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악비의 시로 본 지극히 진실하고 선한 충(忠)의 경지 (1)

글/ 밍신(明心)

[밍후이왕] 천백 년간 중화의 자손들은 대대로 남송 시대 악비(岳飛)의 ‘정충보국(精忠報國)’ 사적(事蹟)을 전하며 칭송하고 우러러보았다. 악비가 금나라와 맞서 적을 섬멸하고 여러 차례 출중한 전공을 세우며 중원을 보위한 것은 사람들 귀에 익숙하고 또 상세하다. 희곡부터 평전까지, 소설부터 영화까지 서로 다른 시대에 각양각색의 표현 형식이 있었다.

‘시로 그 뜻을 말하는 것’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이다. ‘악무목집(岳武穆集)’, ‘전송사(全宋詞)’에는 악비가 남긴 일부 시문을 수록했다. 이런 시(詩), 사(詞), 상소문, 기록 등 통해 시인이 표현하는 심지와 백성의 마음을 담아내는 초연한 포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건염(建炎) 4년](1130년)

‘장계(張溪)를 지나 장완(張完)에게 증정하다’

무심코 산 술로 청춘 회상하며 거울 속 백발에 헛되이 탄식하네(無心買酒謁靑春, 對鏡空嗟白髮新)

꽃다운 소년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친 말 타고 고인(高人)을 방문하노라(花下少年應笑我, 垂垂羸馬訪高人)

이 시는 건염(建炎, 남송 고종의 연호) 4년(1130년), 악비가 27살 때 지은 것이다. 시인은 무심히 술 마시고 환담하다가 거울 앞에서 새로 자란 백발에 탄식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청춘을 누리고 있지만 시인은 지친 말을 타고 공손히 은사(隱士)를 찾고 있다. ‘고인’은 초연히 세상에 나타났으며 우주 천지에 대한 통찰과 반본귀진(返本歸真: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수련의 도를 갖고 있다. 시인은 시의 형식으로 대도를 추구하고 범속을 초월하는 포부를 나타냈다.

‘송사(宋史)·악비전(岳飛傳)’에 의하면, 건염 원년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즉위한 후에 악비는 수천 마디의 상소문을 써서 조정에서 출병해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라고 간언했다. 이에 ‘황잠선, 왕백언’ 무리는 나아가 취해야 함을 모르고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가서 상황이 바뀔 때 중원을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소문을 올린 후 악비는 하위직이 월권해 국사를 논했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쫓겨났다.

육유(陸遊)는 일찍이 “미관말직이지만 나라 근심은 잊을 수 없다”라고 쓴 적이 있다. 바로 이때 악비는 직위의 높낮이로 인해 자신의 책임을 잊지 않았다. 동한(東漢)의 마융(馬融)은 ‘충경(忠經)’에서 “위대하구나, 충(忠)은 가까운 곳에 쓰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원대한 곳에 쓰면 그 호연지기가 천지간에 충만해 천지의 정기를 바로잡을 수 있다”라고 썼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평범한 군관이 감히 황제에게 글을 올리고 왜 조정 대신이 다룰 문제를 지적하는가? 이것은 그들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악비의 충성스러운 절개는 결코 우매한 충성이 아니라 순수한 충의[精忠]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듯이 “충은 도덕 행위 중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표현”이다. 그는 항상 나라의 명운을 걱정했다. 황제는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후대가 없어 성통(聖統)이 이어지지 않았다. 악비는 가족들과 사적으로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걱정되어 울었다.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북벌할 때도 악비는 국사에 전념해 개인의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황제에게 글을 올려 태자를 세웠다.

천하 사람들이 이 일을 듣고 그의 충심을 느낄 수 있었고 악비의 위대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계속)

 

원문발표: 2022년 7월 12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7/12/44610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7/12/4461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