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세 호주인의 잊을 수 없는 중국 여행

[밍후이왕][밍후이 기자 지전옌(纪珍妍)]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호주인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 사이먼 베레사카는 2021년 7월 16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반(反)박해 집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어렸을 때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고, 베이징에 파룬따파를 위해 호소하러 갔던 최초의 서양인 중 한 명이다.

2021년 7월 16일 워싱턴 D.C. 집회에서 연설하는 사이먼 베레사카

전법륜을 읽다

사이먼과 그의 쌍둥이 동생 니콜라스 베레사카(닉)는 1997년 원예회사를 운영했다. 사이먼은 태극권을 배웠는데, 태극권 강사가 50대 중국인 여성 그레이스 첸이었다. 그녀가 몇 달 동안 파룬따파 수련을 한 후 수강생들에게 파룬궁을 추천했다. 사이먼과 케이티(아나 카테리나 투르쿠)를 포함한 수강생 절반이 관심을 보였다. 몇 년 후, 케이티는 닉의 아내가 되었다.

사이먼은 간 출혈, 요통, 관절통을 앓고 있었다. 그는 부모가 이혼한 후 마약에 빠져 건강이 더욱 나빠졌고, 몇 년간 치료에 신경을 썼지만 많은 돈만 썼을 뿐 좋아지지 않았다. 태극권에 입문해 8년간 했으나 제한적인 효과만 보았을 뿐이다. 사이먼은 항상 더 나은 방법과 영적인 길을 찾고 있었다.

태극권 강사가 몇 달간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된 사이먼도 영문판 전법륜(轉法輪)을 구했다. 사이먼은 말했다. “나는 1998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전법륜을 처음 읽었을 때 깊이 감동했다. 리(李) 사부님께서 정법(正法) 수련을 가르치셨음을 깨닫게 되어 당장 태극권을 그만뒀다.”

태극권 강사 그레이스는 태극권 강사를 그만두고, 파룬따파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강의를 틀어주는 파룬따파 9일 무료학습반을 열었다.

멜버른에서 연공하는 사이먼과 닉

파룬따파 다섯 가지 공법을 시작한 후, 사이먼의 모든 병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그는 파룬따파가 그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그 후, 사이먼은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활에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으로 대하면 언제나 문제가 빨리 해결됐다. 그는 정원사로 일하므로 중노동을 할 때도 많지만 연공을 하게 되면 모든 피로는 말끔히 사라졌다.

동생 닉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닉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 알 수 없는 심한 다리 통증으로 고통받았다. 물리치료 등 다양한 치료 방법을 시도했어도 효과가 없었다. 좌절감에 빠져 ‘정원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닉은 1999년 초 어느 날 사이먼의 집에 갔다가 파룬따파 수련생들을 만났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매우 높아서 마치 내가 높은 세계로 진입해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진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닉은 사부님의 강의 영상을 보게 되었고, 수련을 시작하게 되어 일상생활에서 진선인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질병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한두 달 수련했을 뿐인데 그동안 질병과 고통을 전부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닉은 “나는 수련 후 고난에 직면하면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파룬따파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가족은 내가 과거에는 어떠했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나를 대견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케이티는 사이먼보다 먼저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태극권 강사가 전법륜을 추천하자, 다음날 즉시 책을 샀다. 케이티는 “1997년 처음 전법륜을 읽을 때 꼬박 이틀 밤낮에 끝까지 다 읽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비밀임을 금방 깨달았다”고 말했다.

케이티는 대학생 때 불교를 공부하며 영적인 내용의 책을 많이 읽었다. 한때는 수녀가 될 생각도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꿈을 여러 번 꾸기도 했지만, 누구도 진정한 자신의 사부라고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행로로 인도해 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대법을 만났을 때, 대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란 걸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대법을 소개하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법을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기로 결정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중국공산당)은 중국에서 파룬따파 수련자들에게 광란의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 3명의 호주 수련자도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방해받게 되었다.

파룬따파에 대한 중공의 탄압은 점점 심해졌다. 잘못된 결정을 철회하고 많은 정치 캠페인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지 말라고 중공 정부에 청원하기 위해 수천 명의 중국 수련자가 베이징으로 향했다.

멜버른에 거주하는 사이먼과 다른 수련생들은 중국 수련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다. 중공은 계속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바꿔 파룬따파와 사부님을 비방했다. 그것들의 잘못된 선전은 서방 언론에까지 보도됐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중국의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이 납치되고 고문당하는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

사이먼, 닉, 케이티와 몇 명의 다른 수련생은 1999년 12월 11일과 12일에 개최한 ‘아시아태평양 파룬따파 심득교류회’에 참가하기 위해 홍콩에 갔다. 그 교류회에는 중국, 홍콩, 일본, 호주, 대만, 싱가포르, 뉴질랜드, 영국, 스위스, 프랑스, 미국 등 20여 개국에서 1천여 명의 수련자가 참석했다.

각국 대표들이 신화통신사 앞에 모여 중공 정부와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달했다. 공개서한에는 “파룬따파는 정의롭다; 리홍쯔 사부님의 결백을 회복해야 한다. 파룬따파 수련생들에 대한 잔인한 박해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파룬따파 수련자들에게 수련이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는 등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이먼은 1999년 12월 11일 홍콩 신화통신사 맞은편 단체 연공에 참가하다

홍콩에서 돌아온 그 젊은 수련생 3명은 중국 수련자들을 도울 방법, 중공 정부에 해외수련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호주인들에게 중국의 실정을 알릴 방법 등을 생각하다가 결국 그들은 베이징에 가기로 했다.

케이트는 “중국에 가면, 중국 밖에서 수련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 세계의 파룬따파 수련자들이 자국 정부에 중공의 박해를 중단하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사실도 알리고 싶었다”라고 했다.

그들은 정부의 관심을 끌기 위해 톈안먼 광장으로 가서 현수막 펼치는 것을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면 조용히 추방당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결국, 이들은 중공 정권에 탄원서를 제출해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전달하기로 했다.

그들은 탄원서를 작성했다. “파룬따파는 정치운동이 아니다. 정치나 명예에 관심 있다면 파룬따파 수련자가 아니다. 파룬따파가 비방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 파룬따파가 우리에게 준 것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먼, 닉, 케이티는 서방의 파룬따파 수련자들 중 처음으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잊을 수 없는 중국 여행

이들은 2000년 초 베이징에 도착해서 18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었고, 그녀의 부모는 청원하다가 중공에 납치되었다. 소녀가 다음날 그들을 천안문 광장으로 안내했다. 분위기는 긴장되어 있었고, 광장 곳곳에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베이징의 사이먼, 닉, 케이티

호주의 한 중국인 수련생이 사이먼에게 연락하여 20여 명이 모이는 지역 수련자 회의에 참석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참석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바로 그 회의에 참석했던 수련생 20명이 중공 경찰에게 납치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국 수련생들이 늘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 사이먼 일행은 어느 부서에 청원서를 제출해야 할지를 망설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이먼은 홍콩에서 알게 된 유럽인 교사가 베이징에 있다는 게 생각나서 즉시 그에게 연락했다. 그 교사는 전법륜을 읽은 적 있는 사람으로 수련생을 이해하고 있었고,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가 베이징의 스페인어 매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박식했으므로 그녀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도청을 우려해 5개 국어로 통화했다.

그 교사 부부는 닉에게 탄원서를 신화통신에 전달하라고 제안했다. 교사 부인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 주재 모든 서방 언론사에 청원서를 팩스로 보낸 후 다음날인 2000년 1월 9일 오전 10시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기 위해 신화통신사로 갔다.

그들은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 호주에서 공부한 호텔 사장을 우연히 만났다. 청원서 제출하기 전날이고 중국 체류 마지막 날 저녁 사이먼 일행이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호텔 사장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호텔 사장의 성격이 쾌활하고 믿을만하다고 생각되어 그들은 사장에게 계획을 말해주었을 때 뜻밖에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무례하고 성급한 모습으로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중국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그 직전에만 해도 “중국 정치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중국공산당의 정책 중 일부를 승인할 수 없다”라고까지 말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우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지 말라”고 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만난 것 때문에 사업상 수백만 위안을 손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호텔 사장은 중공을 두려워하며 “당신들이 계속, 이 호텔에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다음 날 아침 경찰서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호텔 사장은 갑자기 한밤중에 당장 나가라며 “다른 호텔로 옮기라”고 했다. 그는 “어떤 일에도 연루되고 싶지 않다”면서 택시를 불러 “한 호텔로 태우고 가라“며 택시기사에게 쪽지를 주었다.

그들 3명은 중국 체류 마지막 날 아침 신화통신사를 찾아갔고, 이미 서방언론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케이티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우리가 파룬따파를 말하고 청원서를 접수창구에 제출하자, 담당자가 즉시 수화기를 들었고, 이어서 여러 명이 우리에게 질문을 했으며, 곧이어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은 여권과 항공권을 압수한 후 한 경찰관이 유창한 영어로 심문했다. ‘중국에서 누구를 만났고, 어디에 머물렀으며, 무엇을 했는지’를 물었다.”

3명의 외국인 수련자가 경찰에 연행된 후 건물 밖으로 나오는 걸 보지 못한 서방 언론 기자들은 즉시 이 소식을 타전했다. 사이먼의 아버지는 그들이 베이징에 갔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았다.

호주 일간지 디 에이지(The Age)가 사이먼, 닉, 케이티의 베이징행을 보도했고, 케이티가 청원서를 건네는 장면의 사진이 오스트레일리아 연합통신(AAP)에 실리다

그들은 5시간 동안 구금되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경찰에게 계속 말했다. “ 파룬따파는 좋다, 파룬따파는 유명하며, 전 세계에서 수련하고 있다.”

이들은 경찰차에 태워져 신화통신사를 떠났는데, 경찰은 “비행기 출발 시간이 촉박해 일단 공항 사무실로 데려가서 계속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공항에서 중국어로 작성한 진술서에 서명을 요구했다. 이들은 중국어를 읽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서명을 거부했다. 이들은 ‘집에 갈 수 없다고 해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들이 파룬따파를 위한 청원을 하기 위해 중국에 간 첫 서양인들이어서 중국 경찰은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그들이 계속 진실을 말하며 경찰들의 양심을 일깨워준 탓인지 경찰은 난폭하게 대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여권을 돌려주어 예약 시간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사이먼 일행이 멜버른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여행 기사가 디 에이지 신문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외 다른 주류 매체들도 그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동안 걱정하고 있던 사이먼 가족은 모든 과정을 들은 후 대견스럽게 여겼다.

그들 3명은 호주 정부도 이 문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른 수련자와 함께 호주 의회 의원들에게 중공의 파룬따파 박해 사실의 진상을 계속 알려주었고, 다양한 방법으로 호주 사람들과 언론에 중공의 파룬궁 박해 사실을 알렸다. 사이먼, 닉, 케이티는 22년 넘게 진상을 알리고 박해에 항의해 왔다.

2018년 뉴욕 퍼레이드의 사이먼과 닉의 모습

배경

파룬따파 (파룬궁으로도 알려짐)는 1992년 중국 창춘시에서 리훙쯔(李洪志) 선생에 의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었다. 현재 전 세계 140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이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에 입각한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건강과 행복을 경험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수괴 장쩌민은 이 수련법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중공의 무신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1999년 7월 이 수련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밍후이왕(Minghui.org)이 지난 22년간 박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한 수련생 숫자만 수천 명에 달하며,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중국공산당이 구금된 수련생들의 장기 적출을 허가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이 수련생들은 장기 이식 업계를 위한 인체 장기 출처로서 살해당했다.

장쩌민의 개인적인 지시로 중공은 경찰과 사법체계를 무시한 ‘초법 권한’의 불법 보안조직인 ‘610 사무소’를 설립했다. 이 조직의 유일한 기능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1년 8월 14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14/429575.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8/16/1946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