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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 양중팡(楊忠芳)이 옌지(延吉) 악경에게 맞아 죽은 후 수십명의 국민들이 시(市)정부 앞에서 정좌(静坐)하고 정당한 도리를 요구하다

글 / 옌볜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2월 26일]양중팡, 37세이며 하룻밤 사이에 옌지시 건공파출소의 경찰에 의해 산채로 맞아 죽었다. 나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매번 눈물을 멈출 수 없었으며 나의 마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양중팡은 스촨 청두(四川成都)의 사람이고 그녀는 옌지로 시집왔다. 후에 옌지시 옌시가(延西街)벽돌공장 부근의 시위안(西苑)시장(지금은 머리위안(莉花苑)시장이라고 부름)에서 자신의 부지런한 두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장사를 하였다. 그녀는 열정적이고 대범하며 저울을 공평하게 달기 때문에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먼 곳에서도 모두 그녀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였다. 양중팡은 이 시장에서 좋은 일들을 아주 많이 하였다. 두 번이나 돈과 재물을 주어서 옌시파출소에 맡긴 적이 있다. 또한 위생요금을 걷는 사람이 그녀의 가게에서 2인분을 적게 걷어 가자 저녁에 양중팡은 직접 모자란 부분을 보냈다. 모두 양중팡처럼 그러하다면 국가는 부패가 없고 탈세가 없을 것이다. 양중팡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잘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같이 좋은 사람이 국가에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사회에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양중팡은 오히려 ‘쩐싼런(眞善忍 : 진선인)’을 단호히 믿음으로써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

2001년 2월 양중팡은 옌지시 옌시파출소의 악경인 왕롄창(王連强), 왕리궈(王莉國)에 의해 시위안시장에서 강제로 끌려갔다. 함께 납치된 파룬궁 수련생 중에는 양중란(楊忠蘭)과 마수잉(馬淑英)이 있었다. 옌시파출소에서 왕롄창은 그녀들에게 주먹질하고 발길질을 하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한 파룬궁 수련생이 악경 왕리궈에게 물었다 : “우리는 도둑질도 하지 않고 빼앗지도 않았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왜 이렇게 대하는가?” 악경은 : “차라리 너희들이 도둑질하고 빼앗는 것이 낫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세 사람을 구치소로 보냈고 구치소에서 저녁에 또 당 간부학교(黨校)로 보냈으며 당 간부학교에서 돌벼루 “전향반”으로 보냈다. 붙잡힌 그날부터 시작하여 매 사람마다 매일 25원씩 돈을 갈취 당했다.

2002년 7월 1일 아침 6시, 양중팡의 집은 옌지시 건공파출소의 경찰에 의해 포위되었으며 수련하지 않는 아들, 딸, 남편도 함께 붙잡혔다. 딸은 학교에 가야 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를 상관하지 않았으며 바로 이렇게 온 가족이 모두 붙잡혀갔다. 바로 양중팡이 붙잡혀간 이튿날 아침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시장이 갓 문을 열자 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길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모두 양중팡이 맞아 죽은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진실임을 감히 믿지 못하였다. 어제 밤에 출퇴근할 때만 하여도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죽다니? 양중팡은 일처리를 잘 하였기 때문에 친구들과 이웃, 그리고 시위안 시장의 모든 개인상점들로부터 지극한 환영을 받아왔다.

그 당시 모두들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가서 보려고 하였다. 양중팡의 가족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는 유해가 이미 강제로 화장터에 보내진 뒤였다. 아울러 내장(腹内)도 이미 가져갔다고 하면서 말로는 법의학자가 감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악경들이 양중팡은 ‘급병을 얻어 죽었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장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일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검사결과만 기다렸다. 힘들게 기다렸는데 오히려 십여 종의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밝은 대낮에 이러한 거짓말로 민중을 속이자 모두들 지극히 큰 상처를 입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중팡은 98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여 한 알의 약도 먹지 않았으며 신체가 줄곧 아주 좋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년마다 하는 건강검사결과에는 모두 병이 없었다. 그럼 국가에서 내보내는 신체검사 합격증이 가짜였단 말인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 하에서 모두들 침통한 심정으로 좋은 사람을 위하고 진리를 위하여 모여서 청원의 행렬에 들어섰다.

그 며칠동안 시위안시장은 날마다 문을 닫았다. 양중팡의 아들딸은 “경찰이 나의 어머니를 때려죽였다. 나의 어머니의 결백을 돌려 달라.“라고 쓴 현수막을 옌지시 정부 문 앞에 걸어놓고 옌볜주위(延邊州委) 문 앞에서 정좌하였다. 함께 정좌에 참여한 이는 몇 십 명이었는바,(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으며 목격자에 말에 의하면 약 50명 좌우였다고 한다.) 양중팡의 친한 친구, 이웃, 시위안 시장의 개인상점,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7월경의 날씨가 그렇게 뜨겁고 모든 것이 뜨거웠지만 모두들 뜨겁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물을 마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이익을 위하지 않고 영업을 포기하며 문을 닫은 것이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위한 것은 양심이었으며 위한 것은 진리였다. 그들은 날마다 견지해 나갔고 정부가 회답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았다. 후에 정부 관원은 그들을 보기만 하면 문을 닫거나 혹은 보안 인원의 호위를 받으며 가버렸다. 그들은 또 청원하는 사람 일부를 가두었으며 누가 또 오기만 하면 누구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일반 국민들이었고 바로 정당한 도리를 요구하였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9.3”(주 : 옌볜 조선족 자치주성립 50주년 대축제)이 다가오자 상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공연하러 오게 되었고 불법 관원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정좌할까봐 두려워 양중팡의 집에 5만위안 보상금을 지불하였다.(현재 상황에서 피해자 가족이 받은 압력과 그 박해의 정도를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하던 그날 양중팡의 남편은 양중팡의 사진 앞에 예를 올리며 말했다 : “당신의 죽음은 위대하오!” 양중팡은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박해당하여 치사되었다. 양중팡의 죽음은 비장하고 위대하였다!

선량을 위하고 진리를 위하여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영업마저 하지 않으며 날마다 뜨거운 햇볕을 지고 청원한 양중팡의 친구, 이웃과 시위안시장의 개인상호들은 사람들의 탄복을 받았다. 대법제자들은 시비를 분명히 가리고 선량함을 수호한 당신들의 거동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아냈다. 또한 당신들이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는 과정 중에서 아름다운 미래를 택한데 대하여 기쁨을 느끼며 대법제자들은 진심으로 당신들을 축복한다.

청원하기 위한 증거를 얻으려고 양중팡의 유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양중팡이 맞아서 온 몸이 상처투성이며 얼굴이 변형된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있다.

아침 6시에 양중팡이 붙잡힌 후, 그날 점심 악경은 또 그녀의 여동생인 양중란을 시위안시장에서 강제로 데려갔다. 양중란이 임신 중이라 모두들 그녀를 위하여 사정하였지만 경찰은 안 된다며 임신하여도 붙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또 과일을 파는 한 대법제자를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그가 집에 있지 않아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웃의 말에 의하면 경찰은 여러 차례 그 대법제자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대법제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집을 떠나 떠돌아다녔다. 그녀의 남편은 아주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에 두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며 또 집안일도 하면서 아주 어렵게 지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그의 아내가 평안하게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고 하였다. 대법제자의 가족이 감당하는 고통은 거대하였다.

책임부문전화, 지역번호: 0433

위밍환 (魚明焕) 옌지시 건공파출소 (延吉市建工派出所) 지도원

2824004(사무실)2754022 (집)13844335577(핸드폰)

추이쑹궈(崔松國) 옌지시 건공파출소 (延吉市建工派出所) 소장

2834145사무실) 2857752(집) 13904435380(핸드폰)

리둥주 (李東洙) 옌지시 공안국 법륜공 박해를 주관한 부국장

2514600(사무실)2525232(집) 13804487858(핸드폰)

문장완성 : 2004년 2월12일

문장발표 : 2004년 2월26일
문장갱신 : 2004년 2월26일 1:53:39AM

문장분류 : 박해진상[迫害眞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