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혼인의 예와 부부의 의리(하)

글/ 여남(予楠)

[명혜망] 중국공산당(중공) 집권 후, 혼인 의례는 ‘개조’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혼례복의 변화뿐 아니라 증혼인도 하늘, 땅, 부모에서 ‘당지부 서기’로 바뀌었고, 결혼 날짜는 ‘5·1’, ‘10·1’ 같은 중공 기념일로 정해졌으며, ‘천지에 절하기’는 ‘마오 초상에 절하기’로 대체됐다. 그러나 중국 고대에는 혼례를 ‘천지에 절하기(拜天地)’라고 불렀다.

앞 글에서 ‘혼례가 예의 근본이 된 유래’와 ‘천작지합(天作之合, 하늘이 지어 준 결합)’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명나라 유정식(劉庭式), 청나라 진잠원(秦簪園)의 긍정적 사례를 다뤘다. 이제 당나라 혹리(酷吏) 내준신(來俊臣), 저명한 시인 최호(崔顥)의 부정적 일화부터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전편에 이어)

4. 혼인에 대한 태도가 품행의 양심저울이 되다

혼인을 대하는 태도는 한 사람의 품행을 재는 ‘양심저울’이 됐다. 수천 년 동안 혼인의 예를 지키는 사례들은 대대로 전해졌으며,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주변 집들이 하나둘씩 ‘천지에 절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면서 혼인이 인간사의 대사(大事)임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따라서 인연을 배반하는 것은 사람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이 됐고, ‘진세미(陳世美)’의 배은망덕함은 누구나 아는 일이 됐다.

1) 내준신이 아내를 버리고 재혼해 측천무후를 놀라게 하다

『이십사사·구당서(二十四史·舊唐書)』에 따르면, 당나라 측천무후 때 내준신(來俊臣)은 유명한 ‘혹리(酷吏)’로 형법을 왜곡하고 충신을 모함해 모두가 두려워했다. 대신 이소덕(李昭德)은 식견 있는 선비로 매번 조정에서 그들의 위법 행위를 상주했지만, 내준신과 그 일당은 귓등으로 듣고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했다.

한번은 측천무후가 재상들에게 내준신이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일을 논의하게 했는데, 측천무후가 보기에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아내를 버리려면 ‘칠출(七出)’ 조건이 있어야 했다. 즉 자식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시부모를 모시지 않거나, 말다툼이 심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질투가 심하거나, 악질(惡疾)이 있는 일곱 가지 경우에만 아내를 내칠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매우 심각한 배덕 행위였다. 이소덕이 여러 재상에게 말했다. “작년에 내준신이 도적처럼 태원 왕씨(太原王氏)를 강제로 취한 것만으로도 이미 국가를 크게 욕보였습니다. 오늘 아내를 버리고 재혼한다니, 또다시 나라를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의 중신으로서 까닭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예를 잃고 절개를 어기는 일입니다.” 이후로 내준신의 기세는 더 이상 사납지 못했다.

2) 최호의 무절제한 혼사에 사람들이 멀리하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따르면, 당나라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최호(崔顥)는 젊어서부터 출세했으나 행실이 방종하고 술과 도박을 즐겼으며, 무엇보다 여색을 절제 없이 탐했다. 아내를 고를 때는 오직 미인만 골랐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버렸다”. 시문 실력은 괜찮았지만 명성은 줄곧 좋지 않았다.

당시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인 이옹(李邕)이 최호의 시명(詩名)을 듣고 직접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최호가 와서 바친 시의 첫 구절이 “열다섯에 왕창(王昌)에게 시집가”였고, 이옹이 듣자 음란한 풍조여서 크게 노해 “어린 놈이 무례하구나!”라며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고, 다시는 교류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혼사가 무절제한 자를 모두 경멸하고 멀리했다.

3) 덕과 의리를 중시해 거처에 법도가 있었던 사마광

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는 결코 자신을 방종하게 하지 않는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결혼 후 10여 년간 자녀를 얻지 못했는데, 부인 장씨(張氏)는 매우 조급해했다. 사마광이 위로하며 말했다. “자식의 유무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니 억지로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오.” 장씨는 계속 그를 위해 첩을 들이려 했지만 사마광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한번은 장씨가 젊은 처녀를 물색해 첩으로 삼으려 했다. 그녀를 서재로 보냈는데 사마광은 처녀가 곁에 다가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처녀가 그의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책을 들고 물었다. “대인, 이것은 무슨 책이옵니까?” 뜻밖에도 사마광은 정중하게 손을 모아 인사하며 답했다. “이것은 『상서(尙書)』요.” 그리고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처녀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나중에 장씨가 또 다른 처녀를 골라 첩으로 삼으려 하면서, 자신은 핑계를 대고 외출하며 그녀에게 저녁에 나리의 서재로 가라고 일렀다. 처녀가 차를 들고 저녁에 서재로 갔는데, 사마광이 이 처녀가 자기 서재에 나타난 것을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부인이 안 계신데 네가 여기 와서 뭘 하느냐? 빨리 가거라!” 그렇게 즉시 그녀를 내보냈다.

『송사(宋史)』는 사마광을 “거처에 법도가 있고 행동에 예가 있다”고 평가했으니, 절개를 지키고 덕이 두터운 선비였다.

5.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후의 중국의 혼인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은 생산수단이 없어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엥겔스는 ‘무산계급’을 현대 고용노동자로 정의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무산계급은 국가정권을 장악한 통치계급이 됐고, 사유재산이 없는(무산) 사회형태를 대표한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중국사회에서 국가정권을 장악한 것은 황제, 귀족, 사대부였고, 서방에서는 국왕과 귀족이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필요한 도덕 이념과 기능 교육을 받았고, 역사와 전적(典籍)을 숙지해 대체 불가능한 문화 전승과 도덕 교화 역할을 했다.

수천 년간 혼인과 화합은 어느 시대에나 대사(大事)였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근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대 중국 이혼 제1호는 서지마(徐志摩)다. 그는 1922년 본처 장유의(張幼儀)와 법적 절차를 거쳐 이혼했는데, 이유는 장유의와의 결혼 기간 중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고 자유연애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서지마의 재촉과 압박으로 막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 중이던 장유의는 이혼 동의서에 서명했다. 유명한 ‘도비(刀妃) 혁명’, 즉 마지막 황비 문수(文繡)와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이혼도 9년 후인 1931년의 일이었는데, 이유는 부의의 냉대와 궁중의 부자유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혼 ‘선봉’이 있었지만, 전통은 여전히 중국인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민국 시기 중국인의 이혼율은 여전히 매우 낮았는데, 이미 ‘개화’된 상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해시 사회국 업무보고』에 따르면, 1929년 10만 명당 23.82건의 이혼이 있었으니 백분율로 0.024%였다. 이는 2024년 중국 이혼율의 1/104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중공)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서 이혼은 생존욕을 충족시키는 흔한 정치 수단이 됐다. 부부 중 한쪽이 자신의 ‘정치적 적극성’을 표현하고 살아남기 위해 가정과 배우자의 정치적 전도, 심지어 생명까지 희생시키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전 사회, 전 국민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부부가 서로 고발했고, 어떤 이는 ‘마오쩌둥’에 대한 불충으로 지목돼 홍위병에게 박해받아 죽었으며, 어떤 이는 일기에 쓴 한 마디로 ‘반(反)혁명’ 증거가 됐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산산조각 났고, 얼마나 많은 부부가 서로 경계했는가. 혼인 속의 은혜와 의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 물질화된 혼인

고대 혼인은 종종 가정 책임을 중시했지, 단순한 개인의 감정 선택이 아니었다. ‘문당호대(門當戶對, 가문과 집안의 수준이 서로 맞아야 함)’가 강조한 것은 문화적 동질성이었다. 양쪽이 비슷한 책임 관념과 행위 방식을 가져 서로의 가정 배경, 가정교육 전통, 가문의 명예, 혼인 의무, 생활습관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로써 교육 이념, 재산 상속 등 크고 작은 가정사에서 마찰을 줄이고 화목을 증진시켰다.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선택과 감정적 일치를 더 중시한다. 전통에 무지하고 전통과 역사를 무시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정 배경, 사회적 지위, 가문의 이익은 더 이상 혼인 시 중요한 지표가 아니다.

가치와 문화 전통을 제거하면 물질화된 빈 껍데기만 남는다. 문화혁명의 참화 10년이 지나고 중국은 상품경제 사회로 진입하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본다”는 풍조 속에 채례(彩禮, 혼인 예물)가 갈수록 치솟았다. 남자 측이 여자 측에 청혼할 때 5만, 10만 위안(한화 1~2천만 원)을 내야 하고, 지금 화베이 지역에서는 20~30만 위안에 이른다. 혼인에서 핵심 가치를 제거하고도 옛사람들도 다 그랬고 제왕들은 더 심했다고 운운한다. 사실 어느 조대(朝代)든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데, 중공이 주입한 붉은 관념으로 역사를 보면 진상을 볼 수 없다. 전 세계를 둘러봐도 오직 공산사상, 사회주의 관념이 성행하는 무리 중에서만 이렇게 자기 조상을 먹칠하고 부정한다. 고대 중화의 5천 년 문명이든 젊은 미국의 강성함이든, 어떤 긍정적인 인물과 사적(事跡)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것들을 회피하는 것은 이미 문화를 말살하고 전승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2) 놀라운 이혼율

물질화된 혼인은 모든 것을 물질로 가늠한다. 도덕적 내포가 이상할 정도로 희박해졌다. 중공 출현 후 중국은 관방에서 민간까지 전통 가치가 빠르게 전복됐고, 가정 인륜 관념도 모두 버려졌다. 혼인은 인생의 대사인데, 현대사회에서는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도 이혼도 마음대로 하고, 혼전 동거와 시험 결혼이 일상이 됐다.

2024년 중국의 이혼율은 공식적으로 2.5%로 발표됐지만, ‘이혼과 결혼 비율’(이혼 등록 수/결혼 등록 수)는 57.5~58.1%에 달한다. 2024년 중국 결혼 등록은 610.6만 쌍, 이혼 등록은 262.1만 쌍이었다. 이는 소송 이혼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소송 이혼을 더하면 2024년 연간 이혼 총수는 355만 쌍에 근접할 것이다. 57%든 58%든 모두 역사적 신기록이다.

3) 에이즈 범람

2005년 중국 공식 통계에 따르면 중국 성병 감염자는 70만 명으로, 성병은 이미 중국 5대 전염병 중 하나가 됐다. 그런데 중국질병통제센터 성병통제센터 유행병학실 주임 천샹성(陳祥生)의 추정에 따르면, 공식 통계 인원은 실제 감염자의 10분의 1에 불과할 수 있다고 한다. 천샹성은 20세기 초부터 중국 성병 발병률이 매년 20~30% 속도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발병 후 개인 의원이나 무면허 의사를 찾아 치료받아 대부분의 성병 실태가 보고되지 않았다.

중국 전과의학(全科醫學) 웹사이트에 따르면, 2004~2018년 중국 에이즈 발병률과 사망률은 모두 상승 추세를 보였으며, 각각 연평균 22.70%와 18.80% 상승했다.

6. 신성한 혼인

혼인 가치 인식의 전복은 직접적으로 사회 도덕의 타락을 초래했고, 문란한 성생활이 만든 거대한 업력(業力)은 또 관련 악성 질병의 전파와 불치병을 가져왔다. 모두가 에이즈 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많은 유명인사와 권력층도 에이즈 환자 돕기를 자신의 프로젝트로 삼는데, 이 질병이 마귀가 성적 문란을 조장해 인류에게 가져온 재앙임을 어찌 알겠는가?

중국 대륙은 겉으로는 차량이 북적이고 고층빌딩이 즐비하지만, 실제로는 도덕이 구제불능 지경까지 추락했다. 쉽게 이혼하는 풍조는 당사자의 음덕(陰德)을 해칠 뿐 아니라 다음 세대 중국인에게 많은 이들이 평생 지울 수 없는 악과(惡果)를 남겼다.

이제 다시 서방 목사가 교회에서 주례하는 혼례를 보면, 더 많은 엄숙함과 깊은 뜻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목사: “(신랑 성명) 당신은 이 여인을 당신의 아내로 맞이하여 신성한 혼인(holy matrimony)을 맺겠습니까? 아프든 건강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를 사랑하고, 돌보고, 존중하며,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충실하시겠습니까?”

신랑: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사: “(신부 성명) 당신은 이 남자를 당신의 남편으로 맞이하여 신성한 혼인(holy matrimony)을 맺겠습니까? 아프든 건강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를 사랑하고, 돌보고, 존중하며,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충실하시겠습니까?”

신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성한 혼인(holy matrimony)’은 사람들이 하나님(신, 하늘)을 공경하고 동시에 배우자에게 책임을 다할 때 이루어지는 신성한 결합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개인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평생 지속될 수 있다.

목사: “이제 혼인을 증언하는 하객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들의 결혼 서약을 증언해 주시겠습니까?”

하객: “예.”

목사: “누가 이 신부를 이 신랑에게 보내시겠습니까?”

신부의 아버지: “그녀가 자원하여 그에게 가며, 부모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제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각자 준비한 서약을 낭독한다.

신랑: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맹세합니다.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아, 오늘 이 순간부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신부: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맹세합니다. 당신을 나의 남편으로 맞아, 오늘 이 순간부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준다. 반지는 평생 약지를 떠나지 않고, 두 사람의 서약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목사: “이제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성혼으로 선포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혼인 생활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부축하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통해 서약을 지키며 일생을 함께하게 된다.

(전문 끝)

 

원문발표: 2025년 9월 16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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