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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堯舜)의 계시

글/룽옌(龍延)

【명혜망 2009년 8월 9일】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성인(聖人)이다. 순은 특히 평민 출신으로 어릴 때 모친을 여의었다. 그의 부친과 계모, 이복동생은 아주 못살게 굴면서 온갖 방법으로 순을 괴롭혔다. 심지어 순을 죽이기 위한 위험한 시도도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순은 예의와 겸양을 알았고 겸손하고 현명한 덕이 있어 부친과 계모에게 효도를 다했으며 이복동생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순이 17세 되던 해에 결국 못난 부친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졸지에 집을 떠난 순은 우선 역산(歷山)에 가서 농사를 지었고 나중에 서쪽으로 자리를 옮겨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이후 다시 황하 연안으로 옮겨 그릇을 구웠다.

순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 늘 덕(德)으로 현지인들을 감화시켰으며 그 지역 사람들의 도덕을 승화시켜 예의와 겸양이 흥기하게 했다. 그러자 역산의 농부들은 모두들 서로 밭두렁을 양보했고 뇌택의 어부들은 서로 좋은 자리를 양보했다. 순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대덕(大德)을 지녔기에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가까이 하고자 했다.

이에 사면팔방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명성을 흠모해 앞을 다퉈 찾아와서는 그에게 귀부했다. 이리하여 그가 머무는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점차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년만에 마을을 이루고 2년 만에 성진(城鎭)을 이뤘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로 변했다. 이처럼 순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방의 도덕과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순이 덕행(德行)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것은 완전히 어진 덕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아무런 정치적 목적이 없었다. 하지만 순의 덕행과 아름다운 명성이 점차 멀리 퍼져나가자 결국 당시 천자였던 요(堯)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지금처럼 인성이 왜곡된 공산당 당문화(黨文化)의 관점에 따라 본다면 순은 요와 ‘군중을 쟁탈’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요 임금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 임금은 ‘군중을 쟁탈’한다는 애매한 죄명으로 순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덕행에 감동해 자신의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냈고 나중에는 제위(帝位)까지 물려주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순이 추구했던 목적은 아니었지만 순이 천자에 즉위하자 천하가 크게 다스려지고 모두들 신하로서 복종했다.

그렇다면 왜 요임금은 순이 자신과 더불어 ‘군중을 쟁탈’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임금은 한마음으로 공(公)을 위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현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처로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으며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어진 사람을 구하고 대덕(大德)․대현(大賢)의 인물을 찾아 천자의 자리를 양보하고자 했다. 그는 도를 닦는 많은 고덕지사(高德之士)를 찾았지만 이들 수련인(修煉人)들은 모두 천자의 자리에 흥미가 없었다. 때문에 요임금이 여러 차례 양위(讓位)를 생각했지만 모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요임금은 어진 사람을 보면 그를 본받으려 노력했으니 그의 대공무사(大公無私)한 경지와 넒은 흉금은 자연히 다른 대덕지사(大德之士)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중공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당을 만들고 자신을 위해 집권하며’ 부패와 탐오, 극단적인 이기주의,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고, 자신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한다. 만약 순 임금이 지금의 중국에 살았다면, 여러분이 쉽게 상상할 수 있다시피, 그는 반드시 중공에 의해 ‘당과 군중을 쟁탈’하고 ‘정치를 한다’는 구실로 탄압받았을 것이다.

중국 역사상 사람들에게 선(善)을 향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았지만 중공 통치하에서는 사람에게 선을 향하도록 가르친 파룬궁이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는 ‘죄목’으로 모함 받고 탄압 당했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하는 수련으로 사람의 도덕이 승화하고 병을 없애고 몸을 튼튼히 하도록 도우며 세간의 정치나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파룬궁의 신기한 효과와 사람들의 도덕과 사회풍속이 급속히 승화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면, 호남(湖南)성 산구(山區)에서는 ‘물을 양보’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남변촌(南邊村)과 수장촌(水莊村)에서 한 갈래 물길을 공용으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수원(水源)에 한계가 있어 매번 무더운 여름이 되면 상류에 위치한 남변촌에서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20여 년동안 물을 독점해왔다. 그런데 1995년 7월 파룬궁이 남변촌에 전파되고 마을 전체에서 176명의 사람들이 공법을 배운 후 도덕관념과 정신면모에 급속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선한 마음으로 남을 대했고 물을 다투거나 독점하지 않았으며 남에게 물을 양보했다. 이렇게 되자 두 마을은 이후 묵은 원한을 씻고 화목하게 살 수 있었다.

1998년 초여름 중국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당시 호북(湖北)성 무한(武漢) 텔레비전에서는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온 단체 및 개인의 성금소식을 보도했다. 당시 거의 매일 파룬따파 수련자가 얼마의 액수를 기부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어느 공단 지역에서는 십여 명이 새벽부터 밤까지 마치 피로도 잊은 채 홍수 방지에 전력을 기울였다. 현장은 시찰 나온 지도자가 그들이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묻자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자세히 물어본 후에야 그들이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했다. 이처럼 파룬궁이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다 준 사례는 사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파룬궁은 이처럼 나라와 백성에게 백가지 이로움만 있을 뿐 단 한 가지 해로움도 없었지만 흉금이 좁고 질투심이 강한 중공 강택민 집단은 도리어 파룬궁이 인민의 환영을 받는 것을 ‘당과 군중을 쟁탈’한다고 왜곡해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자행했다.

선을 지향하는 파룬궁의 가르침은 이미 전 세계 110여개 국가에서 모두 현지 민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지만 오직 중공만이 박해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중공의 무리한 파룬궁 탄압에 대해 몹시 의아해하고 있다.

비참한 것은 아직도 일부 중국인들이 중공의 거짓말을 맹신하고 파룬궁 진상을 똑똑히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 당문화의 사유를 벗어나 인성과 양지의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 있다면 중공의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질투심이 이지를 상실하고 파룬궁을 공격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 순 임금의 대인(大仁)․대덕(大德)이 민심을 얻어 그가 사망했을 때 많은 백성들이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여겨 3년 상을 치르며 내심의 비통함을 자발적으로 표현했다. 중공의 본질은 사악하고 나쁜 일을 끊임없이 저지르며 민심을 잃을 대로 잃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앞을 다퉈 성명을 발표하며 중공관련 조직에서 탈퇴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문장발표 : 2009년 8월 9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8/9/20616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