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광자, 견자, 향원과 현자의 차이

글/ 명월(明月)

[명혜망] 지금 ‘덕행’, ‘덕을 쌓다’, ‘선을 쌓다’와 같은 말들이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 다시 들어오고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오늘날 사회가 ‘열 가지 독이 모두 갖춰졌다’고 해도 부족할 만큼 타락한 데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인들이 이미 ‘좋은 사람’의 기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됐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선덕(善德)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종이 인형이나 단순한 꼬리표가 아니다. 오늘은 덕과 관련된 여러 인물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며, 전통문화 속에서 이 단어와 관련된 사람과 일들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전통문화를 말할 때, 공자와 맹자는 매우 중요한 유가 인물이다. 공자(기원전 551년~479년 4월 11일)는 노나라 사람으로, 춘추시대 유가의 대표 인물이다. 맹자(기원전 372년~289년)는 추나라(지금의 산둥성 추성) 사람으로, 전국시대 유가의 대표 인물이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孔伋)의 제자였고, 맹자에게는 만장(萬章)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만장이 맹자에게 물었다.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실 때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우리 고향 사람들은 호방하고 단순하며, 적극적으로 진취하고 초심을 잊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공자는 진나라에 계셨는데 왜 노나라의 호방한 사람들을 그리워하셨습니까?”

맹자는 대답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도에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결국 남는 것은 오직 광자(狂者)와 견자(獧者, 마음이 좁고 성급한 자)뿐이라고 하셨다.”

만장이 다시 물었다. “감히 여쭙건대, 어떤 사람이 광자라 할 수 있습니까?” 맹자는 대답했다. “그들은 뜻이 크고 자만하며, 늘 ‘옛사람은 이랬다, 저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상도(常道)로 살펴보면, 행동이 그 말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광자조차 찾지 못할 때는 견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위에서 보면, 광(狂)과 견(獧)은 상대적이다. 생활 속의 광자는 원대한 지향을 가졌지만 실천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들은 자신들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불평하는데, 이것 역시 일종의 책임 회피다. 견자는 신중하고 협소하여 어떤 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 한다. 현대 중국어에서 ‘견급(獧急)’, ‘견협(獧狹)’은 사람의 도량이 좁고 성질이 급한 것을 가리키며, ‘견개(獧介)’, ‘견오(獧傲)’는 사람이 결백하고 성정이 곧은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않는 현자[賢士, 좋은 사람]에는 미치지 못한다.

공자는 당연히 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할 때는 차선으로 고향의 광자와 견자를 떠올렸다. 인품의 등급을 논할 때, 공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예의를 잃은) 사람을 두고 내가 유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경우는, 아마도 고향의 ‘호호선생(好好先生,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덕을 해치는 자들이다.” 즉 공자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은 바로 향원(鄕原), 즉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었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공자가 인품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정한 관용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타인의 품성에 대해 완벽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위선적이고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으려는 ‘호호선생’에 대해서는 매우 날카롭게 비판했다. 공자가 왜 이런 사람을 혐오했을까? 이들은 겉보기에는 도덕적인 것 같지만 사실 매우 기만적이며, 공중도덕을 해치는 일을 자주 한다. 실제로 ‘향원’은 누구에게나 좋은 척하는 게 아니라, ‘선택적으로 좋은 척’하며 아첨과 아부를 통해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한다. (물론 ‘향원’ 외에도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여러 부류가 있는데, 이들 역시 ‘덕을 해치는 자’ 역할을 한다.)

맹자는 말했다. “이런 사람은 비난하려 해도 단점을 찾을 수 없고, 욕하려 해도 빌미가 없다. 단지 시류에 휩쓸릴 뿐이며, 평소에는 충성스럽고 성실해 보이고, 일처리도 바르고 청렴해 보인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요·순(堯舜)의 도(道)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덕을 해치는 자’라 한다. 공자님은 겉은 비슷하나 본질이 다른 것을 싫어하셨다. 강아지풀을 혐오하는 것은 그것이 벼와 헷갈릴까봐, 비뚤어진 재능을 혐오하는 것은 인의(仁義)를 흐릴까봐, 허풍을 혐오하는 것은 신의를 어지럽힐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군자는 모든 것을 바른 길로 돌려놓으려 할 뿐이다. 길이 바르면 백성이 분발하고, 백성이 분발하면 사악이 사라진다.”

공자가 공중도덕과 사회 풍조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관련된 두 가지 작은 이야기를 더해보겠다.

공자 시대에 노나라에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외국에서 노나라 사람이 노예가 된 것을 발견해 그를 구해 자유를 되찾게 해주면, 노나라에서 그에 소요된 비용과 노력을 보상하고 상을 내렸다.

자공(子貢)은 공자의 뛰어난 제자로, 언변이 뛰어나고 일 처리가 유능해 노나라·위나라의 재상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상업에도 능해 막대한 재산을 가졌고,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유한 인물이다. 어느 날 자공이 외국에서 노예가 된 노나라 사람을 구해냈으나, 노나라의 보상과 상을 거절했다. 공자는 이를 알고 자공에게 말했다. “자공아, 너의 행동은 옳지 않다. 반드시 보상과 상을 받아야 한다. 네가 거절하면, 앞으로는 아무도 외국에 가서 노예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 중 십철(十哲)에 속하는 인물로, 공자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자로는 생활이 궁핍했으나,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벼슬길도 마다했다. 어느 날, 자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고, 그 사람은 감사의 뜻으로 소 한 마리를 선물했다. 자로는 이를 기꺼이 받았고, 공자는 이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누구나 사람을 구할 것이다.”

자공과 자로의 사례에서 공자의 안목이 잘 드러난다. 도덕을 전제로 할 때, 사회의 공덕과 영향력이 개인의 명예와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선악이 뒤바뀌고, 시비가 전도돼 사람들 사이의 상호 해악이 일상화됐다. 모두가 서로를 경계하며 적으로 여기고, 물질적·정신적 환경의 악화는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는 각종 난치병, 불치병을 낳았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직 모두가 스스로를 닦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끊임없이 배우며 살아갈 때, 세상은 다시 좋은 사람의 세상, 선이 멀리 퍼지고 악이 물러나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도덕의 힘은 안에서 밖으로 퍼지며, 한 사람에게서 그렇고, 한 사회, 한 국가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아니며, 더더욱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자신의 심신건강, 가정의 화목, 국가의 부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옛말에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려 태산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잘난 체 하는’ 습관은 바로 그 나뭇잎으로, 우리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나뭇잎이자 황무지, 사막이다. 진선인(眞·善·忍)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정확한 기준을 찾을 수 있으며, 매일 꾸준한 실천과 학습, 이해를 통해 사람은 자연스레 사회와 천지, 우주가 인정하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27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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