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1996년 초, 저는 초등학생 때 대법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법리를 잘 몰랐지만 마음속에는 ‘인(忍)’이라는 한 글자만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인’을 바탕으로 줄곧 수련해왔습니다. 그러나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련 환경과 멀어졌고, 점차 수련을 게을리하게 됐습니다. 그저 큰일이 있을 때만 제가 수련인임을 인식할 뿐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전법륜(轉法輪)』을 항상 몸에 지녔지만, 온갖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거의 펼쳐보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야 우연한 기회에 현지 협조 수련생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저는 점차 수련 환경에 합류해 제가 할 수 있는 진상 알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젊어서 기술적인 면에서 노년 수련생보다 더 많이 알고 빨리 배웠기에, 점차 일에만 빠져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법공부의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못한 데다 나중에 가정, 직장, 사람을 구하는 일까지 겹쳐 매일 무척 바빴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일을 하는 것을 수련의 전부로 오해했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법공부를 할 때 졸고 정념을 발할 때 손을 넘어뜨렸습니다. 또한 사람 마음이 무거워 집과 차를 사고 싶은 마음, 색욕심, 질투심, 쇼핑에 대한 집착과 각종 탐욕을 인식하면서도 없애지 못해 수련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현지 협조 수련생은 여러 차례 제게 권했습니다. “당신은 평소에 매일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쉬는 날에는 그 시간을 이용해 법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제 생각대로 사람을 구하는 것을 중시하고 제 수련은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도 문제를 인식했지만, 법공부만 하면 졸려서 제 상태를 바꿀 힘이 없었습니다.
납치되다
2020년, 저는 중공 악당의 박해를 당했습니다. 법공부를 적게 해 박해를 부정하는 법리를 몰랐고, 대법제자가 붙잡히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습니다. 처음으로 불법 체포됐지만 공안국에 납치된 후, 저는 ‘생사를 내려놓고 법을 실증하며 절대 사악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은 확고히 했습니다.
경찰의 첫 불법 심문에서 저는 법에 입각해 문제를 보지 못했고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도 없어서, 그들의 질문에 제 생각대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서명하라고 할 때가 돼서야 그것이 조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서명하지 않았고, 동시에 아까 질문에도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기회가 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 두 번째와 세 번째 불법 신문이 이어졌고, 저는 진술과 서명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경찰은 온갖 방법으로 저를 속여 다른 수련생의 정보를 얻어내려 했지만, 저는 그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며, 적절한 기회에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저를 구치소로 보내기 위해 지역 병원으로 데려가 신체검사를 했습니다. 채혈과 핵산 검사를 할 때 제가 협조하지 않자, 여러 명이 강제로 저를 눌러놓고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네가 소리쳐도 피는 이미 뽑았다”라며 핵산 검사 결과가 나오면 저를 보낼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당시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 부모님, 직장, 집, 차 등 제 모든 것을 단번에 내려놓았다고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대법을 위해 세간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습니다.
꼬박 3박 4일간 단식한 넷째 날,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저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지금은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은, 제가 붙잡혀 우리 지역 전체에 끼친 손실이 너무나 크다는 점입니다. 사부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많은 일을 맡고 있어서 제가 없으면 다른 수련생들이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제가 수련을 잘하지 못해 구세력에게 빈틈을 보인 줄 압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나갈 수 있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자신을 착실히 수련해 전체에 손실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당시 저는 그저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이렇게 하소연했을 뿐, 추구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직 사부님께 진심으로 참회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약 30분 후, 경찰이 ‘거주지 감시’라고 적힌 종이를 가져와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법률 지식이 너무 부족해 ‘거주지 감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적힌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봤습니다. 모든 조항이 집에 돌아간 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임을 보고, 저를 집으로 보내주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의 벅찬 감정과 사부님에 대한 감사함에 마음속으로 눈물이 샘솟듯 흘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다
집에 돌아온 후, 법을 아는 수련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세요.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잠시 집으로 돌려보낸 것뿐이고, 6개월 후에 (모함된) 사건은 계속 진행될 겁니다. 그러니 이 기간에 자신을 빨리 바로잡고 법에서 제고해야 합니다.”
한 수련생의 소개로 인터넷에 ‘공의포럼(公義論壇)’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 상황을 그곳의 법률 전문가인 수련생에게 알리자, 그들은 제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시간을 들여 법률을 연구하고 각종 법률 문서를 작성해 직접 공안국에 제출했으며, 여러 인권 변호사와 상담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6개월 동안 일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법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체 설법을 처음부터 다시 보다가 겨우 절반, 즉 대부분 1999년 이전의 설법만 봤습니다. 1999년 이후 어떻게 구세력을 부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을 보지 못했으니, 마음속에 당연히 그런 개념이 없었고 법리를 명확히 안 후의 정념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주지 감시’ 기간이 만료되기 며칠 전,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다음 날 검찰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타지 수련생을 찾아가 교류했고 그 수련생은 자기들 있는 곳에 잠시 머물러도 좋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날 밤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과 아이에게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그날 밤, 자정이 넘어 저는 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일곱 살 어린 딸이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다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습니다. 제가 “왜 아직 안 자고 있니?”라고 묻자, 아이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가 또 잡혀간 줄 알고 무서워서 못 잤어요. 엄마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저는 아이를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서둘러 불을 껐습니다. 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안지 마세요. 제가 발을 녹여줄게요. 어디 다녀왔어요? 몸이 얼음장 같아요.” 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계속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아까부터 계속 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엄마가 다시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 다시는 저를 떠나지 마세요, 네? 다음에는 일찍 돌아오세요. 경찰 아저씨들이 엄마를 잡아가는 게 싫어요. 너무 무서워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소리 내 울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몇 시간 뒤에 또 떠나야 하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르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면 부모님을 떠나게 된단다. 초등학교 때 사립학교에 가면 닷새에 한 번 엄마를 볼 거고, 중학교 때 사립학교에 가면 보름에 한 번, 고등학교 때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 거야. 대학교에 가면 반년에 한 번 집에 오게 되고, 나중에 네가 타지에서 일하게 되면 일 년에 한 번만 집에 올지도 몰라. 결혼하고 나면 엄마를 볼 기회는 더 적어지겠지. 그러니 너는 독립하는 법을 배워야 해. 엄마 없는 날에 일찍 적응해야 나중에 학교에 가서도 집 생각을 안 할 거야.” 아이는 알아들은 듯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엄마는 날이 밝으면 또 가야 해. 경찰 아저씨들이 엄마를 찾고 있어서 잡히고 싶지 않아.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집에서 꼭 몸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더는 말이 없었습니다.
새벽 2시가 넘어 제가 물었습니다. “자니?” 아이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모릅니다. 날이 밝자 저는 집을 떠났습니다.
떠도는 와중에 사부님께서 크게 보살펴주시다
날이 밝은 후 저는 타지에 도착했습니다. 타지 수련생은 안전을 고려해 저와 동행하지 않고 각자 이동해 특정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삼륜차를 불러 기사에게 저를 시장에 내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지만 수련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기다려도 오지 않자, ‘시장의 반대편인가? 기사가 잘못 들었나?’ 싶어 시장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곳은 아주 깊은 골목이었습니다. 저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참을 걸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파는 곳을 지나치며 무언가 사고 싶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수련생을 먼저 찾은 후 먹기로 했습니다.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에서 굶주린 채 사람을 찾고 있자니, 갑자기 세상을 떠도는 듯한 처량함이 밀려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제게 이런 경험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빌었습니다. ‘사부님, 그 수련생을 찾게 해주세요. 그 수련생도 분명 애태우고 있을 겁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길가에서 그 수련생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저를 한 방으로 안내하며 말했습니다. “이 방에서 지내세요.” 점심을 먹은 후 저는 그 방에서 먼저 정념을 발하고 나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콧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알고 보니 그 방에는 난방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감회가 들었습니다. ‘집에서는 20도인데도 방이 따뜻하지 않다고 남편에게 벽 단열 공사를 하자고 졸랐는데…’
잠시 버텨봤지만, 책을 든 손이 떨렸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했습니다. ‘사부님, 너무 추워서 책을 읽는 데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뜻밖에도 잠시 후 수련생이 와서 말했습니다. “조금 이따가 이사해요. 제가 아파트를 하나 구했는데, 거기가 더 은밀할 거예요.” 그곳은 새 아파트 단지였고 실내 온도는 27도 정도로 그전 방과는 천지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다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이렇게 따뜻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춥지만 않으면 괜찮으니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저녁에 저는 그 집의 어린 딸에게 물컵을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하며 아무거나 골라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 온 투명한 물컵에 우연히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세요(Don’t worry. Be happy)’라는 두 문장의 영어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흘렀습니다.
다음 날, 저는 이 수련생을 따라 그들의 법공부 팀에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가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함께 지낼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날 바로 그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녀의 집은 10여 도로 춥지도 덥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어 안정적인 거처가 생긴 셈이었습니다.
딸에 대한 정을 내려놓다
안정적인 거처가 생기자 저는 마음을 다잡고 법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딸에 대한 정이 솟아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지난 이틀간 분주하게 다닐 때는 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마음이 안정되자 딸의 모습과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떠올랐습니다. ‘딸은 어릴 때부터 대법 속에서 자라 착하고 사려 깊고 총명한 아이인데… 아직 저렇게 어린데 감당할 수 있을까? 매일 울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나?’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수련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자문했습니다. ‘아무개야, 수련을 선택했으니 모든 난을 담담하게 마주해야지. 지금 네가 딸과 네 세계의 무수한 중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중생을 위해 딸을 내려놓을 수 있니?’ ‘응!’ 망설임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을 끊고 더는 생각하지 말자.’ 놀랍게도 이렇게 선택한 후 마음속에서 정말로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련생에게 제 느낌을 교류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정말 빨리 내려놓으셨네요.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셔야 해요. 또 반복될 수 있거든요.” 저는 ‘내려놓았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한 시간 가부좌를 하는 동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한 시간 내내 흘렀습니다. 가부좌를 마친 후, 저는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전법륜』을 펴고 자녀에 대한 정을 내려놓는 것과 관련된 설법을 베껴 썼습니다. 한참을 베껴 쓴 후에야 마음이 진정됐습니다. 1999년 이후의 각지 설법을 공부하면서 저는 딸을 그리워하는 감정과 느낌이 진정한 내가 아니라 가짜 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구세력이 딸에 대한 저의 정을 이용해 저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며, 이 모든 생각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이 한 층의 법리를 깨닫자 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로 그런 느낌이 왔을 때, 저는 20여 분간 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내가 속았구나. 이건 내가 아니야.’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 딸은 대법어린제자이니 사부님께서 돌봐주실 거야. 이런 난과 시련을 겪는 것은 다 좋은 일이고,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네 번째로 그 느낌이 다시 왔을 때 저는 즉시 그것을 붙잡고 그 생각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이건 모두 내가 아니니 나를 교란하지 마라.’ 그 후로는 다시는 그 방면의 교란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그 물질을 제거해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의 얼음산이 녹다
남편은 학력이 낮습니다. 당초 중매인은 남편 집이 매우 부유하고 사람도 성실하고 정직하다고 했습니다. 교제해보니 그도 제가 수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난 지 1년 만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3일 만에 우리는 크게 다퉜습니다. 제가 임신했을 때도 그는 제게 심하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 후로 맞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저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자기 나름의 방식이었고, 말이 서툴러 주먹으로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이나 어른들에게도 그렇게 대했고, 아무 이유 없이 주먹을 날리곤 했습니다. 그는 힘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체력은 보통 사람 세 명을 합친 것과 같아서 맞으면 몹시 아팠습니다. 특히 술에 취하면 더욱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제가 방문을 안에서 잠그면 그는 문을 부수고 발로 차서 열었습니다. 그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저와 아이는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때는 심성이 높지 않아 마음속 괴로움이 컸고, 그저 억지로 참으며 그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그는 한 친척과 타지에서 동업을 하다가 큰 돈을 잃었습니다. 돌아온 후에는 집에서 2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밥도 차려줘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한 친척 집에서 1년 넘게 일했지만 월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그 사람과 동업했는데, 동업자가 돈과 장부를 모두 관리하면서도 매년 결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제 월급으로 이 집의 생활비를 충당했고,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늘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줄곧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不失不得)’의 법리로 자신을 단속했습니다. 원래 우리는 2020년 말에 동업자와 결산해서 손해를 봤는지 이익을 봤는지, 손해는 얼마고 이익은 얼마인지 파악하기로 했습니다. 이야기가 잘 안 되면 동업을 그만두고 손해를 감수하기로 남편도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연말이 되기 전에 제가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게 돼 자연히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집을 떠난 후, 남편은 제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자상하게 대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의 비난에도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늘 “이건 그 사람의 신앙이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경찰의 위협과 가택수색에도 그는 의연하게 맞서며 “내 아내는 법을 어기지 않았소. 당신들이 사람을 몰아낸 거니, 내 아내를 돌려주시오”라고 따지며 경찰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는 또 아이들에게 “언제라도 네 엄마를 원망하지 말고 엄마 일에 관여하지도 마라. 신앙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는 또 자기 실명으로 저를 불법 체포한 국보 대장을 고소했고, 베이징을 비롯해 현지 검찰원, 감찰위원회 등에 수십 통의 우편을 보냈습니다. 그는 또 직접 타지 검찰원에 가서 법률 문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가 가정에 끼친 손실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없었고, 오히려 제게 당부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야. 설령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나오면 여전히 대장부니, 나는 당신과 이혼하지 않을 거야. 아이도 걱정하지 마. 누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고, 할머니가 잘 돌봐줄 거야. 만약 당신이 오랫동안 떠도는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괜찮아. 나는 개의치 않고 당신을 부양할게.”
수련하지 않는 일반인으로서 그가 한 행동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제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주변 수련생들도 그의 행동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이번 난을 통해 그에 대한 제 마음속 얼음산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녹아내렸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원래 그는 이렇게 좋은 생명이었구나!’ 우리가 금생에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인연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선연(善緣)으로 만났고, 그는 저의 수련을 돕고 저를 성취시키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저를 단련시켰고, 시련의 시기에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이전에 그가 제게 주었던 억울함과 고통을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게는 그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그가 계속 동업하고 싶으면 하고, 저는 더는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인연 관계일 뿐입니다. 이번 생은 속세에서의 마지막 생이니, 갚아야 할 것은 갚고, 끝내야 할 인연은 끝내며, 속세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거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려 합니다.
구세력의 안배를 승인하지 않다
수련생 집에서 진지하게 법공부를 통해 저는 정법 수련에 관한 많은 법리를 깨달았고, 구세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단계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안으로 찾으며 제가 인식한 집착심을 제거하자, 사부님께서도 꿈속에서 깨우쳐주시고 제게서 많은 나쁜 것들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명확한 길은 없었지만, ‘이것은 구세력의 안배이니 나는 부정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은 굳게 믿었습니다.
수련생 집에서 열흘 남짓 머문 후 그 수련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협조인이 당신을 위해 보모 일자리를 하나 찾아줬는데, 가보시겠어요?” 저는 “안 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 날, 그 협조인이 와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들 집에 계속 머무는 것도 장기적인 해결책은 아니에요. 제가 나이 든 수련생을 돌보는 보모 일을 찾아놨는데, 거기서는 법공부도 하고 월급도 받을 수 있어요.” 저는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셋째 날, 또 다른 수련생이 와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당신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수배될 수도 있어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부정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장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아.’ 동시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집주인이 나를 더는 머물게 하고 싶지 않은 건가? 그럼 떠나야지. 나는 다른 지역의 수련생도 알고, 갈 곳도 여러 군데 있어. 정 안 되면 현지로 돌아가면 돼. 내 몸 하나 있을 곳은 있겠지.’ 저는 울면서 그 수련생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조용한 법공부 환경만 원해요. 지금은 법공부만 하고 싶고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 수련생은 “지금 처지에는 공주라도 거지 노릇을 해야지요”라고 말하고는 몇 마디 더 하고 떠났습니다. 저는 그 수련생이 제가 고생하기 싫어한다고 오해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 마음속 생각은 ‘보모 일을 하면 마음이 많이 분산될 텐데, 지금 내 마음의 감당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더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세 번이나 장기간 집을 떠나 떠도는 것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자, 그날 밤 꿈을 꿨습니다. 꿈에서 제가 집에 돌아가니 가족이 “한 달이나 나갔다 왔니?”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생각하다가 “아니요, 이제 겨우 20일 됐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깨어나서 계산해보니 나흘 뒤면 20일째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빨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9일째 되던 날, 현지 수련생에게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좋은 거처가 마련됐고 현지에서는 모든 것이 편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일 돌아가고 싶었지만, 집주인 수련생이 하루만 더 머물다 다음 날 가라고 간곡히 붙잡았습니다. 저는 문득 사흘 전의 꿈이 생각났습니다. 20일째에 돌아간다고 했으니 바로 내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련생의 청을 받아들이고 그 꿈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도 매우 신기해했습니다. 그녀는 “만약 안 되면 다시 돌아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시 안 올 거예요. 거기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현지로 돌아온 후 제가 불법 수배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현지 수련생들도 매우 조심했고 저 역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먹을 것이 없어 라면 한 봉지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나중에는 라면도 떨어지자 수련생이 작은 빵 한 상자를 보내주었고, 그것이 제 식량이 되어 아껴 먹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수련생에게 문자를 보내 먹을 것을 좀 더 보내달라고 할까? 채소와 콩을 좀 사다 달라고 할까?’라고 생각하고, 메일함에 사야 할 물건 목록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내일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면, 수련생에게 사달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필요 없지. 집에는 모든 것이 있을 테니까. 그럼 수련생에게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 상황이 장기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는 메시지를 전부 삭제했습니다.
이렇게 부정한 후 뜻밖에도 다음 날, 남편이 제게 많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그러게, 내가 왜 당신한테 먹을 것 좀 갖다 줄 생각을 못 했지?” 저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지난 며칠간 억제돼 그 방면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가 장기적인 박해를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정한 후 이 고비를 넘자 사부님께서 저를 돌봐주셨습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구세력의 사유가 많아 인식하지 못하기에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노출될까 봐 커튼을 24시간 내내 쳐놓았고, 심지어 화장실도 침실 안에서 해결하며 소리가 새어 나가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법공부, 연공, 발정념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몇 달을 버텼습니다.
정념은 법에서 나온다
저는 전체 설법을 한 번 다 보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마음속에서 ‘나는 원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솟아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생각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진실하고 절실한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또 진지하고 차분하게 설법을 한 번 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 차례의 법공부는 제가 지난 20여 년간 배운 법에 대한 깨달음보다 훨씬 더 깊고 많았습니다. 이전의 법공부는 모두 형식적이었고, 절반 이상은 졸면서 보냈습니다. 『전법륜』을 공부할 때도 어쩌다 한두 번 법리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법륜』을 공부하면 정말로 다른 층차의 이치를 볼 수 있고, 그 구절의 법 뒤에 있는 또 다른 한 층의 함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체 설법을 한 번 다 본 후, 저는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로 책 한 권 한 권씩 차례로 읽었습니다. 정말 한 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점차 제 정념은 강해졌습니다. 저는 ‘소극적으로 박해를 감당해서는 안 되고 박해에 맞서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현지에서 진상 전단지를 제작해 사람을 구하다
타지 수련생의 제안으로, 저의 박해 사실을 법률 조항과 결합해 전단지로 만들어 현지에 대량으로 배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박해 경위를 작성해 타지 수련생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이 정리한 후 제가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다시 확인했습니다. 제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후 현지 수련생에게 보여주자, 뜻밖에도 친정 식구인 수련생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이걸 배포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설명하겠어?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묻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대법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저 집은 파룬궁을 수련하더니 저렇게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등등.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너를 동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써서 그와 교류했고 다른 수련생들도 그와 교류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점차 인식이 제고돼 더는 배포를 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이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것도 부적절하고 저것도 부적절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심성을 지키며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교류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수정했습니다. 여러 번 수정한 후 거의 마무리될 무렵, 또 다른 수련생이 “명혜망의 검토를 거쳐야지, 개인적으로 정리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명혜망에 발표된 후에 배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혜망에 원고를 보내 검토를 요청하고 명혜망에 발표되기를 바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받은 답변은 ‘현지 전단지는 자체적으로 판단해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련생들의 그 방면에 대한 걱정과 저지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수련생이 참여해 일부 내용을 추가하고 일부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수정한 다음 날, 그녀는 또 마음이 바뀌어 어디어디가 부적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심성을 제고할 좋은 기회로 삼고, 제 용량이 얼마나 큰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지행(天地行) 사이트에서 직접 문서를 편집하고 수정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니 더는 타지 수련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현지 수련생이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은 제가 바로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키보드라고 생각하고, 원칙적인 문제가 없는 한 그냥 수정했습니다. 저는 제 용량을 넓히고 이 고비를 반드시 잘 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고가 확정된 후에도 열 번 이상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배포된 전단지도 여러 버전이 있었고, 심지어 제목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한번은 제목을 바꿀 때, 저는 그녀의 요구대로 바로 수정하지 않고 “제목을 바꾸지 않는 게 어떨까요? 큰 제목을 바꾸면 이미 본 사람들이 비슷한 내용인데 제목이 두 개인 것을 보고 우리가 전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련생은 동의하지 않고 이 제목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두말없이 바로 수정했습니다. 저는 ‘무조건적으로 협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두려움이 많은 한 수련생을 교란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교란이 이 전단지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고, 제게 배포를 중단하라고 모두에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계속 배포한다면 모든 결과는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말을 전달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법으로 가늠해보았습니다. ‘이 일은 법에서 긍정하는 것이고 틀리지 않았다. 이것은 배후의 사악을 건드린 것이니 이럴수록 사악을 제거할 가장 좋은 기회다.’ 그래서 저는 두 명의 수련생과만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교류했고 그 수련생들도 배포해야 하며 이럴수록 더 배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수련생들도 다른 형태로 교란을 당해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됐습니다. 그 후로 수련생들은 배포를 줄였습니다.
걸어 나와 중생을 구하다
얼마 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나가서 배포하면 안 되지? 내 일을 쓴 것이니, 중공이 어떻게 거짓 증거를 조작하고 깡패 같은 수단으로 선량한 사람을 박해하는지 국민에게 알릴 책임이 내게 더 있는 것 아닌가?’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두렵니?’ ‘조금.’ ‘나가야 할까?’ ‘응.’ ‘그럼 갈 거니?’ ‘갈 거야!’ 그래서 저는 수련생과 언제 나가서 배포할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남편이 제게 경찰이 저를 찾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자료를 배포하러 나가려는 것을 겨냥한 것이고, 제가 과감히 나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나갔고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우리는 다음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틀도 안 돼 아주 멀리 떨어진 한 수련생이 제게 메시지를 보내 어제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꿈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을 할 때 이성적으로 하고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녀가 그 꿈을 꾼 날 밤이 바로 제가 자료를 배포하러 나간 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지? 사부님께서 깨우쳐주시는 건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틀렸나? 안전에 주의하지 않은 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법으로 가늠해보니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제 상황이 특수하긴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제게 정념정행(正念正行)하라고 하셨습니다. 제 행동은 바로 정념정행이며, 저는 행동으로 구세력을 부정해야 하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분명 구세력이 소란을 피워 제게 두려움을 생기게 하고 감히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짓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나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갈 것이니 구세력은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에도 저는 약속대로 나갔습니다.
이번에 배포할 때는 마음이 조금 긴장됐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신의 상태를 보여야 해. 두려워하지 말고, 나는 어디에 차가 있는지만 보고,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는 보지 않겠다.’ 그렇게 배포하다가 막 한 차에 자료를 올려놓았는데, 그제야 차 안에 사람이 가득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운전기사에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고는 자리를 떴고, 운전기사도 바로 나와서 자료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만약 이전에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한 차는커녕 한 사람만 타고 있었어도 직접 가서 배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 차에 탄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관념이야말로 중생이 구원받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해받는다는 사유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걸어 나오다
제 친정 동네에 사는 가까운 친척 한 분이 음력 2월 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위독하실 때 저는 가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친척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일반인이라 제가 박해받을까 봐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친척인 수련생은 전단지가 이미 배포돼 마을 사람들이 제 상황을 알게 됐으니, 제가 갑자기 나타나면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신고할 수도 있고, 우리 마을에 이미 정보원이 심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등의 속인적인 생각 때문에 저의 안전을 위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가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 공교롭게도 한 수련생이 타지 수련생 집에 볼일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해서 저는 따라갔습니다. 일을 마친 후 약 30분간 교류했는데, 그 수련생의 정념은 매우 강했고 동시에 제 정념도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을 할 때 이렇게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이 일이 사적인 것인지, 아니면 타인을 위한 것인지?” 이 한마디가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타지 수련생에게 오늘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 일에 제가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수련생은 대략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결정을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층차에는 다른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느 층차에 서서 문제를 보느냐에 달렸습니다. 높은 층차에 서서 본다면 가야 하지만, 이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가 가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을 보전하려는 사적인 마음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간다면 그것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의 중생들이 대법에 대해 오해하게 둘 수 없다. 그들은 나와 가장 큰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는 내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품자 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악이 두려워하는 동시에 저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사람과 신의 차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네가 쿵쾅거려도 나는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타지 수련생이 갑자기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꼭 갈 거라고 생각해요.” 짧은 말이었지만 제 마음속 깊이 와닿았고,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련생에게 가장 큰 격려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바로 돌아가신 친척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가까운 친척들은 뜻밖이었지만 저를 보고는 모두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많은 친척으로부터 “아무개는 왜 안 왔니?”라는 질문을 받고 얼버무렸기 때문입니다. 제 친척 수련생도 제가 온 것이 옳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친척이 “너는 다른 방에 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안 가요. 저는 여기서 빈소를 지킬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려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웠습니다. 나중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러 왔지? 법을 실증하러 온 것 아니었나? 내가 이렇게 계속 엎드려 있으면 그들은 내가 오지 않은 줄 알거야.’ 이왕 왔으니 당당하게 법을 실증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고, 누구를 만나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중에 바쁘지 않을 때는 일어나 다른 친척들 앞으로 다가가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눴습니다. 점차 저는 마당에도 나가 거닐 용기가 생겼고, 그렇게 더 많은 사람과 구경 온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속 두려움은 조금씩 해체됐고, 저는 제가 온 것이 정말 옳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살아야 할 삶과 상태였습니다. 대법제자가 주인공인데 누가 감히 관여하겠습니까!
그렇게 그곳에서 꼬박 사흘을 머물다가 발인을 마친 후에야 돌아갔습니다. 발인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이미 활짝 열려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각종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장지에서 저는 들판에 서서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마음이 전에 없이 가볍고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야 할 삶이다. 나는 더는 구세력의 안배를 감당하지 않을 것이며, 생각 속에서 박해받는다는 사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부터 나는 생각 속에서 박해의 그늘을 벗어나 사람 속에서 걸어 나와야겠다.’
그날부터 저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저는 걸어 나와 각종 부담과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고, 모든 방면에서 돌파해 정념정행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이 공간에서 제 사람의 몸은 아직 명의상 자유를 회복하지 못했고 공안국의 수배령도 여전히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법이 필요하다면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것이며, 행동과 생각에서 부정적인 사유에 이끌리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으며, 가족들도 모두 이해하고 지지해줍니다.
1년여의 시간은 길지 않지만 제 생각 속에서는 사람과 신 사이의 전환을 겪었습니다. 물론 이 1년여 동안 겪은 일은 훨씬 더 많지만 저는 그중 대표적인 몇 가지만 들어 수련생들과 공유했습니다.
이 시련은 제 평범한 삶에 급제동을 걸어 저를 사람 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제 몸의 수많은 완고한 오물을 부수어 진정한 자아가 대법 속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사부님에 대한 저의 감사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마치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두세 살배기 아이를 이끌 듯 제가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지 이끌어주셨고, 제가 넘어졌을 때는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 계속 가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부님의 손길은 한 번도 저를 떠나지 않으셨고, 추위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셨으며,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해주셨고, 무력함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진흙탕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정념을 굳건히 하고 걸어가야 할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저의 변화는 법공부에서 비롯됐습니다. 대법의 법리가 저를 씻어주고, 한 층 한 층 깨끗하게 해주셨으며, 동시에 더 많은 법리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저는 또한 제 생명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알게 됐고, 동시에 깊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어찌 이리 영광스럽게 사존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어떤 인연으로 이토록 큰 영광을 누리게 됐는지, 사부님의 자비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이 만고의 기연을 더욱 소중히 여겨 서약을 이행하고 자신을 착실히 수련해야겠습니다!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시정을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0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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