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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조선족 대법제자 김준걸, 박해로 결국 사망(사진)

[명혜망 2008년 12월 16일] 2008년 12월 13일, 수차례 잔혹한 박해로 신체에 엄중한 손상을 입은 길림성 연길시 조양천(전에 용정시에 속했음) 조선족 대법제자 김준걸이 원한을 품은 채 인간세상을 떠났다. 겨우 35세이다. 김준걸은 두 차례에 걸쳐 불법노동교양 4년을 받았다. 첫 번째 노동교양 때, 그는 어머니에게 업힌 채 노교소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두 번째는 손에 수갑을 찬 채, 머리에는 피가 흥건한 상태에서 노교소에서 나왔다.

길림 조선족 대법제자 김준걸

대법제자 김준걸(남) 연변대학교 졸업 후, 길림성 교육위원회 국제교육교류센터에서 근무했다. 1999년 7월 22일, 중공악당이 대법(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김준걸은 길림성위원회에 상방 청원하다 악당이 조종하는 공안에 의해 장춘시 경찰학교에 감금되었다. 얼도 공안분국에서 불법심문을 당할 때 혹형고문— 소진배검(苏秦背剑)을 당하였다. 즉, 두 손을 등 뒤에 가져다 놓고 수갑을 채운 후 한 손은 위에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두 엄지손가락을 묶고 힘껏 잡아당겨 가까이 오게 했다. 매번 20-30분씩 지속되었는데 그 고통은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따광구류소(大广拘留所)로 이감되어 15일간 불법구류 당했다.

1999년 10월 14일, 김준걸은 베이징에 상방하러 갔다가 악당관리에 의해 납치된 후 장춘으로 돌아왔다. 이어 불법노동교양 1년을 받고 펀진노동교양소(奋进劳教所)에서 각종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악당악인들은 각종 수단을 동원해 강제로 소위 “전화” (역주: 강제로 파룬궁수련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사인하게 하는 것)할 것을 요구했다. 십여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을 강제로 서로의 앞가슴이 등에 닿도록 해, 2미터 길이의 넓이가 두 치가 안 되는 1미터 높이의 걸상에 올라타게 한 후 두 발이 모두 지면에 닿지 못하게끔 했는데 악경은 이것을 “목마 타기”라고 불렀다. 이는 정말 진정 참혹한 혹형으로 그런 아픔은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며, 아주 빨리 엉덩이 피부가 전부 떨어져 나간다.

김준걸은 노동교양소에서 7개월이나 만기 연장당하면서 박해를 더 받았다. 2001년 3월 다시 차오양거우노동교양소(朝阳沟劳教所)에 이감되었다. 악경들은 가는 철사를 꼬아서 몽둥이를 만들어(작은 손가락 굵기) 김준걸을 누르고 땅에 엎드리게 해 목부터 내려오면서 발까지 때렸다. 밥을 먹기 전에 범인은 그의 배를 발로 차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메스껍게 했다. 김준걸의 신체는 모진 고문으로 몸무게가 겨우 40킬로밖에 되지 않았다. 5월 18일, 2대대의 악경은 형사범죄자 리푸천을 시켜 그를 박해하게 하였다. 매일 7시에 악범 리푸천은 등나무 줄기로 김준걸을 독하게 때려 그의 손발은 맞아서 찐빵처럼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김준걸은 고문에 시달려 식당에 밥 먹으러 걸어갈 수도 없었고 저녁에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2대대 악경은 그가 사망할까봐 두려워 상급 노동교양소에 보고했다. 사법국의 한 처장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보자 그의 노동교양처분 해제를 허락하였다. 2001년 6월과, 7월 사이 김준걸은 그의 어머니 등에 업혀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2001년 9월, 김준걸은 집에서 또 경찰에게 납치되어 용정간수소에 감금되었다. 15일 후, 또다시 불법노동교양 2년을 판결 받고 연길노동교양소로 이감되었다. 2,3개월 후 다시 쥬우타이인마허 노동교양소(九台饮马河劳教所)에 옮겨져 2년 8개월 동안 불법수감 되었다. 그사이 그는 장기간 독방에 감금당한 채 잔악무도한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불법적으로 만기를 초과해 감금당하는 동안 중공의 사악한 무리들은 김준걸에게 전향하라고 협박하면서 손도장을 찍으라고 강박했다. 이에 김준걸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악인은 김준걸을 작은 독방에 가두고 매일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는 고문을 가하여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성이 왕씨인 의사는 김준걸의 사지를 묶어 놓고 농도가 높은 소금물주입을 강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갈증이 오게 한 후 물을 마시게끔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신체는 엄중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2004년 5월 김준걸은 다시 가족들에 의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2007년 여름, 김준걸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쁘고, 수척해지고, 피를 토하는 등 증상이 나타났고, 체중은 겨우 30.35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검진결과 폐결핵 말기라고 진단을 하였으며, 폐는 결핵으로 인하여 대부분 괴사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2008년 12월 13일 이 세상을 떠났다.

발표: 2008년 12월 16일
갱신: 2008년 12월 16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8/12/16/1916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