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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과 사(私)’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수련에서 배회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만, 그 원인을 몰랐다. 나는 어떤 한 상태를 돌파하지 못해 수련에 문제가 생겼음을 인식했다. 마성도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고(평소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지만, 상대방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끼면 화를 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참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이 기본적 도덕관이 없다고 느꼈다).

물론 이기적인 요소가 있고, 또 기본적으로 모두 자신의 이기적인 요소로 인해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사람의 관념과 집착심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 모두 수련에 좋은 일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비를 하나씩 넘기지 못해 쌓여서 조성되었고, 그 속에서 사악이 교란과 파괴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교란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오래 흐르자 정말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어제 법공부할 때 도대체 자신의 어디에 큰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인지? 사부님께 제자에게 점화(點化)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사부님께서 제자가 확실히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제자가 용기가 없어 감히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음을 보시고 방할해 주셨다. 오늘 ‘전법륜’에서 “진정하게 고층차(高層次)로 사람을 이끌다”를 공부할 때 갑자기 법 속에서 점화를 느꼈다. 당시 정말 매우 홀가분했는데 마치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깨닫게 되듯이 탁 트이고 밝아졌다.

문제는 ‘정(情)’이 너무 많아서였다! 수련자에게 ‘정’이 너무 많은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며 오히려 나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이 많으면 ‘사(私)’도 그만큼 많다. 무겁게 짊어진 불필요한 ‘정’은 바로 수련자의 집착심이다.

아마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짜 나인 ‘정’을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예를 들면 속인 중에서 ‘정’이 많은 사람은 남녀의 ‘정’을 위해 투신하는 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좋게 생각하지만, 사실 세간에서 사랑에 눈 먼 남녀‘정’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사실 모두 사심(私心)을 위한 것이다. ‘정’에 사로잡혀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친다. 물론 수련자는 비록 속인 사회에서 수련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정(情)’감을 숭상하고 죽음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부부의 은혜에 따라 인과관계에 순응하고, 함께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예를 들면, 육친‘정(情)’은 정말 친(親)인가? 이것이야말로 세인을 가장 현혹한다. 왜인가? 육친‘정’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깊은가? 누군가 자신은 육친‘정’이 얕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얕지 않고 매우 깊을 때가 많으며 자신은 매우 얕다고 느낄 뿐이다. 사실 그 속에서 상처받았지만, 슬픔이나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마음은 없을 뿐 진정으로 이런 집착을 내려놓아서가 아니다. 속인의 속담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며 친연(親緣)을 말하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철벽이다.

물론 세상의 다른 모든 것도 사람을 현혹하지만, 왜 육친‘정’이 남녀의 ‘정(情)’보다 더 세상 사람을 현혹한다고 할까.

왜냐하면, 오늘날의 변이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육친‘정’은 여전히 가깝고, 가족 몇 사람만이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남녀‘정’은 변이된 사회에서 세간의 남녀가 이렇게 많은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전통을 따라 늙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라며 딴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다.

만약 수련자가 육친‘정’에 집착하면 수련을 망칠 수 있고, 담담하게 보면 그 방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수련자도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많은 수련자도 육친‘정’으로 인해 공든 탑이 무너졌다.

현대사회의 변이는 이미 사람의 무의식중에까지 변이된 상태에 가 있다. 모든 사람이 변이되고 있기에 이 모든 것은 변이된 ‘정’감을 만들고, 수련자도 이 ‘정’의 집착에 대해서 흐리멍덩해졌다. 어떤 사람은 ‘정’이 죽지 않고 매우 교활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것이며 자신은 집착이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법리로 안에서 찾아보면 천천히 밑바닥을 볼 수 있다. 역시 자신을 위하고, ‘정(情)’과 ‘사(私)’를 잃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군가 자신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물질적 향락과 몇십 년 인간사회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고생을 하고 싶지 않고, 명성과 이익에 손해 보고 싶지 않으며, 자신을 변화하기는 더욱 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하고, 가짜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만약 동기가 정말로 완전히 남(어느 한 사람이 아니고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자비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결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순하면 아무리 그 사심을 감추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집착을 건드리기만 하면 ‘사’든지 ‘정’이든지 폭발한다. 마음을 움직여 화내고 분노하며, 심지어 보복까지 하려는데 아주 끔찍하다. 마도(魔道)에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또 업(業)을 지을 수 있다. 당연히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와 도덕관념하에서 자효모애(子孝母愛)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정(情)’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나 많이 변이되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함을 어리석다고 여기며 이를 조장한다. 사람마다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당당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며 자랑으로 여긴다. 자신을 위하는 마성의 표현은 젊은 층의 패션으로 자리 잡으면서 독특한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칭송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어떤 일이 실제로 자신의 이익과 연루되면 무슨 육친‘정(情)’, 남녀‘정’은 말할 나위도 없이 포기한다. 이익과 직면하면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감에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충성해야 하는지, 왜 효를 해야 하는지, 왜 은혜를 갚아야 하는지, 왜 사람으로 되어야 하는지, 왜 자비를 갖추어야 하는지, 현대인들에게 이런 가치는 한낱 웃음거리가 된다. 그렇지만 겉으로 표출하는 파괴로 갈증은 해소되지 못해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은 탈출구를 찾고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절에서 향을 태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얼마나 유용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정’이 있으면 ‘사’가 있고, ‘사’가 있으면 ‘정’이 있다. ‘사’가 있으면 어떻게 자비심이 나올 수 있는가. ‘정(情)’이 있으면 자비심이 더욱 나올 수 없다. 적어도 닦지 못한 부분은 자비심이 없고, 마성이 나올 때는 자비심이 나올 수 없다. 자비심은 ‘정’이 아니고 ‘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비심은 억압적이지 않고 누구를 특별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비심은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다.

수련자의 금기는 자신이 어떠어떠하다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누구도 특수하지 않고, 무슨 특수한 것도 없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기본 경지이자, 수련자가 명백히 알아야 할 이치이다.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추구하는 수련으로 되는데 이것은 필연적이다.

수련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지금에 와서야 수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려고 닦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써서 거울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허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을 대표하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여 ‘비학비수(比學比修)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6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6/2/4264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