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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 간의 연분(緣份)을 소중히 여기자

‘수련생이 박해받은 데서 생각되는 점’을 읽은 소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어제 밍후이에서 이 글을 보고 우리 지역에도 법에 있지 않은 유사한 일이 존재하기에 마음에서 일종의 책임감이 우러나와 글을 쓰게 됐다.

우선 법공부 방면 특히 단체 법공부 방면에서 형식에 치우치는 문제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수련생들은 법공부 장소에 와서 배우고 끝나면 가는데 형식적으로 했을 뿐이다. 실제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1]라는 이런 연구 토론하고 교류하며 공동으로 제고하는 환경을 안배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의 법회는 서로 제고하고 격차를 찾으며 수련상태를 바로잡는 아주 좋은 계기이다.”[2] 우리는 단체 법공부 이 환경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매주 한 차례 단체로 법공부를 하면 사부님의 법에 대조하여 어느 부분을 해냈고 어느 부분은 하지 못했거나 잘하지 못했는지 등 각자 어떤 체험이 있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또한 본인이 깨닫지 못했거나 보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보았거나 깨달은 수련생이 제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를 하여 수련생들이 공동으로 제고하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의에서의 단체 법공부다.

법공부 태도가 단정하면 문제에 부딪혔거나 무엇을 들었을 때 자신이 뭘 말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를 법으로 단속할 수 있고, 보고 들은 것이 사부님의 설법에 부합되는지 법으로 가늠하게 될 것이다.

수련생이 박해로 세상을 떠나고 생각하게 된 문제와 교훈’에서 언급한 갑 수련생처럼, 그녀는 수련생에게 경찰에 의해 방에 갇히면 침대 시트를 사용할 수 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갑 수련생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강한 집착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럼 들은 수련생이 법리가 또렷하면 “이것은 구세력이 당신에게 강요한 생각이지 수련인의 생각이 아니다”라고 선의로 그녀에게 지적해야 한다. 그녀를 도와 법에서 제고하고 연구 토론, 교류하고 그녀를 도와 발정념하여 이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해체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整體)이기에 공동으로 제고하는 것은 우리 매 수련생의 책임이다. 여기에서 탓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의 수련 길을 잘 걷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런 일을 가급적 피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까지 걸어온 수련생은 정말 쉽지 않다고 수련생들은 알고 있다. 특히 갑 수련생(법공부만 하고 걸어 나오지 않은 수련생과 비교하면 잘한 것임)은 매일 진상을 알리러 나가고 자료를 배포했기에 잘한 것이다. 한 가지만 부족했는데 매우 중요한 한 가지였다. 마음을 조용히 하여 법을 배우고 법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대조하며 자신을 잘 닦아야 한다. 자신을 잘 닦아야만 중생을 더 잘 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번 교란받은 후 돌아와서 수련생들은 자기가 어떻게 정념으로 나왔다는 그녀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녀가 자신이 왜 거듭 교란을 받고 있는지를 찾았는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정체 수련, 정체 제고의 분위기이다. 본인이 찾았거나 수련생이 도와서 ‘왜 교란받는지’를 찾아 이 배후의 원인을 찾는 것이 수련인의 상태이고 근본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생으로서 우리는 수련생이 잘했을 때 칭찬하지 말아야 하고 더욱이 숭배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한다. 수련생이 이지(理智)적이지 않고 법에 있지 않을 때 반드시 선의로 지적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깊은 체험이 있다. 어느 한 번 단체 법공부 때 한 수련생이 나에게 모 수련생이 무슨 병업 가상이 나타났으니 나에게 그녀와 교류하러 가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말했다. “언니, 언니도 들은 후 그녀와 교류할 수 있지 않아요?” 이 수련생은 매우 착실하게 수련했고 법리가 매우 또렷하며 세 가지 일도 잘하고 있어 정말 매우 잘하고 이 능력이 있다. 유일하게 잘하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지 않고 개인 수련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은 것이다. 이 수련생이 이 방면을 말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마음이 좀 격앙되어 “당신들이 이렇게 내게 의지하면 나에게 좋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구세력이 그에게 손을 쓸 수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당시 내가 너무 강세여서인지 내가 한 말속의 뜻이 구세력의 안배를 인정한 거라고 지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과 그날 밤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속으로 그것들이 구세력임을 알고 있었음) 다른 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그녀(나를 가리킴)를 먼저 가게 하세”라고 말했다. 이튿날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갈 때 갑자기 꿈속의 장면이 생각났지만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말했다. ‘나를 먼저 가게 할 거라고? 지금 나는 여전히 가지 않았잖는가? 그럼 나는 진상을 많이 배포하여 사람을 많이 구하겠다.’ 나는 매번 진상 소책자 100부를 가지고 나갔는데 그날 나는 200부를 가지고 책가방에 가득 넣고 메고 나갔다. 미리 계획했던 아파트단지에 가서 배포했는데 절반 배포할 때까지만 해도 매우 순조로웠다. 내가 한 동에서 위부터 아래로 배포하면서 1층에 도착하여 왼쪽 문에 배포한 후 손을 내밀어 오른쪽 문에 진상 소책자를 놓으려 할 때, 문 위에 감시카메라가 아주 밝게 켜진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대법제자를 촬영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일념을 내보내고 책자를 놓고 곧바로 떠나갔다. 동시에 감시카메라 배후의 흑수(黑手), 썩은 귀신을 해체한다는 강대한 정념을 내보내고 그 건물 옆에 있는 단지에 가서 배포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 자료 배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 아파트단지 중생은 얻어야 할 진상을 얻지 못했다. 집에 가는 길에 한 남성을 만나 뒤따라가서 막 진상을 알리려 할 때 상대방이 눈을 부릅뜬 것을 보았다. 원래는 정신병 환자였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평소 감시 통제하는 지점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이지? 수련인은 매우 순수할 때 공능이 열린다. 온몸의 땀구멍마저 눈이어서 그 지점에서 배포하지 않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가?’ 나는 꿈속의 그 장면을 부정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대법제자는 기타 어떤 생명이든 관여할 수 없다. 구세력이 신이라 할지라도 대법제자를 시험할 자격이 없다. 나는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봤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니 지난번 단체 법공부 후 나의 그 바르지 않은 일념이 생각났다. 수련생의 신뢰를 수련생이 나를 의지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 속의 뜻은 또 자신을 수련생 위에 놓고 스스로 수련을 잘하여 곧 구세력의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나’가 승인했기에 구세력은 ‘나’를 도와 이 생각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이 바르지 않은 일념이 구세력에 나를 박해할 수 있는 구실을 준 것으로 깨닫고 연속 몇 시간 발정념하여 이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해체했다. 이튿날 다시 나갔을 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교란 없이 정정당당하게 사람을 구했다.

어떤 수련생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고 누구를 찾아 그와 연구 토론하고 교류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자기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기를 수련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하면 자기가 수련하여 제고할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닌가? 수련, 제고, 안으로 찾을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게 아닌가? 법을 얼마나 배우고 일을 얼마나 하고 삼퇴를 얼마나 시켰으며 진상 소책자를 얼마 배포했는지가 제고나 승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와 모순에 부딪혔거나 무슨 말을 들었을 때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하느냐 하지 않느냐, 사부님의 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지도하고 사부님의 법리로 수련생이 한 일 또는 수련생이 말한 말이 사부님의 법에 부합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를 분별해야 하지 않는가? 법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어야, 법을 배워서 아는 것이다. 최저한도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표면적인 이 층 법리를 깨달아야 한다. 심성이 도달해야 사부님께서는 공이 자라게 하시어 층차를 제고할 수 있으며 경지가 승화될 수 있다. 물론 수련생을 찾아 교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수련이 그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수련생은 이미 해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또 일부 수련생은 법공부를 매우 적극적으로 한다. 매주 몇 개 법공부 소조에 참가하나 어떤 문제도 보아내지 못한다. 이런 수련생은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다른 두 가지 일을 별로 하지 않고 대부분 흐리멍덩한 상태에 처해있기에 옳고 그름을 자연히 분별할 능력이 없다. 정념(正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한 부류는 두 가지 일에 매우 정진하지만 일부 수련생과 ‘주고받는 것을 중시하여’ 늘 서로 뭔가를 선물한다.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보여도 직접 말하지 않고 서로 치켜세운다. 사람의 ‘예(禮)’가 대법의 이치를 대체했다. 이런 수련생의 이 ‘예’를 언제 제거할 것인가? 이 예를 끊어버려야 대법의 법리에서 승화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설법에서 우리에게 법을 많이 배우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배우라고 거듭 타이르셨다. 여기에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또 “읽고 이해해야 하며”[3]라고 알려주셨다. 우리가 읽고 이해해야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법 중에 용해되는 것을 해낼 수 있고 모순이나 문제,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무얼 말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법으로 지도할 수 있다.

법을 배우는 기점을 바로 놓아야 일하는 기점이 바를 수 있다. 법을 배우는 기점을 바로 놓지 못하면 일하는 기점도 바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약간 체험이므로 바르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대만교류회에 보냄’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아르헨티나법회에 보내는 축사’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을 대표하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여 ‘비학비수(比學比修)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7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7/13/4279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