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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조선족 파룬궁 수련생인 김준걸이 당한 가혹한 박해 (사진)

[명혜망2008년4월20일] 길림성 조선족 파룬궁 수련생인 김준걸은 4년 동안 2차례 불법 노동교양 당하면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김준걸은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업어서 집으로 돌아왔고, 두 번째는 수갑을 찬 채 집으로 돌아 왔다. 감옥을 나온 후 장기간 가족들의 도움과 외지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 왔으며, 몸이 정상 회복되지 않은 채 일정한 거처없이 생활하고 있다.

대법제자 김준걸

2007년 여름 김준걸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지고, 여위어지면서 피를 토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여러 방법을 동원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2008년 새해를 앞두고 이미 얼굴 색이 창백해지고, 걷기가 힘들만큼 몸이 허약해져 체중은 겨우 30 킬로그램을 조금 넘었다.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한 결과 페결핵 말기 진단이 나왔으며, 폐가 대부분 괴사되어 2008년 4월 20일 현재 치료 중에 있다.

김준걸(남, 35세, 조선족)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길림성 교육위원회 국제교류 센터에서 근무했다. 1999년 7월22일, 중공사당이 박해한 후 김준걸은 길림성위원회에 상방하러 갔다가 악당이 통제하는 공안에 의해 창춘시 경찰학교에 감금 되었다. 당시 얼도 (二道)공안분국에서 불법적으로 심문을 당한 김준걸은–소진배검(苏秦背剑) 고문을 당했다. 즉, 두 손을 등 뒤에 가져다 놓고 수갑을 채운 후 한 손은 위에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두 엄지손가락을 묶고 힘껏 잡아당겨 가까이 오게 했다. 매번 20-30분씩 지속해서 가하는 고문의 고통은 이루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법을 견정히 믿는다는 이유로 김준걸은 따광구류소(大广拘留所)에 납치당해 15일간 불법수감 됐다. 김준걸은 또 1999년 10월14일 북경에 상방하러 갔다가 중공악당관리에게 납치돼 장춘으로 돌아와 불법 노동교양 1년을 받았다. 김준걸은 펀진(奋进)노교소에서 다양한 박해를 받았다. 중공악당의 악인은 각종 수단을 사용해 이른바 “전화”(역주: 강제로 파룬궁수련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사인하게 하는 것)를 강행했다. 길이 약 2미터, 넓이가 두 치도 되지 않고, 높이는 1미터 가량 되는 걸상을 놓고 열대여섯 사람이 모두 걸상에 앉게 한 후, 두 발 모두 바닥에 닿지 못하게끔 하는데, 사악들은 이를 ‘목마 타기’라고 했다. 이는 일종 가장 엄중한 혹형으로 그 고통스러움은 형용할 방법이 없는데 엉덩이 전체 피부가 빠르게 떨어져 나간다. 당시는 2000년 7월 하순이어서 몹시 무더웠다. 여러 사람들이 앞가슴과 등을 맞닿은 채 걸상에 앉아있는 상황이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갑갑하고 더워 못 견딜 정도였다. 이렇게 혹형은 새벽 3시까지 계속 되었다. 악당 분자들은 그래도 “전화”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알루미늄 합금으로 된 문짝으로 출입문과 창문을 몽땅 막아 버렸다. 그 당시 실내는 찌는 듯이 더웠지만 악인들은 “따사로움을 보낸다”고 떠벌였다.

2000년 10월 김준걸과 불법 감금된 전체 파룬궁 수련생들은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김준걸은 펀진노교소에서 불법으로 만기가 7개월 더 연장되면서까지 박해를 당했다.

2001년 3월, 김준걸은 차오양거우 (朝阳沟)노교소로 이감되었다. 소장 왕얜워이와 2대대 대장 양광 모두 매우 사악하였다. 그때는 매일같이 파룬궁 수련생들이 폭행당하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악경들은 8호 철사를 꼬여서 몽둥이로 만들어 (약 새끼손가락만큼 굵기) 김준걸을 땅에 눌러 엎드리게 해 놓고 목부터 발까지 때렸다. 밥 먹기 전에는 죄수들이 그의 배를 걷어차 밥을 먹을 수 없었고 메스꺼웠다.

김준걸은 갖은 고문과 박해로 체중이 40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다. 5월18일 2대대 악경은 형사 범죄자인 리푸천을 시켜 김준걸을 박해했다. 그 후 매일 7시마다 리푸천은 등나무 줄기로 김준걸을 가혹하게 폭행했다. 그의 손과 발은 매일 몇 십 개의 등나무 줄기에 맞아 찐빵처럼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노교소 안에서는 토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범죄자 반장 순지명도 그를 욕하면서 괴롭혔다. 마지막에 김준걸은 시달림으로 식당에 걸어갈 수 없었고 저녁에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도 없었다. 2대대 악경은 그가 죽을까봐 두려워 병원에 보내 검진을 받게 했는데 의사는 그의 생명이 위독하다며 윤번으로 그를 돌보았다. 노교소에 보고하니 위에서는 그가 죽을까봐 두려워 또 사법국에 보고했다. 한 처장이 이런 사실을 알고 김준걸의 노동교양 해제를 허락했다. 당시 악경은 김준걸을 병원에 보내 치료해 준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2대대에서 준걸의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지한 것이었다. 이렇게 문밖으로 밀어 내버리곤 관계하지 않았다.

2001년 6,7월, 걸을 수조차 없이 엄중한 박해를 받은 김준걸을 그의 어머니가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왔다.

2001년 9월에 김준걸은 또 경찰에 의해 집에서 납치돼 용정간수소에 가서 15일간 구류를 받은 후 또 다시 불법 노동교양 2년 처분을 받고 연길노교소에 2-3개월간 감금된 후 다시 쥬우타이인마허(九台饮马河)노교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잔악무도한 박해를 받았다

2002년 3월 5일 장춘 텔러비젼 진상삽입 방송 후 감금되었던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다. 김준걸은 네다섯 개의 전기 곤봉으로 얼굴, 흉부와 팔다리를 동시에 지지는 혹형을 당했다. 참혹한 대면적의 박해를 마주한 김준걸과 기타 몇몇 동수들은 함께 박해에 반대하였다. 2003년 파룬궁 수련생 김준걸은 사악한 자들이 대법을 비방하는 영상방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장기간 작은 독방에 갇혀 박해를 받았다.

불법적으로 만기를 초과해 감금당하는 동안 중공의 사악한 무리들은 김준걸에게 전향하라는 협박과 함께 손도장을 찍으라고 강박했다. 이에 김준걸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악인은 김준걸을 작은 독방에 가두고 매일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는 고문을 가해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성이 왕씨인 의사는 김준걸의 사지를 묶어 놓고 농도가 높은 소금물 주입을 강행해 몹시 갈증을 느끼게 한 후 물을 마시게끔 했는데 이로 인해 신체는 엄중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가족들이 김준걸을 구하기 위해 시공안국과 시 사법기관을 오갔다. 김준걸은 단식을 시작한지 49일이 지나 가족들이 그를 데려 갈 때는 그의 두 손에는 수갑에 채워져 있었고 머리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2006년 3월 김준걸은 성교육국에 가서 복직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김준걸이 99년 불법구류를 당한 후 길림성 교육위원회는 그를 제명시켰던 것이었다. 김준걸은 다만 박해를 받은 수많은 파룬궁수련생 중의 한명일 뿐이다. 사악한 중공이 9년간 행하고 있는 박해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8/5/6/97075.html)
문장발표 : 2008년 4월20일
문장갱신: 2008년12월 14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8/4/20/1768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