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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의 각성

글/ 중국 대법제자 밍시(明曦)

[밍후이왕] 1999년 10월, 남편이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다)’를 표현하기 위해 베이징 청원에 나섰다가 중공에 납치됐다. 그는 현지 공안, 검찰, 법원의 불법적인 유죄 판결로 인해 2001년 상반기에 우리 성(省)의 모 감옥(이하 A 감옥으로 칭함)에 수감됐다. 이 감옥은 원래 중죄인을 가두는 감옥인데, 문화혁명 시에는 유명한 모 정치범을 가둔 적이 있다. 몇십 년에 걸쳐 사람을 다루고 괴롭히면서 잔인하고 악독한 수단을 갖췄고, 안에 있는 죄수도 형형색색이라 온갖 사람이 다 있었으니 난장판을 이룬 하나의 커다란 염색 항아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편과 다른 파룬궁수련생들이 잇달아 A 감옥에 수감된 이후로 대법제자의 고상한 도덕과 순수한 이타심으로 인해 죄수들에게서 선한 마음이 나왔고, 감옥의 전체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형사범은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대법제자의 인간성을 알게 됐고, 대법제자의 반(反)박해 행동을 보면서 대법제자의 용기와 확고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암암리에 박해받는 대법제자를 돕고, 공감하며, 공정한 말을 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또 어떤 사람은 대법제자를 도와 경문을 전달하고, 소식을 서로 주고받으며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었다. 내가 직접 만난 이청(義成)은 남쪽 지방 사람이었다. 그는 스무 살도 안 되어 강도 사건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나중에 19년으로 감형됐는데, 당시 이미 A 감옥에서 10년 넘게 복역하고 있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중공의 악질 우두머리 장쩌민이 파룬궁을 가장 극렬하게 박해한 기간이다. 당시 대법제자를 불법 감금한 구치소, 노동교양소, 유치장, 감옥, 세뇌반이 모두 몹시 사악했는데, A 감옥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법 감금된 파룬궁수련생이 신앙을 견지하기만 하면 거의 극히 잔인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았다. 2003년 초, 한 남자 파룬궁수련생은 A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남편은 수감 후 줄곧 강요된 죄명을 인정하지 않고, 옥중에서 연공, 법공부, 반(反) 박해를 견지하다 여러 차례 경찰에게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했다. 한번은 대대 감옥 경찰인 탄(譚)○○가 남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당신이 죽어도 우리한테는 아무 영향이 없어. 우리는 (가짜) 자료를 만들 수 있어.”

2003년 3월 어느 날, 남편은 작업장 작은방에서 감옥 경찰 우(吳)○○에게 고압 전기봉 충격을 반 시간 넘게 당했다. 그 사이 전기봉이 방전되자 충전해 다시 충격을 가했고, 남편은 머리와 목 등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같은 해 5월, 일을 끝낸 사람들 속에 있던 남편을 감옥 경찰 추(邱)○가 뒤에서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남편은 얼굴이 땅바닥에 부딪혀 치아 두 개가 빠졌고 입은 피투성이가 됐다.

남편이 그렇게 험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감옥에서 밖으로 소식이 나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바람에 나와 시부모님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고,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남편과 같은 곳에 있던 이청이 그때 만기 출소했다. 이청은 감옥에서 많은 해를 보냈고, 감옥 경찰과 관리들의 행위를 눈으로 목격했으므로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다른 죄수와 마찬가지로 간수의 폭위에 울분을 참으며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는 대법제자가 큰 압력과 고문에도 자신의 신앙을 견지하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밝히며, 난폭한 자와 사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며 아주 탄복했다. 그는 남편에게 남편의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고, 남편은 곧 내 전화번호를 그에게 가르쳐줬다.

이청은 출소 후, 집으로 가지 않고 먼저 내가 있는 도시로 와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기차역 주변의 작은 식당에서 이청과 처음 만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곳에서 이청은 남편이 감옥에서 박해받고 있는 상황을 자신이 아는 대로 자세히 알려줬다.

이청은 키가 170 정도였는데, 10여 년 동안 수감돼 있었지만, 여전히 순박한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말이 시원시원했고 빙빙 돌리는 것이 없었으며, 사람을 볼 때도 눈빛은 아주 단순했고 잡다한 것이 없었다. 비록 나와 일면식도 없었고 그렇게 특수한 신분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고 앞으로 연락할 수 있도록 연락처를 교환했다.

나는 그들이 함부로 남편을 박해하지 못하도록 내가 반드시 빨리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서면 자료를 작성하기로 했다. 나는 ‘형법’과 ‘경찰법’ 관련 조항을 고소장에 인용했고, 앞서 언급한 감옥 경찰이 저지른 행위가 ‘수감자 학대죄’에 해당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당시 우한(武漢) 청년 쑨즈강(孫志剛)이 광저우(廣州)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건을 보도한 속인 매체의 기사를 뒤에 첨부하면서 사실을 말하고, 이치를 나열했는데, 어투는 평온했고 이치와 근거가 있었다. 다른 수련생이 보고는 잘 썼다고 했다. 나는 인쇄점에서 프린트를 하고 자료를 복사했는데, 복사점 아가씨가 내용을 보고는 우리 남편을 매우 동정하면서 남편을 구하려는 나를 지지해줬다.

고소장이 준비되자 나는 A 감옥으로 가서 남편의 상해 상태를 즉시 감정할 것과 남편을 불법 체벌하고 가혹 행위를 한 감옥 경찰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2003년 5월은 마침 사스 방역 비상시기라 외부인은 감옥의 공무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감옥 측은 사람을 내보내 내 고소장을 접수하고도 회신이 없었다.

나는 기다려서는 안 되며, 그들의 상급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성(省) 감옥관리국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순조롭게 교정을 담당하는 부국장을 만나 감옥 경찰의 악행을 직접 폭로했다. 그 부국장은 50여 세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점잖아 보였다. 당시 그는 내 요구를 주의 깊게 들었고 내가 쓴 편지를 찬찬히 읽고 내려놓은 다음, 만약 이런 상황이 사실이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오래지 않아 성 감옥관리국이 A 감옥에 조사팀을 파견해 한차례 ‘조사’를 벌였고, 결국 남편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던 우 씨는 당월 심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비록 명목상 처분이고 이른바 ‘조사’도 형식적이었지만, A 감옥에서 무법천지로 날뛰던 사법의 졸개들에게 충격을 줬다. 감옥 사람들은 도대체 내가 (남편이 받은 박해를)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정보를 전달했을까? 또한 내가 감옥관리국에 고발하고 그들에게 치료비와 정신적 피해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A 감옥에서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이 일은 A 감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남편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우 씨는 적지 않게 놀라 많이 수그러들었다. 다른 감옥 경찰 한 명은 남편에게 의미심장하게 당신 부인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나중에 남편은 감옥 안에서 더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고, 법공부와 연공 환경도 편안해졌다. 2003년 9월, 남편은 무사히 출소했다. 출소할 때 남편의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활력이 넘쳐 보여 가족들은 모두 젊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먹구름이 뒤덮인 시기에 이청이 압력과 위험을 무릅쓰고 소식을 밖으로 전한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실 대법의 위덕에 감화를 받은 A 감옥에는 이청처럼 진상을 깨달은 형사범이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또 사부님의 ‘홍음’을 배웠고,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으며, 대법제자를 본받아 스스로 불량한 습관을 단속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일체의 사람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법의 거대한 위력을 증명한 일이다.

기쁜 것은 이청도 이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청은 귀향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도시로 돌아와서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당시에는 나도 파룬궁 수련을 이유로 박해를 당해 사회적 자원을 모두 잃고 경제적으로 몹시 곤란했다. 그래서 신문의 쪽지 광고를 보고 그에게 작은 카센터의 세차원 자리를 알려줬는데 그곳은 일이 몹시 힘들었고 일하는 시간도 길었으며 보수도 박했다. 한 달에 겨우 3백 위안(약 5만 원)이었는데, 유일하게 좋은 점은 먹여주고 재워줘 스스로 숙소를 찾거나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청은 참고 견디며 약 2년을 채웠다.

한번은 내가 그를 만나러 가니 이청이 손을 내밀어 보여주었는데, 양손이 몹시 거칠었고 물집투성이였다. 나는 그에게 계속할 것인지 물었다. 이청은 거의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제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이렇게 고생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나는 그가 정말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또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청이 따라다니던 폭력배 두목(이청과 같은 사건)이 출소했다. 그는 이청과 연락할 방법을 모르다가 이청이 도시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이청에게 자신을 따라 지하 도박장에서 보호비를 받자고 했다. 그때 이청은 이미 내 도움으로 서점 경비원으로 두 번째 직업을 찾은 상태였다. 그 일은 임금도 한층 높았고(그래도 500~600위안에 불과했다), 그에게 사람으로서의 존엄도 회복해 줬다. 이미 과거와 작별한 이청은 다시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지만, 정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워 나에게 어쩌면 좋을지 의논했다. 결국, 우리는 내가 그의 사촌 누나로서 나타나 그의 두목에게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말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폭력조직 사람과 교류한 적이 없었고 마음도 조금 불안했지만 이청이 날 믿으며 선한 마음을 낸다고 생각하니 두렵지 않았다. 마침내 두목이 그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그가 수감돼 있던 감옥의 모 감옥 경찰의 딸이라고 했다. 나와 이청은 그들을 아주 인기 있는 작은 광둥요리점에 초대했는데, 그 집은 요리도 맛있고 비싸지도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그 두목은 내가 상상했던 사납고, 오만하고, 몸에 문신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중년 남성이었는데 이청보다 조금 통통하고 키가 약간 작았다. 아마도 다년간의 감금 생활 속에서 젊은 시절의 경망스럽고 날카로운 면이 닳아 없어진 것 같았다. 그가 나에게 보인 태도가 아주 좋아 나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마음은 아주 평온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니 친구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청은 말을 적게 했고 내가 예의 바르게 이청이 앞으로 정당한 일을 하기를 가족들이 모두 바라고 있고, 이청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목은 내 말을 듣고 아무 말이 없었고, 그를 비웃지도 않았고 의리가 없다며 그를 나무라지도 않았으며 이청의 선택을 묵인해줬다. 이후 두목은 이청을 더는 귀찮게 하지 않았다.

비록 이청이 바른길을 가겠다고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학력과 직장 경험이 없었으므로 이청은 생계를 꾸리기가 몹시 힘들었다. 카센터 세차원에서 서점 경비원을 거쳐 나중에는 모 시립병원 식당 직원이 됐는데, 일마다 몹시 힘들고, 업무 시간이 길며, 수입은 적고, 사람들이 차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청은 놀랍게도 곤란을 극복하며 버텨냈다.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을 꿈꾸다 범죄자로 전락했던 그가 이제는 고생과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착실하게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게 됐으니 이청에게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나중에 이청은 부친의 병이 깊어져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전법륜’이 담긴 전자책을 그의 손에 들려주며 작별을 했다. 헤어질 때 서로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는데, 나중에 내가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서 이청의 번호를 잃어버려 이청과 우리의 연락이 끊어졌다.

10여 년이 지났고, 우리 부부는 줄곧 이청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이청이 항상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다)’를 기억하리라 믿으며, 항상 좋은 사람이 되어 바른길을 걸으며, 다시는 과거와 같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진정하게 광명을 깨닫고, 맑게 갠 하늘을 본 사람은 다시는 어두운 사회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발표: 2020년 10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0/10/4135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