는 동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정념을 내보냈는가?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는가? 나는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았는가? 무사무아, 선타후아를 행했는가? 나는 중생을 마음속에 담았는가? 정체가 협조해야 할 때 자아를 내려놓고 정체를 원용했는가? 만약 이런 시험지를 마주했을 때 우리의 성적이 모두 우수로 나온다면 오늘날의 국면은 절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잘하지 못하고 일에 부닥쳐 또 즉시 자신을 바로 잡지 못하면서 반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비관하며 실망하고 질책과 원망이 한데 뒤섞여 있다. 이는 우리가 성숙하지 못한 표현이 아닌가? 이는 우리가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는 길을 8년이 넘도록 걸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사부님께서 정말로 시름을 놓게 하실 수 있을까? 우리가 제 위치에 도달하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마땅히 이지적이고 지혜롭게 마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 엄숙하게 안을 향해 찾고 동수에 대해 관용하고 중생에 대해 자비롭게 구도해야 한다.

수련자 앞에서 우리는 무조건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의 근본 집착을 깊이 파내며 게으름 피지 말아야 한다. 사악의 박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진상을 널리 알리고 발정념의 힘을 강화해 정체적으로 협조하여 더 넓고 더 깊이 사악을 제거하고 검은 소굴을 해체시키며 진상을 알리도록 하자. 그럼 더욱 좋지 못한 일이라 해도 모두 좋은 일로 변하고 모두 우리가 위덕을 수립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무엇 때문에 한탄하고 풀이 죽는단 말인가. 오로지 용맹정진해야만 비로소 사부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동수들이여, 우리 손을 잡고 함께 나가며 함께 잘해 사부님께 우수한 성적을 바치도록 하자!

소감을 쓴 글이라 그다지 순선(純善)하지 않다. 동수들이 정확히 대하고 적절하지 못한 곳은 자비롭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2007년 11월 2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1/25/16714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