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7·20’ 이전에 법을 얻은 오랜 대법제자다. 최근 가부좌 중에 한 장면을 보았는데, 수련생 B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큰 내리막길을 쭉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후 나는 다른 수련생들에게 이 장면을 이야기하며, B의 최근 수련 상태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B는 어머니(수련생 A)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계속 그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는 3가지 일을 늘 잘하셨어요. 집에서 자료도 만들고, 다른 수련생들이 심성관이나 난(難)을 겪으면 항상 제때 도와주고, 집에서는 자녀와 남편까지 이끌어 함께 수련하게 해서 우리 집을 수련하는 집으로 만드셨어요. 그렇게 잘하던 분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수 있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많은 원망을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후 나는 왜 사부님께서 가부좌 중에 그런 장면을 보여주셨는지 깨달았다. 오직 나만이 A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숨기고 싶어 했던 마음과 집착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B와 공유하지 않아 그녀가 의문과 괴로움 속에 빠지게 했으며, 심지어 다른 수련생들과의 간격까지 만들어 버렸다. 자책과 후회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고 자연스레 A와 함께했던 1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집에서 진상 자료와 기계가 발견돼 억울하게 3년형을 받고, 어느 시의 여자감옥에서 3년을 보내게 됐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공견조(攻堅組)’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이곳은 ‘유다(배반자)’, 감옥경찰, ‘방교(幇敎, 세뇌를 돕는 협력자)’로 구성된,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전향’시키는 전문 조직이었다. 매일 대법과 사부님을 모독하는 세뇌 영상을 보기 강요했고, 협조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때리고 욕하고 공격했다. ‘전향’을 거부하면 가족 면회권과 구매권이 박탈됐고, 더욱 굳건한 사람은 전기봉으로 고문하거나 작은 감방에 감금하기도 했다.
어느 방교가 나에게 ‘3서(三書, 세 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글자를 모른다고 하자 그녀가 대신 써줄 테니 손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두려움과 사람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말았고, 이후 작업장으로 보내져 중노동을 했다. 그때의 나는 이 일의 엄숙함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어차피 내가 직접 쓴 글도 아닌데…’라는 요행심까지 갖고 있었다.
형기 만료 한 달 전, 나는 다시 ‘공견조’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많은 고향 수련생들을 만났고 A도 그중에 있었다. 그녀는 먼저 다가와 자기소개를 하며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하루 이틀 뒤, 나는 A가 감옥경찰 사무실에서 대법을 모독하는 CD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방교 일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확인해 보니 실제로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변명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A와 같은 방을 쓰던 또 다른 수련생(7년형을 받은 젊은 기술자 수련생)도 방교 일을 하다가 결국 사악함에 끌려가 지금까지도 ‘전향’, ‘방교’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매우 무겁다.
출소 후, 나는 법공부하고 안으로 찾으며 ‘3서’에 손도장을 찍은 일은 대법의 수련에 어긋난 것이며 반드시 엄정성명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명혜망에 엄정성명을 제출했다.
1년 뒤, A가 출소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상태가 좋아 보였고 계속 대법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방교 일을 했던 것에 대해 깊이 반성했는지, 수련생들에게 사과했는지, 엄정성명을 제출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데 누가 모르겠나, A도 당연히 성명을 냈겠지’ 하고 당연히 여겼다.
며칠 뒤 다시 A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밖에서 진상을 알리면 항상 누군가 뒤따라오고, 집 아래에는 감시 카메라도 있어 위험하니 더 이상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것이 두려움에서 생긴 가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나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왕래를 중단했다.
거의 2년 뒤, 다른 수련생이 나에게 A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줬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직 나이가 50대밖에 되지 않았고 늘 대법을 실증하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이후 들은 이야기로는, A의 딸인 B가 어머니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크게 상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련생들이 나에게 그녀를 찾아가 교류하라고 했다. 나는 수십 번 그녀의 집을 찾아갔지만 매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수련생들은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라고 했고, 나는 아직도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 채 ‘내가 무슨 그런 큰 능력이 있겠나?’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가부좌 중에 B가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깜짝 놀라 과거의 내가 ‘당연히 그렇겠지’ 하는 마음과 체면 때문에, 정말 많은 수련생과의 소통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A가 나에게 자기 집에 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감옥에서 ‘방교’를 하며 대법제자를 전향시키는 일에 참여했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겠는가? 그녀의 딸의 반응만 봐도 A가 이 일을 얼마나 철저히 숨겼는지 알 수 있다. 친딸도 아무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다른 수련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밀실에서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이라도 하늘에는 천둥처럼 들린다고 했다! 이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사람 마음과 집착을 드러내고, 즉시 엄정성명을 써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숨기려고, 알고 있는 수련생이 자기 집에 오지 못하도록 핑계를 댔다니—이 얼마나 큰 집착과 허점인가? 구세력이 이런 약점을 잡아 박해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사부님께서는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것도 아니다. A가 출옥한 뒤 거의 2년 동안이나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것은, 바로 수련생에게 스스로를 바로잡을 여지를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엄숙한 문제를 A뿐 아니라 나 역시도 제대로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면과 ‘설마 아닐 거야’ 하는 마음 때문에 나는 한 번도 A에게 이 일을 직접 묻지 않았다. 만약 그때 정면으로 짚어 주고 일깨워 주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설령 수련생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더라도, 나는 최소한 대법제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것이고, A의 딸인 B도 이 일 때문에 마음에 응어리를 안고 수련과 정진에 영향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다른 수련생을 통해 이 일을 글로 정리하여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비슷한 일을 겪는 수련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와 경계가 되기를 바란다.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다. 매 한 번의 일마다 당신이 근본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正信)이 있는지가 시험받는다. 특히 난을 겪는 수련생들, 특히 불법 노동교양·징역 등 억울한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는 수련생들과는 더욱 많이 교류해야 한다. 그 시기 자신의 말과 행동 중 대법에 부합하지 않았던 점이 있는지 잘 되돌아보고, 만약 있다면 반드시 깊이 인식하고 즉시 성명을 써서 폐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수련의 기회를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만들 수 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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