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연(淨蓮)
[명혜망] 대법에서 수련한 지 어느덧 29년이 되었다. 함께 손잡고 대법에 들어온 수련생들 대부분은 이제 노년 대법제자가 되었고, 우리 같은 경우는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한다. 이 수년간 수련생들은 온갖 형태의 박해를 겪었으며 이는 현지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적잖은 손실을 가져왔다. 이에 직접 보고 겪은 박해의 몇 가지 원인을 적어 수련생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를 경계로 삼아 앞으로 수련의 길을 더욱 바르게 걸어가길 바란다.
아래는 개인적으로 법에서 깨달은 일부 인식으로,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1. 사부님께서 주신 법보인 ‘안으로 찾는 것’을 사용할 줄 모르다
수련자가 박해당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수련에서 안으로 찾는 것과 개인적으로 겪은 경험, 그리고 현지에서 박해당한 수련자들의 상황을 결합해 이야기하려 한다.
최근 몇 년간 가장 마음 아팠던 일은 곁에 있던 몇몇 수련자들이 세상을 떠난 일이다. 어떤 이는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착각했고, 어떤 이는 세 가지 일을 잘하면서도 자신 안의 일부 관념을 오랫동안 집착해 놓지 않아 결국 사악에 틈을 주어 사람 몸을 잃었다(색욕, 원망, 대법 자원을 사적으로 사용한 경우 등). 지금도 반복적으로 박해받아 신체의 자유를 잃은 이들이 있고 병업(病業) 상태를 겪는 이들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온갖 풍파를 겪어온 노년 대법제자들로, 수련에 대한 결심과 대법에 대한 굳건함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갈등과 고비 속에서 깊이 안으로 찾지 못하고 대부분 ‘용량을 키운다’, ‘높은 자태로 대한다’, ‘같은 수준으로 보지 않는다’, ‘참는다’ 등 인간의 고상한 품격 기준에 머무르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그를 건드린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내게 무례한 말을 했을까? 그 일은 그가 나를 오해한 거야. 아, 나는 수련자니까 그와 같은 수준으로 대하지 말아야지. 그가 너무 바빠서 법공부를 할 시간이 적었겠지. 나는 그를 포용하고 동정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이 고비를 넘겼다고 여긴다. 겉보기에는 아주 도량이 크고 이해심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수련 중에 과연 이로써 제고됐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이는 그저 속인의 고상한 품격에 머무른 것으로, 사부님의 요구 대로 안으로 찾는 것에 따라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니다.
대법에서 수련해 온 수련자라면 단지 세상 사람들 속의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으로 찾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갈등 속에서 없애야 할 관념과 마땅히 제고돼야 할 그것이 가로막은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분명히 어디가 잘못돼서 그가 불편했을 것이다. 내 일처리 방식이 선하지 못했나? 어디가 법에 부합하지 않았나? 사부님께서 그를 통해 내 부족함을 보게 하신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다시 생각해 본다. ‘혹시 나도 모르게 생생세세 쌓여온 관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부님 말씀대로 무조건 자신을 찾아야 한다. 수련인에게는 우연한 일이 없다.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아, 이것은 내 업력이다’라고 본다.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 수련인에게 우연한 일은 없다. 반드시 우리가 법에 동화돼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의 문제를 찾지 못하고 어디가 문제인지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반드시 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내 문제의 원인을 알고 싶다, 반드시 제고하고 싶다!’ 이 마음을 사부님께서 보신다면 틀림없이 도와주실 것이다. 대법은 무한하고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깨닫도록 하실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시다. 하지만 전제는 바로 스스로 제고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는 사람이 발원(發願)할 때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보는 동시에 당신이 진짜로 수련하는지를 본다.”(휴스턴 법회 설법) 왜냐하면 우주에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제고하려 하면 사부님께서 도와주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부님도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거나, 자신의 문제를 반드시 찾겠다는 강한 바람이 부족한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노년 수련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세상 사람 속에서 형성된 관념이 너무 오래되고 깊기 때문이다. 또 매번 고비를 넘을 때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아 없애야 할 관념을 그대로 보호해 왔기에 그것이 너무나도 강대해져 버렸다. 결국 그 관념이 주원신(主元神)을 지배해 안으로 찾으려 할 때마다 가로막는 것이다.
그것은 원인을 밖에서 찾게 하고, 육안으로 본 겉모습의 옳고 그름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자신의 ‘옳음’을 부각시키고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 변화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엉뚱하게 잘못 듣거나 가상이 보이도록 해 ‘내가 옳다’는 것을 더 강화한다. 머릿속에 온갖 이유를 만들어내거나 “이건 구세력이 교란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을 가려 안으로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한다. 결국 강한 자아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억울함으로 가득 차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며 자신을 닫아버리게 된다.
법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수련자 중에는 이런 교란을 구세력의 교란이라고 쉽게 돌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부님께서는 ‘7.20’ 이후 우리에게 개인 수련의 고비를 따로 배치해주지 않았다고 하셨다며, 어떤 교란이든 무조건 구세력의 교란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란 당함을, 당신은 늘 누가 교란하면 나는 그것을 소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누가 교란해도 다 안 된다고 여긴다.(뭇사람들의 웃음) 그러나 당신은 왜 생각해 보지 않는가. 왜 당신을 교란하는지를,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교란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무슨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려놓지 못한 것은 없는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가? 진정한 원인은 자신의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틈을 탈 수 있다! 당신은 사부가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각지 설법3-대뉴욕지역법회 설법)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어떤 모순이 나타나든지, 어떤 상황이 나타나든지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자신에게 누락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만약 누락이 없다면 누구도 이 틈을 탈 수가 없다.”(각지 설법3-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수련자 중에는 사부님 설법을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사람의 관념으로 법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진 관념과 맞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으니 법리 뒤에 담긴 진정한 내포를 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법리를 바로 알지 못해 스스로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겸허하게 다른 수련자들의 법에 대한 인식을 자주 듣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을 깨뜨리고 법을 더 잘 인식하도록 돕는 강력한 도움이며,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힘이다.
예를 들어 현지에 한 노년 수련자가 있었다. 그는 대법에 대해 매우 굳건했고 사악한 박해에 맞설 때 그 정념은 정말로 사악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였다. 세 가지 일을 잘 해내는 모습도 정진해 보였다. 그러나 올해 심각한 병업 상태가 나타났다. 의식이 잠시 흐려졌을 때 그는 마음 깊숙이 수년간 눌러두었던 수련자들에 대한 온갖 불만과 원한을 무심코 쏟아냈다. 이를 들은 수련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평소에 너무 깊게 숨기고 집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문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대법이 아니라, 본질적인 관념과 오랜 세월 쌓여온 일처리 습관이었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었던 사람과 일들을 법에서 보려 하지 않았고, 깊이 안으로 자신을 찾지 못해 표면적인 옳고 그름에만 머물러 있었다.
많은 노년 수련자의 대법에 대한 굳건함과 바르게 수련하고자 하는 결심은 젊은 수련자들에게 늘 큰 격려가 되어 왔다. 그들은 인생에서 숱한 고난과 사회적 격변을 겪었고, 사부님의 한없는 자비와 대법의 방대하고 초범적인 법리가 인생 속 고민을 해결해주었기에 더욱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수련은 그만큼 엄숙한 것이다. 경지의 승화는 결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대법에 들어왔는지가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다.
수련이란 바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고통은 업력(業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마음을 시험하는 갈등에 부딪혔을 때 관념은 즉시 수련인을 매우 속인처럼 표현하게 하고 곧장 세상 이치의 옳고 그름에 빠지게 한다. 이 중요한 순간에 참된 나와 거짓된 나를 분별하지 못하고 관념은 그렇게 한 번 또 한 번 지켜지며 남게 된다. 특히 노년 수련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랜 세월 쌓여 마지막엔 넘지 못할 큰 고비로 굳어진다.
누구도 각자의 수명이 얼마나 긴지 알 수 없다. 일부 수련자가 사악에 틈을 주었을 때 그에게 안으로 찾고 자신을 제대로 수련하도록 하려 해도 이미 주의식(主意識)이 약해지고 심지어 흐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는 틈을 주어 스스로 박해를 당하고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한 채 오히려 대법과 사부님을 의심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련자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법리적인 분석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련자들조차 다양한 박해를 겪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도살용 칼을 내려놓으면 성불할 수 있다(放下屠刀,立地成佛)’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입문일 뿐이다. 평소에 착실하고 착실한 수련의 기초가 없고, 평소에 이익과 인간의 마음을 분명히 잘라내는 정념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결국 사악을 뒤흔드는 강대한 정념이 생길 수 없다. 안으로 찾는 것은 수련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헛된 말에 불과하다.
조건 없이 자신을 찾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데 가장 유리하고 가장 신속하며 가장 빠르게 제고할 수 있는 길이다. 평소에 안으로 찾는 것을 배워 두고 수련자의 조언과 제안을 겸허하고 깊이 있게 받아들여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많은 손실을 피할 수 있다. 사실 안으로 찾는 것은 자신에게 백 가지 이로움이 있어도 해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까지 안으로 찾기를 꺼리는가? 이것이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바로 없애야 할 관념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2. 근본 집착을 내려놓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에서 “일부 수련생들은 근본 집착을 줄곧 제거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대법제자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근본 집착은 오늘날 정법 수련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내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근본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이 수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몇 년 전 집안에 한 가지 일이 생겼다. 이 일이 파룬궁 수련과 연관되었고 가족의 앞날과도 이어져 있어 내 마음속 두려움을 더욱 키웠다. 그 시기에는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눌린 듯해 매우 괴로웠다. 수련자들과 법공부할 때 나는 내 상태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고 수련자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인내심 있게 교류하며 분석해주었다. 덕분에 이 두려움은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조금씩 약해졌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그림자가 어느 순간 ‘훅’ 하고 올라와 나를 다시금 소극적이고 두려운 상태로 끌어내곤 했다.
어느 날 수련자들과 법공부를 하던 중 무심코 “아,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수련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했다. 사실 그때 마음속으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을 믿어왔고 그동안 줄곧 대법 속에서 행복하게 수련해 왔다. 돌아갈 곳을 찾은 듯한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련에 대한 그 신성함과 기쁨은 어디로 갔는가. 왜 이렇게 수련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가. 이건 내가 원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말이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한없이 소극적이고 무력한 한탄이었다. 이런 상태는 몇 달이나 이어졌다. 법공부도 하고 이 일과 관련해 발정념도 했지만, 이 상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정말 알고 싶었다. ‘대체 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날 밤 아주 또렷한 꿈을 꾸었다. 무릎 부위에서 물이 계속 밖으로 흘러나와 그걸 한 무더기씩 냅킨으로 흡수했다. 물을 잔뜩 흡수하고 나자, 마지막에는 맑고 투명하면서도 점성이 있는 물질이 흘러나왔다. 꿈에서 깨고도 도무지 깨닫지 못해 더 이상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꿈에는 분명 무언가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왠지 모르게 ‘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라는 경문을 꼭 읽고 싶어졌다. 참지 못하고 곧장 펼쳐 읽었다. (이 부분을 쓸 때 눈물이 났다. 우리 대법제자라면 누구나 사부님께서 늘 곁에서 자비로 지켜주시고 깨우쳐 주신다는 걸 몸소 느낀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소중히 여기신다.) 경문을 읽다 보니 저절로 자신의 근본 집착이 떠올랐다.
사부님은 ‘스위스법회 설법’에서 “과거,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수련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왜 부처가 되고 싶었는가. 부처의 세계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은 다툼과 속임수, 생로병사로 가득 차 있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부처가 되어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싶었다. 이것이 바로 과거 구(舊) 우주 생명의 근본 속성인 ‘나를 위한 것, 사(私)’가 아니겠는가. 대법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얻으려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의 근본 집착이었다. 이런 근본 집착은 사부님도 보시고 구세력도 보았다.
사부님께서 왜 근본 집착을 없애야 한다는 법을 거듭 말씀하셨는가? 이 근본 집착인 ‘사(私)’를 지닌 채로는 신(新) 우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근본 집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 부분을 수련하지 못했다. 구세력이 강제로 들이민 박해 속에서, 노동수용소의 압박 속에서, 평소 자녀 정과 각종 마음을 시험하는 충돌 앞에서 ‘나’의 행복이 깨어지고 ‘내’가 고통받고 이 근본 집착인 ‘사(私)’가 침범되면 ‘나는 못 하겠다’라며 타협하고 고비를 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오랜 세월 수련해 오면서 근본 집착을 없애지 못해 자기 수련에 많은 손실을 초래했다.
‘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를 법공부하며 자신을 하나하나 정리하자 마음속에 큰 문이 열린 듯 시야가 확 트였다. 갑자기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크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웃이 들을까 봐 입을 틀어막았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각성의 울음이었다. 지금까지 잘못 걸어온 길, 20여 년 수련의 과정이 머릿속에 떠올라 하나하나 눈앞에 펼쳐졌다. 매번 시련을 겪을 때 어떤 내가 고비를 넘었는지, 무엇이 나를 그렇게 어렵게 했는지가 한순간에 보였다.
이때 사부님께서 그 꿈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셨는지 갑자기 알 수 있었다. 무릎은 뼈가 많은 부위인데 그곳에서 많은 ‘수분(水分)’이 흘러나온 것은 근본적으로 수련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주신 것이다.(역주: 중국어에서 ‘수분’은 과장, 허위, 거짓, 거품이라는 의미가 있음) 내 근본 집착이 수련을 수분이 많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에 나온 맑고 투명한 물질은 그 수분이 다 빠져야만 깨끗해지고, 그래야 좋은 것을 수련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마침내 방향을 찾은 듯한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무리 멀어도 이제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알게 됐다.
대법에서 수련해 온 세월이 이렇게나 길었지만, 사부님의 법을 엄격히 따라 수련하지 못해 많은 손실을 초래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생과 인도를 생각하면 너무도 송구스럽고, 자신에게도 미안하며, 나를 믿고 구원받기를 기다려온 중생들에게도 미안했다. 동시에 제자를 위해 늘 곁에서 보호하고 아껴주신 사부님의 끝없는 자비에 깊이 감동했다.
지금 내 근본 집착은 찾아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다. 게다가 다른 집착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거나 생각 하나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어떻게 발견하고 억제하며 제거할지 알게 됐다. 이렇게 조금씩 끊임없이 그 집착의 뿌리인 ‘사(私)’를 무너뜨리고 없애는 것이다.
어떤 수련자는 모든 집착은 결국 ‘사(私)’에서 비롯되므로 그 ‘사’를 잡아 없애면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사람마다 근본 집착은 다르고 길도 다르다. 각자의 근본 집착은 수련자가 넘어지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얻은 교훈과 각인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이 근본 집착은 각자의 수련 과정 전반에 스며들어 수련의 길을 지배하고 좌우한다. 다양한 집착은 마치 큰 나무의 가지처럼 모두 나무뿌리에서 뻗어 나온다. 근본 집착이 바로 그 뿌리다.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겉으로 보이는 가지를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자라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만이 가장 올바른 길이다.
3. 일을 만났을 때 ‘정법 수련’의 기점에 서지 못하다
‘남을 위함(爲他)’은 신·구 우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법제자와 과거 수련의 근본적인 차이다.
우리는 갈등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왜 그렇게 일과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되는가?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뚜렷한 정법 수련의 의식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와 중생의 관계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자기 수련과 중생의 생사존망이 이어져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집착을 버리려다 또 다른 집착에 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개인 수련에만 머문다. 기준점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구세력이 곧바로 난관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어떤 집착이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 시련에 빠져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기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순정(純正)하고 강대한 정념으로 중생을 구할 수 없다. 그러면 그 자아 속에 빠져 심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감당하는 범위 안의 중생은 파멸될 뿐만 아니라 한 사람과 그 뒤에 있는 중생들마저 구원받지 못한다. 우주에서 가장 큰 선(善)은 사부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원용(圓容)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게 사부님께서 정법으로 사람을 구하시는 것에 반대 위치에 서서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죄다. 중생만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조차 위험해진다.
기점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세 가지 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법 수련 기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쉽게 기계적인 수련 상태에 빠지기 쉽다. 법공부, 연공, 발정념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원만을 위해, 좋은 몸 상태를 위해, 또는 박해 받을까 봐 두려워서 하는 것으로 바뀌기 쉽다. 그러나 법공부는 법에 동화돼야만 법력이 생겨 사람을 구할 수 있고, 건강한 몸 역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발정념도 사람을 구하고 중생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사악한 요소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중생이 시급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자비와 선을 잃고, 처음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겠다는 담대한 용기와 사명을 잃는다. 이런 마비 상태는 정법 구도의 시간을 질질 끌게 하고, 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준에 번번이 미치지 못하게 한다.
난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자신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출발점이 나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 살펴보고 기점을 바로 세우면 상황이 열리고 막혔던 길도 열리게 된다.
명혜망 기사 ‘정념으로 ‘처분보류’ 박해를 제거하다’에서는 글쓴이 수련자가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온갖 관념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자아와 중생구도 사이에서 자신을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밝혔다. 중생을 구하려는 강대한 정념을 품고, 자신을 박해하는 공안·검찰·법원 인원들을 구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자비롭게 편지를 쓰고 직접 진상을 알리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남을 위한 선념’이 결국 사악의 박해를 무너뜨렸다. 그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먼저 박해에 직접 가담한 공안에게 진상을 알리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부터 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타인을 먼저 구하고 우리를 직접 박해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대법제자의 넓은 흉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남을 위하고 사심 없는 새 우주의 이치에 부합하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악한 박해는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을 구하는 길은 아주 좁아 반드시 아주 바르게 걸어야 한다. 모든 ‘남을 위한’ 생각, 모든 중생에 대한 선의, 모든 거짓된 나에 대한 부정은 우리에게 또 다른 탁 트인 시야와 법에 동화된 뒤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정말로 정법의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엄숙히 대해야 한다. 이런 기회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만약 당신이 행할 수 있으면 당신은 곧 수련하고, 만약 당신이 행할 수 없고, 만약 당신이 수련할 수 없다면, 그럼 당신은 이후부터 다시는 수련할 생각을 하지 말라. 마(魔)가 당신을 속이는 외에 당신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데, 이후에 당신은 수련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허망함이 밀려온다. 그것은 한 생명이 오래 기다려온 수련의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상실감이며, 모든 것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절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잘 해내는 길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개인적인 수련 상태에서의 작은 인식이오니,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허스(合十)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10/49697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7/10/4969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