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본 천국악단 연주자
[명혜망]
1. 배경
저는 중국 모(某) 성(省) 가극원 대원(大院)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가극원에서 클라리넷을 부셨고 어머니는 가무단에서 피아노를 치셨습니다. 저는 매일 각종 악기 소리와 목청 틔우는 소리 속에 파묻혀 지냈는데, 시간이 오래되자 제 귀는 각종 음악에 매우 민감해졌습니다. 네 살 때 아버지는 제게 가장 작은 클라리넷을 주셨는데, 그것이 악기를 처음 접한 계기였지만 별 흥미는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어느 날 아버지가 색소폰을 가져오셨는데, 보자마자 너무 마음에 들어서 불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운지법을 가르쳐 주셨고 저의 악기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특기를 살려 금방 학교 예술단에 입단했고, 군악대와 전자밴드에도 참가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매일 아침 운동장에 가서 군사훈련을 할 때 우리는 연습실에 가서 악기를 연습하고 롱톤(Long tone)을 연습했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연습으로 입 모양이 더욱 안정됐고 음색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매일 꾸준히 연습한 것과 큰 관계가 있었습니다.
졸업 2년 후 저는 대법을 얻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만남이 너무 늦었다는 안타까움에 저는 즉시 악기를 뇌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악기에 대한 취미는 모두 집착이며, 이제 악기와의 인연은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2006년 어느 날, 명혜망에서 천국악단 퍼레이드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장기간 중국 본토의 고압적인 환경에서 생활해 온 수련생은 해외 거리에서 당당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대법을 널리 알리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악단 보도를 볼 때마다 감탄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저는 천국악단 단원으로서의 영광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됐습니다.
2. 천국악단 입단
당시 저는 국내에서도 똑같이 법을 실증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정말로 회사 파견으로 해외에 가게 됐고, 수련생의 추천으로 순조롭게 악단에 입단하게 됐습니다.
악보를 빨리 외우기 위해 출퇴근 전철 안에서 MP3를 들으며 틈나는 대로 곡을 외웠습니다. 이 암기법은 악보를 보는 것도, 악기를 연습하는 것도 아니었고, 음악적 기억력에 의존해 멜로디를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멜로디를 외운 후 이동도법 운지법으로 바꾸면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지나자 5곡을 불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행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2010년 5월 3일 히로시마 퍼레이드가 저의 첫 출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천국악단 단복을 입고 사부님의 정법(正法)을 돕기 위해 연주했을 때, 저는 중국 대법제자들에게 이 자리가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옛날 중국 수련생들은 대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지만, 저처럼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대법의 풍채를 드러낼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는 예전에는 바랄 수도 없었던 영광이었기에 제 가슴은 벅차올랐습니다. 저는 절대 틀리지 말고 딴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출전 소감이었고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악단 측에서 “지금 알토(Alto) 연주자가 너무 많고 테너(Tenor)가 부족하니 테너로 바꿀 수 있느냐”라고 물었고, 저는 주저 없이 수락했습니다. 당장 테너 색소폰을 샀는데, 돈이 더 드는 건 둘째 치고 이전에 연습해 둔 악보를 다 못 쓰게 되어 테너 악보를 다시 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 심성으로는 이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가 너무 소중했기에 행사만 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악단에 입단한 지 1년 남짓 지났을 때, 한 수련생이 저를 기술 지도로 추천했고 단장이 저와 상의했습니다. 당시 저는 지휘의 기술적 요구가 매우 포괄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실력이 부족하다며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단체 연습 때 다들 계속 틀린 음으로 부는 것을 듣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정정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다시 수련생이 저를 기술 지도로 추천했는데,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에 해보겠다고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맡고 보니 배워야 할 게 많았습니다.
우선 총보(지휘자용 악보)를 봐야 했는데, 당시 악단에는 총보가 없었고 수련생들도 총보가 뭔지 몰랐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분명 사부님께서 저를 기술 지도로 만드셨으니 그에 맞는 길을 배치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가야 할지 다시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무의식중에 천국악단 웹페이지를 훑어보다가 문득 일부 악곡에 mus 파일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 이것이 악보 프로그램 원본 파일임을 알았고 해당 소프트웨어를 찾아 우여곡절 끝에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영문이라 음악 용어를 잘 몰라 영어 용어도 함께 배워야 했습니다. 다행히 파일을 열어 볼 수 있었는데, 한 곡의 원본 파일 총보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소프트웨어로 재생해 보니 각 성부(聲部)의 연주 효과를 들을 수 있었고, 몇 개 성부만 골라 연주하거나 특정 성부 소리를 줄이거나 키울 수도 있었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마치 악단을 지휘하는 것 같았는데, 이것이 바로 제가 찾던 것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이끌어주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대다수 곡에는 이런 총보 파일이 없어서 저는 음표 하나하나를 직접 입력해 총보를 제작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악곡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었습니다. 그때는 종종 새벽 3시가 돼서야 잠들곤 했는데, 점차 악보 제작 과정에서 많은 음악 이론 지식을 배우게 됐고 악곡의 구조도 더 명확해져서 지휘할 때 마음속에 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각 성부의 멜로디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각 성부 악보를 외워야 했는데, 이는 자기 성부 악보만 부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한 곡에 10개 가까운 성부가 있어 투입하는 노력이 몇 배로 늘어났는데, 이는 혼자서 곡 여러 개를 연습하는 것과 맞먹었습니다. 이를 위해 출퇴근 전철에서 일본어 공부를 듣던 시간을 각 성부 MP3를 듣는 시간으로 바꿨습니다. 사부님께서 주신 음악적 기억력 덕분에 금방 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악보를 안 봐도 수련생이 틀린 곳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실외 연습이나 퍼레이드 전후 연습 때는 악보를 볼 여건이 안 되어 평소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선율 성부는 외우기 쉽지만, 어떤 성부는 단조로운 반주만 계속되어 몇 개 음표가 끊임없이 반복되기에 외우기가 매우 지루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때로는 단체 연습 전 시간이 촉박해 준비가 충분치 않아 자신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매번 단체 연습 전에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청했습니다. 음악이 울리면 악보의 멜로디가 뇌리에 다시 떠오르며 하나도 잊지 않았고, 누가 틀리면 바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줄곧 저를 도와주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악단은 초기에 바닷가에서 연습했습니다. 줄을 서서 바다를 향해 불었는데, 어떤 성부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비바람 등 날씨 영향도 받았습니다. 저는 대학 악단의 운영 방식을 참고해 실내 연습으로 바꿨는데, 연주 문제를 더 쉽게 들을 수 있어 단체 연습의 질과 시간이 모두 개선됐습니다. 나중에 저는 일부 수련생이 연습 방법을 모르고, 틀리게 불어도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기적인 성부별 연습(파트 연습)을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수련생들의 연습 질도 어느 정도 향상됐습니다. 이렇게 1년 넘는 시간을 거쳐 예전에는 어려워서 계속 연습해도 안 되던 곡들도 다 해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 후로 공지된 모든 퍼레이드 곡을 정상적으로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게 됐고, 모두의 열정도 예전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3. 심성 제고
기술적인 장애를 극복하자 심성(心性) 측면의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매번 단체 연습 전 집에서 자료를 준비하며 각 성부 악보를 보고 들어야 했습니다. 저녁에 2시간 남짓 연습하지만, 종종 낮부터 하루 종일 준비해야 했습니다. 막상 가보면 소수 인원만 와 있고, 지난번 단체 연습 때 교정해 준 문제인데 이번에 온 사람은 지난번에 안 왔기 때문에 또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연습해야 하니, 낮에 하루 종일 준비한 것은 쓸모가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다음 연습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라 진전이 매우 더뎠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먼 길을 오는 수련생들, 왕복 몇 시간 차를 타고 오로지 새 곡을 연습하러 오는 그들을 생각하면, 제가 안 가면 행진 지휘자가 행진 연습만 시켜야 하니 그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머리를 들이밀고 또 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어떤 수련생들은 실력이 좋아 연습에 안 와도 문제없는데 매번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연습에 협조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제 심성은 그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단체 연습 시간에는 제가 연습할 기회가 없어 집에 가서 혼자 연습해야 했습니다. 악단과 합주할 수 없어서 MP3를 틀어놓고 합주 연습을 했습니다. 일본 주택은 소음에 엄격해 악기 연습이 불편해서 화장실을 방음실로 개조했습니다. 방음 자재는 단열이 잘 되어 겨울에는 따뜻하지만, 여름에는 조금만 들어가 있어도 온도가 34~5도까지 올라갔습니다. 30분 들어가 있다가 반드시 문을 열고 열기를 빼야 했습니다. 좀 고생스러웠지만 적어도 밤 11시까지 연습할 수 있어 충분한 연습 시간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약과였습니다. 진짜 합주 때 많은 사람이 불지 못했습니다. 물어보면 연습을 안 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연습시켰습니다. 한 성부씩 짚고 넘어가다 보니, 할 줄 아는 수련생들은 또 불만이 생겼습니다. “시간 낭비다, 와봤자 얻는 게 없다”라며 오기 싫어했고, 스스로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일부 수련생은 단체 연습에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듣고 있자니 화가 났습니다. ‘다들 얻어가려고만 하다니, 이건 사심(私心) 아닌가? 나는 당신들보다 더 얻는 게 없다. 나도 연주자인데 합주 기회조차 없어 집에 가서 MP3에 맞춰 혼자 연습해야 한다.’ 때로는 오는 성부가 다 갖춰지지 않고 심지어 어떤 구간의 주선율은 부는 사람이 없어 리허설 효과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제 열정을 꺾어놓았습니다. 몇몇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저는 일부 수련생의 생각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악기 연습이 다른 항목 시간을 뺏는다고 여겨 평소 시간은 다른 항목에 쓰고, 단체 연습 날에만 반짝 연습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제게 개념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즉, 악단이라는 항목에 쓰는 시간이 악단 활동이 있는 그 시간뿐인가 하는 점입니다. 중학교 때 어머니와 점심 먹으러 집에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집에 가보니 아버지가 방금 악기 연습을 마치고 막 밥을 짓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온종일 집에서 쉬면서 밥도 안 한다”라고 화내며 불평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이건 쉬는 게 아니야. 악단에서 준 연습 시간이고 월급 받는 거야. 쉬는 시간이 곧 업무 시간이야”라고 반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개념은 이렇습니다. 이 항목에 참가했다면 악기 연습 시간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항목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항목 내용의 일부입니다. 악기 연습은 스스로 시간을 내서 해야 하므로 악단에서 통일적으로 배치하지 않습니다. 즉, 투입해야 할 시간은 크게 두 덩어리입니다. 하나는 전체 악단 활동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연습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악단이라는 항목에 속하는 것이지 다른 항목 시간을 뺏는 게 아닙니다.
이치는 설명했지만 실제 관리는 어려웠습니다. 실행 가능한 방법으로 ‘시험’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악단 규정은 5곡을 불 수 있으면 행사에 나갈 수 있고, 못 하는 곡은 소리를 안 내면 됐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 줄 알아도 틀린 곳이 많았고, 어떤 사람은 못 불면서도 불어서 잘 부는 사람까지 헷갈리게 했습니다. 악단 연주 질이 높지 않았기에 수준을 높이려면 반드시 시험을 봐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악기를 배우려면 시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저는 압니다. 중국에서는 ‘급수 시험(考級)’이라고 하는데, 이는 학생 실력 향상에 큰 동력이 됩니다. 정례 회의에서 이 제안을 했지만, 당시 단장은 수련생들이 시험 때문에 떠날 거라며 그들이 자각적으로 정진할 거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부 성부장(파트장)들도 반대하며 굳이 시험 볼 필요가 있느냐, 악기 배우는데 시험 본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왜 음악 전공을 하지 않았는지 후회했습니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제안했다면 다들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기술 지도를 맡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수련생의 입 모양(앙부쉬르)이 잘못됐고, 어떤 음색은 끔찍하다고 할 정도였으며, 자세와 손 모양도 틀렸습니다. 제때 교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기초가 있는 학생을 새로 가르치는 것이 초보자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요. 기초가 있는 학생이 선생님을 바꾸는 건 연습하다가 실력이 늘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큰데, 입문 때 싼 아마추어 선생님을 찾았다가 실력이 는 후에 전문 선생님을 찾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 와서 보면 예전 선생님이 가르친 손 모양이 잘못되어 있어 반드시 고쳐야 했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큰 공을 들이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 악단 수련생들은 대부분 대만에서 배웠는데, 대만에 전문 선생님이 있었는지 수련생들도 잘 몰랐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습니다. 제때 지적하지 않으면 악단을 잘 이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부별 수업(레슨)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수련생들은 다들 초보자인데 처음부터 선생님을 찾을 필요가 있느냐, 우선 불 줄 아는 수련생이 좀 이끌어주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된 뒤에 찾아도 늦지 않지 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안의 이치를 말했지만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동안 저는 이 직책을 맡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스스로 만족하며 계속할 수 있겠지만, 수련생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심지어 기술을 망치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게다가 기술 지도라는 책임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여러 번 제안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제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다들 저를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마음이 상했고, 또 수업은 각자 돈을 내야 하니 강제할 수도 없어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때 마음의 용량을 키워야 했는데 저는 깨닫지 못했고, 관리에 대해서도 점점 불만이 커졌습니다. 결국 협조인과 교류하다 다툼이 일어났고 홧김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이제 드디어 해방이다, 내 악기만 잘 불면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 지도에서 물러난 후 때로는 핑계를 대고 단체 연습에 안 가기도 했고, 연습 내용을 준비할 필요도 없어 처음에는 아주 편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수련생들이 찾아와 “악단을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단체 연습이 엉망이 됐어요”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저는 “악단에서 전문적인 지도자를 찾길 바랍니다. 저는 실력이 안 되고 시간도 없습니다”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와 기술 지도를 계속 맡아달라며 이것이 당신의 서약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난감했습니다. 사실 저도 악단 수준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고 아주 뚜렷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들 느끼고 있었는데, 매번 퍼레이드가 끝나면 연주가 안 좋았다고 느껴 사기가 저하됐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묻곤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나요? 다들 제 제안을 듣지 않으니 물러난 것은 악단에 지장을 주지 않고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맡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계속 연주자로 법을 실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생각에는 너무 힘들게 하지 않고 편하고 싶다는 사심이 섞여 있음을 알았고 이 마음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제게 그런 서약이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나는 색소폰을 쉽게 불 수 있을까? 예전에 기초가 있었고 악보 암기 능력도 강하니까. 하지만 왜 기초가 있고 암기력이 강할까? 어릴 때부터 그런 유전적 조건을 가졌으니까. 왜 내게 그런 조건을 주셨을까? …설마 사부님께서 악단을 지도할 소질을 키워주신 것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제가 물러난 것은 탈영병이 된 게 아닌가요? 사부님이 배치하신 길을 걷지 않은 것인가요? 아직 이 깨달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법리(法理)를 깨달았을 때만 느껴지는 그 착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고비를 잘 넘기려면 반드시 심성을 제고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얼마 후 악단에 인사 이동이 있어 단장이 바뀌었고, 또 제게 기술 지도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아직 제게 기회를 주고 계심을 마음속으로 알았습니다.
4. 기술 향상
다시 지도를 맡게 됐지만 심성 고비는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번은 대만 천국악단이 일본에 와서 함께 행사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클라리넷에게 나와서 모두의 음을 맞추게(튜닝) 하려는데, 당시 기술 협조인이 저를 끊고 트럼펫에게 나오라고 해서 음을 맞추게 했습니다. 당시 저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전에는 줄곧 클라리넷으로 조율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알고 보니 당신은 모르는구나’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대학 악단에 있을 때 늘 클라리넷으로 조율했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 수련생에게 왜 트럼펫으로 조율하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악단은 으레 트럼펫으로 조율해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전화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군악대(Wind Band)는 보통 오보에로 조율하는데, 오보에가 없으면 클라리넷으로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유를 묻자 “클라리넷은 조절 범위가 아주 작아서 겨울에는 음이 낮아져도 올리기 어렵고, 여름에는 음이 높아져도 내리기 어렵다. 트럼펫은 조절관(Tuning slide)이 있어서 어떻게든 맞출 수 있으니 클라리넷에 맞춰줄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제야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억울한 것을 못 참는 성격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악단에게는 대만이 표준이었기에, 설명하면 할수록 제가 고집을 피우는 것으로 비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제가 억울함을 절대 못 참는다는 것, 이게 바로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아닐까요? 마음의 용량을 반드시 넓혀야 했습니다. 동시에 현재 핵심 문제는 제가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전문적인 사람을 찾아 이끌게 해야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들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문 지도자를 초빙해 악단을 이끌게 하자고 제안했지만 일본 수련생 중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습니다. 일반인 지도자를 찾으려면 돈이 드는데, 심지어 제가 돈을 내서 초빙하겠다고까지 했지만 수련생들은 제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성부별 수업을 듣자고 제안하니, 이번에는 또 그럴 필요 없다며 각 성부에서 실력 좋은 사람을 찾아 이끌면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앞뒤가 다 막힌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다들 제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악단을 이끌어주길 바랐습니다. 이는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한 부류의 학생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선생님이 기본기를 가르쳐 주려는데 학생 학부모가 악보를 꺼내며 “우린 전공할 생각 없어요. 그냥 취미예요. 그런 건 너무 오래 걸리니 그냥 이 곡들을 가르쳐 주세요. 학교 무대에서 공연만 할 수 있으면 돼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학생은 가르칠 수 없고 가르쳐도 실력이 안 나오니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학부모 요구대로 가르친다고 동의한다면 사실 그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혔다고 느꼈습니다. 다들 이 분야 경험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말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지휘자 아키야마 카즈요시(秋山和慶) 선생을 초빙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다들 그의 명성을 아니까 그가 말하면 들을 테니까요. 이를 위해 수련생과 함께 아키야마 선생에게 연락했고 공연장 무대 뒤로 찾아가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대방은 매우 정중하게 기회가 되면 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지 않자 저는 차분히 자신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마음을 깨닫지 못한 걸까?’ 당시에는 자신을 내려놓고 포용해야 한다는 것만 찾았지만 근본을 찾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듣다가, 사부님께서 그 이치를 한눈에 꿰뚫어 보시면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최대한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되는지 저렇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신다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대법제자마다 수련 성취 후 자신의 세계에 그 아래 서로 다른 층차의 중생이 있고, 서로 다른 층차의 불도신(佛道神)을 포함하는데, 이 신들은 수련 성취한 대법제자가 보는 진상을 보지 못하고 그가 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들이 본 이치가 최고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법제자가 그들과 논쟁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대법제자의 이치대로 하라고 강제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는 그 아래 뭇 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것이지, 자기 이치대로 안 한다고 해서 아예 안 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련 중인 사람으로서 필연적으로 이런 고비에 부딪혀 그런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만약 고비를 피하려 한다면 빠뜨린 항목이 되지 않겠습니까? 수련생마다 잘하는 항목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대법 항목에서 이런 일이 생길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왜 각 항목마다 문외한이 전문가를 관리하는 상황이 많은지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 고비를 넘게 하려는 것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단에서 대만에 새로 온 지휘자가 있는데 전문 지휘자이고, 일본에 볼일이 있어 오는 김에 우리에게 지휘 강습을 해줄 수 있으니 참가하고 싶으면 신청하라는 공지가 떴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신청했습니다. 수업을 듣고 나서야 저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드디어 진짜 전문 지휘자가 왔구나! 악단에 희망이 생겼다! 수업 후 저는 또 클라리넷 조율이냐 트럼펫 조율이냐 하는 그 문제를 꺼냈습니다. 사실 아직 내려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리코더(여기선 목관악기, 즉 클라리넷)로 조율해야죠”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겪었던 그 맺힌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괜찮아요. 그럼 앞으로 튜너(조율기)로 조율하면 되죠”라고 했습니다. 저는 드디어 누군가 내 결백을 증명해 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저는 그가 상대방 수련생을 배려하고 있음을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지도자의 포용력과 선량함을 느낄 수 있었고, 반대로 제 쟁투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 후 이 전문 지도자 수련생에게서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배웠고, 그의 도움과 격려로 제 심성과 기술 모두 향상되어 악단을 이끄는 일이 더 순조로워졌습니다.
제가 제 의견이 맞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때, 제 소원은 오히려 실현됐습니다. 이 지도자의 추진으로 악단은 드디어 기술 시험을 시행하게 됐습니다. 많은 수련생이 “시험을 봐 보니 자신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악단과 같이 불 땐 문제없다고 느꼈는데 혼자 부니 틀린 곳이 너무 많고 심지어 끝까지 불지도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시험 반대 목소리는 사라졌고, 많은 수련생이 중시하기 시작하여 악보의 음표 하나하나, 기호 하나하나를 대조하며 진지하게 연습했습니다. 합주 때 음 이탈이나 박자 실수가 현저히 줄었고, 이 조치로 악단 연주 품질은 새로운 높이에 도달했습니다.
대만 기술 지도의 또 다른 조치는 드디어 성부별 수업을 추진한 것입니다. 일본의 전문가를 성부 선생님으로 초빙해야 했고 기본기 교재 연습도 추가했습니다. 이때 악단 내에서 수업료에 불만, 조 편성에 불만, 시간에 불만, 수업 자체를 반대하는 등등 온갖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이 일을 마주했다면 아마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만 기술 지도 수련생은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수련생들과 교류했습니다. 노심초사하며 입이 닳도록 설득했다는 표현도 과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일본과 대만을 오가며, 무거운 악보를 대량으로 직접 인쇄해 들고 비행기를 탔고, 초과 수하물 비용, 비싼 숙박비, 장시간의 단체 연습 등 많은 돈과 노력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수련생은 일본에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고 전부 무상으로 헌신했습니다. 대법 항목에 대한 그의 사심 없는 헌신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일반인 악단 지휘자는 모두 리더급이라 어디 가나 최고의 대우를 받는데, 그는 이곳에서 정반대로 가장 바쁘고 가장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헌신은 헛되지 않아 수련생들을 깨우쳤습니다. 많은 수련생이 성부 수업을 듣고 나서야 ‘내 주법이 줄곧 틀렸구나!’, ‘원래 이 악기는 이런 소리가 나야 하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타악기 성부 수련생도 마찬가지로 자기 손 모양이 원래 틀렸는데 고쳐지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 어떤 성부는 전체가 “끝장이다! 헛연습했네. 전부 처음부터 다시 고쳐야 해!”라며 한탄했습니다. 그 시기 저는 이런 목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다들 점점 성부 수업을 인정하게 됐고, 어떤 수련생은 단체 수업 외에 개인 레슨까지 추가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음색이 변하기 시작했고, 이상한 음색은 점점 줄었으며, 악단 전체 음색도 더욱 융합되어 연주 수준이 대폭 향상됐습니다. 그 시기 홍콩 대법 퍼레이드가 전면적으로 전개될 때였는데, 일본의 기술 향상은 악단이 홍콩에서 중생을 구하는 데 더 강력한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5. 압력
이 시기 악단은 상승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제 성부 수업도 들어야 했고, 악단 각 성부 수업 내용과 수업 효과도 점검해야 했으며, 동시에 일본 악단과 대만 아태 지역 기술 총협조인 수련생 간의 창구 연락도 맡아 업무 압박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제 근로 계약이 만료되어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수입이 없어졌습니다. 어떡하지? 저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실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성부 수업은 계속 들어야 하고 홍콩 퍼레이드도 가야 한다. 대법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더 많은 노력을 쏟아 사람들을 이끌고 연습했고, 각 성부 연습에 모두 참가해 가장 상세한 기술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제 성부 수업도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여 한 달에 네 번 수업을 들으며 기술을 빨리 향상하려 했습니다. 그래야 악단을 이끌 때 배운 기술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 한 달 수업료는 수련생 중 가장 비쌌을 겁니다. 게다가 주말마다 쉴 수가 없었는데, 때로는 휴일에 각기 다른 장소로 가서 다른 성부 연습에 참가해야 했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주차비만 해도 한 달에 적지 않은 지출이었습니다. 돈이 거의 다 떨어질 무렵 일자리를 구했는데 1년 계약직이었습니다. 회사는 1년 안에 일본어 실력을 올리지 못하면 정사원(종신 고용)으로 전환될 수 없고 재계약도 안 될 수 있다고 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또 일본어 선생님을 구해 일본어를 배웠지만 사실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퇴근 후 종종 야근해야 했고, 돌아오면 성부 수업이 있거나, 수업이 없을 때도 숙제를 연습해야 했으며, 그러고 나서 매일 법공부도 보장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수련의 길을 잘 걷기 위한 중요한 보증입니다. 게다가 단체 연습 곡목도 준비해야 했고, 악단 수준이 높아지면서 화성 곡목 연습과 기타 연습곡도 추가되어 준비에 노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단체 연습 아니면 각 성부 연습 참가였습니다. 그 외에도 지방 수련생 수십 명의 시험 영상을 봐야 했는데, 한 명당 8곡을 시험 보고 불합격하면 재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한 곡을 여러 번 시험 보기도 해서 합치면 업무량이 엄청났습니다. 저는 속으로 ‘제발 빨리들 통과하세요, 저 정말 못 버티겠어요’라고 빌었습니다. 저는 기술 지도 항목만 하는 게 아니라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했으니까요. 연주자라는 항목이 차지하는 시간만으로도 많은 수련생이 바빠서 감당을 못 하는데, 기술 지도 내용은 연주자가 들이는 노력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들어서 저는 동시에 두 가지 항목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일본어 수업은 복습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 지났지만 제 일본어는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어떡하지? 수련을 위해 흰 쥐 해부 실습을 포기한 제자 이야기를 하신 사부님 설법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도 대법 일이 우선이니 일자리는 사부님이 배치하시는 것이고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며 일본어는 좀 미뤄도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심성 시험임을 알았습니다.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사부님 배치에 맡기자, 악단이 내 사명이다. 결국 저는 오늘까지 이 회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고 정사원으로 전환됐습니다. 진정으로 어떤 마음이든 다 내려놓을 때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6. 마음이 일어나다
악단 운영이 점점 성숙해지고 홍콩 출전 횟수가 늘어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마음들이 강해짐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말투가 점점 드세졌고, 일 욕심, 과시심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협조인들도 각종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홍콩에 출전하는 각국 악단 중 일본의 역할을 더욱 중시했고, 어떤 이는 다른 의견에 대해 “당신, 그건 사람 마음이에요, 자신을 찾으세요”라는 말 한마디로 일축하며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마음들을 제거하기 위한 갈등이 초래됐습니다. 이로 인해 저와 협조인 사이 소통은 점점 줄었고 마치 마음에 앙금이 낀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정기 공연 인원 선발에서는 원래 기본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무대에 설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줄을 세우지 않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수련생들이 당시 단장에게 찾아가 사정했고, 단장은 그들을 대열에 합류시켰습니다. 당시 제 자존심은 몹시 상했습니다. 사실 이때 저는 단장과 평화롭게 법리(法理) 위에서 이 일을 깨닫고 서로 마음에 앙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악단이 좋아질 텐데 당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또 홍콩 행사에 나가려면 8곡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협조인은 각국 출전 인원 중 일본 비율을 늘리기 위해 종종 특례라는 명분으로 통과하지 못한 수련생에게 청신호를 주었습니다. 이는 엄격한 시험 기준 집행을 허울뿐인 것으로 만드는 것 같아 저는 속으로 무척 화가 났습니다. 어느 단체 연습 때 제가 다시 이 문제를 이야기했을 때 저는 이미 강한 원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돌아온 것은 더 강렬한 “당신의 그건 사람 마음이에요, 안으로 찾으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사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협조인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제 의견 내용은 맞았을지라도 방식에는 사람 마음이 섞여 있었으니까요. 저는 제 권한 범위가 침해당했다고 느꼈고 자신을 찾지 않았으니, 그도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 쌍방이 다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 한번은 당시 단장과 이야기하여 어느 성부 선생님께 기본기 연습 지도를 맡기기로 했고 비용은 제가 내기로 했습니다. 단장은 선생님이 션윈(Shen Yun)을 본 적 있으면 된다고 해서 선생님께 션윈을 보여드리고 비용도 합의했습니다. 다시 단장에게 말하러 갔더니 그는 말을 바꿔 다 같이 회의해서 태도를 표명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놀림당한 느낌이었는데, 과연 회의에서 별별 말이 다 나왔고 결국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부결됐습니다. 사실 이때 양쪽 다 이미 응어리가 졌는데 양쪽 모두 평온하게 풀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저는 더는 못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동시에 악단에도 비정상적인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은 계속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는지(내력)’, ‘어떤 사명이 있는지’ 봐주었고, 어떤 수련생은 대량으로 향을 피웠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번 수련생들이 반대 의견을 냈지만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의 사명을 봐주던 수련생은 홍콩에서 쓰러져 육신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악단은 어떤 움직임도 없었고 반성이나 교류도 시키지 않았으며, 저도 한참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 저와 아내는 악단이 확실히 뭔가 잘못됐고, 사고가 날 것 같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 상태를 되돌릴 수 없다고 뚜렷이 느꼈습니다. 저도 점점 더는 못 하겠다는 느낌이 들어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고, 결국 결심을 굳히고 기술 지도직을 사임하고 평단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7. 재학습
악단은 사직서를 수리했고 다른 수련생을 기술 지도로 뽑았습니다. 저는 드디어 홀가분해졌습니다. 평범한 단원으로 일상적인 악단 활동에 참가하면서 제 마음 상태도 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평온해질수록 예전의 그 일 욕심, 남보다 우월하다는 마음, 기세등등한 마음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했다면 제가 어떻게 변했을까요! 당시 정말 좀 두려웠습니다. 이 협조 업무를 오래 하면 부지불식간에 많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제때 내려온 것이 다행이었고 연착륙한 셈이었습니다. 예전에 올라갔던 협조인들을 보면 올라가는 건 쉽지만 평온하게 내려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으로 평범한 단원으로 남자, 이러면 편하고 안전하다, 기술 지도 바통은 어쨌든 넘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명백한 일면이 저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간은 쉬라고 준 게 아니라 다급히 학습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다.’ 하지만 뭘 배우지? 그러다 문득 일본의 일반인 악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일본 관악 수준은 세계 일류인데 그들은 어떻게 향상하는지 예전부터 매우 배우고 싶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줄곧 연구할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기회가 왔으니 근처 시민 악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들의 수준은 매우 높아서 새로 받은 악보를 바로 대강 불어낼 정도였는데 저는 전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다들 친절했고 아무도 제게 압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점차 저는 일반인 지휘자가 우리 지휘자보다 훨씬 편하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학생 악단 콩쿠르 영상 속의 엄한 지휘자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이는 목적이 다르니 악단을 이끄는 방식도 다름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곳 지휘자는 악단이 돈을 주고 초빙한 것이라 그렇게 큰 책임감이 없고, 그렇게 힘을 들여 연주자를 이끌며 하나하나 디테일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 악단 지휘자는 정말이지 마음을 졸이며 애를 태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인 지휘자를 초빙해 악단을 맡겨도 그 사람은 그렇게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연습 안 하는 상태는 일반인 지휘자가 견디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큼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악단 수준은 무엇으로 보장될까요? 연주자 스스로 공을 들여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휘자는 개인 기술 향상에는 별 관여를 안 하고, 악곡 전체 표현만 요구하며 시간이 되면 돈을 받고 갑니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향상을 요구합니다. 한 달에 6번 단체 연습이 있고, 개인 레슨을 받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60세가 넘었는데도 배우고 있었고, 심지어 음악대학 졸업생인 전공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력은 음악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우리 연주자들은 지휘자보다 훨씬 편했습니다. 한 달에 두 번만 연습하고, 단체 연습 날 외에는 평소에 거의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격차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악단은 1년에 두 번 정기 연주회를 여는데, 매번 곡목이 15곡 이상이라 1년에 30곡 이상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특정 공연 교류 활동이 있어 곡목 양이 매우 많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매일 밤 연습해야 겨우 악단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거의 꼴찌 수준이었고 때로는 못 따라갔습니다.
이것은 우리 악단에서 힘겨워하던 수련생들의 심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악단 곡 연습이 아주 쉽다고 생각했기에, 못 따라오는 수련생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고 때로는 단체 연습 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그 위치에 처하게 됐습니다. 제가 잘 못 불 때 일반인 지휘자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저는 이미 충분히 미안했고, 만약 비판까지 했다면 정말 미안해서 다시는 못 왔을 겁니다. 그 느낌은 정말 마음은 간절한데 힘이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역지사지로 인해 저는 이후 다시는 수련생을 비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일 많은 양을 연습하자 독보(악보 보는) 능력이 빨라짐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제 개인 선생님도 요즘 독보력이 늘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멜로디를 외워서 악보를 잘 안 봤는데, 지금은 곡 양이 많고 어떤 건 6~7페이지나 되어 도저히 외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반인 악곡에는 긴 휴지부(쉼표 구간)가 많아서, 우리 대법 곡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부는 게 아니라 쉰 후에 마디 수를 세어야 정확히 들어갈 수 있어서 악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나중에 제가 각 성부 악보를 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수련생 시험을 볼 때 가져온 각 성부 악보는 그리 어렵지 않아 바로 부를 수 있었고, 틀린 곳을 즉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은 연주자가 악단에 대해 지는 책임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악단이 연말 신년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홍콩 퍼레이드 공지가 떴습니다. 마침 신년 음악회와 같은 날이라 저는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내야 했습니다. 이때 음악회 곡목 리허설은 이미 절반 가까이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악단은 유감스러워했지만 저를 이해해 주었고 흔쾌히 휴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리허설에 가보니 새로 온 색소폰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물어보니 악단이 돈을 주고 고용한 전문 연주자였습니다. 제 제2성부(Second part)가 비면 안 되는데 리허설이 이미 반이나 지나서 다른 사람을 찾아 처음부터 연습시키기엔 늦었으므로 전문 연주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가 리허설과 정식 공연에 오는 것 모두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매우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출전 때문에 휴가 내는 간단한 일이 엄격한 악단에서는 이렇게 큰 영향을 줄지 몰랐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에야 반응이 오는데, 그 돈은 제가 냈어야 했습니다. 제 원인으로 악단에 손실을 끼쳤으니까요. 하지만 악단은 아무 말도 안 했고 오히려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정은 있다고 위로했습니다. 이후 리허설에서 저는 무대 아래 앉아 참관하며 배웠습니다. 제가 불면 악기가 하나 늘어나 음악 밸런스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또한 우리의 출전이 처음에 참가 신청할 때 이미 악단과 약속을 한 것과 같으며, 이후에는 약속에 책임져야 하고 함부로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몇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악단 공연 품질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인 악단에서 1년 반 정도 배우는 동안 저는 집에서 거의 매일 1시간 이상 연습을 유지했고, 점차 악단 진도를 따라갈 수 있게 됐습니다. 지휘자가 제게 요구하는 각종 악곡 처리를 그가 만족하게 해낼 수 있었고,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빛도 달라져 더는 초보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성부 연습을 배치하고, 연주회를 기획하며, 선곡하고, 리허설하며, 지휘자가 어떻게 곡을 처리하는지 등 각 사항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습니다. 이 학습이 곧 끝날 것 같고 이제 그만둬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때 저는 이미 독자적으로 한 성부를 맡고 있어 어떻게 그만둘지가 오히려 어려운 문제가 됐습니다. 마침 이때 중공 바이러스(코로나19)가 일본에서 대규모로 유행하기 시작해 각종 문화예술 활동이 잠정 중단됐고 악단 활동도 중지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이토록 신묘하게 배치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8. 파동
전염병이 심해지면서 이때 천국악단 활동도 중단됐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다들 서로 연락이 없었고 인터넷상의 각자 항목으로 옮겨갔는데, 이때 사악(邪惡)이 틈을 찾았습니다.
나중에 발생한 일은 다들 아시다시피, 싱가포르에서 온 여자 특무(스파이)가 일본에서 큰 교란을 일으켜 사부님께서 경문을 발표해 방할(棒喝)을 하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천국악단 항목은 이번 사건으로 큰 손실을 보았고 많은 단원, 심지어 협조인까지 교란받아 어떤 이는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전염병이 완화되면서 악단이 다시 활동하려 할 때, 불학회(佛學會) 회장과 새로 부임한 단장이 저를 찾아와 다시 기술 지도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때가 악단이 어려운 시기임을 알았기에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전 일반인 악단에서의 경험이 원래 이때를 위해 준비된 것이며 모두 사부님께서 미리 배치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술 지도 업무를 맡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악단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수련생도 장기간 휴식으로 인해 기술 수준이 정도는 다르지만 하락하여 악단은 침체기에 있었습니다.
9. 다시 비상하다
다시 지휘 자리에 돌아왔을 때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기술이 아니라 사기 저하였습니다. 홍콩 출전은 이미 불가능했고 일본 현지 활동도 많지 않아, 많은 수련생이 항목의 중심을 각종 매체로 옮겼으며 각 성부 인원도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악단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이 항목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 적극적으로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국면에 직면해 악단은 전면적인 조정을 했습니다. 어떤 성부는 통합하고 어떤 성부장은 교체했습니다. 대만 기술 총협조인 수련생과 신임 단장은 기술적인 면에서 제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교류를 했습니다. 신임 단장의 신중하고 실무적인 업무 태도는 제게 다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제게 “이 항목이 앞으로 중요하든 안 하든, 사부님께서 멈추라고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는 전력을 다해 잘해서 사부님을 뵐 면목이 있게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소박하고 추구함이 없는 마음가짐이라면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라 느껴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일본은 아직 전염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연습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고 연습해야 했고, 퍼레이드 기회를 신청하기는 더 어려웠습니다. 단체 연습 재개 초기, 다들 어느 정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악단이 어떻게 변했나 보자, 아직도 될까? 출전 기회는 있을까?’ 이런 마음에 대해 저는 매번 단체 연습 시작 전 발정념(發正念) 할 때, 사부님께 ‘단체 연습에 온 모든 수련생이 얻어가는 게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가지(加持)를 청했습니다.
단체 연습 재개 초기, 수련생들의 악기 소리는 대부분 트이지 못했고 음색이 좋지 않아 코로나 이전에 비해 하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반인 악단에 있을 때의 교훈을 받아들여, 제 마음을 낮추고 모두에게 압력을 주지 않았으며 부족한 점을 비판하지 않고 많이 격려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향상되면 즉시 긍정하고 칭찬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곡이 익숙지 않고 속도를 못 따라갔는데, 저는 한 성부 한 성부 조금씩 디테일을 이끌며 연습해 되도록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여 헛걸음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모두에게 그리 높은 목표를 설정해주지 않고, 회복을 위주로 기본기를 잡으면서 동시에 단체 연습이 편안하고 즐겁게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예전보다 연주 중의 문제를 더 잘 들을 수 있었고 누가 실수했는지 단번에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온하게 수련생에게 실수를 지적해 주면 수련생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2시간 반 연습 동안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고 귀도 평소보다 예민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비로소 피로가 느껴져 거의 침대에 쓰러져 잠들곤 했습니다. ‘이게 어디 내가 연습을 이끄는 것인가, 사실 나는 사부님 조수 노릇만 할 뿐이다’라는 것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됐습니다. 점차 악단 소리가 좋아졌고 다들 단체 연습에 오고 싶어 했습니다. 단장도 다방면으로 노력해 더 많은 출전 기회를 따냈고, 전염병 시기도 지나가면서 교란받았던 수련생들이 속속 악단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예전 느낌으로 회복된 것 같았지만, 다른 점은 관중의 박수가 많아졌고 모두의 자신감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사악이 호시탐탐 교란했습니다. 때로는 단체 연습 때 소업(消業)이 겹쳐 분명 낮에는 열이 나고 발정념을 해도 변화가 없었는데, 꿋꿋이 단체 연습에 가서 앞쪽 지휘 위치에 서기만 하면 마치 아무 느낌도 없는 듯했고 심지어 소업 중인 것도 잊었습니다. 연습이 끝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제 단체 연습을 교란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번은 소업 교란이 컸는데 지금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올여름 제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계속 심해져 서 있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앉아 있기도 힘들어 누워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교토 출전이 일주일 남았는데 사악이 또 교란하러 왔음을 알았습니다. 계속 강도를 높여 발정념을 하고 많은 집착심을 찾았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사악은 기세등등하여 마치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출근도 못 하고 매일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아랫배 어느 부위가 붓기 시작해 서서 걷기도 불편했습니다.
예약한 신칸센 표 발권까지 하루 이틀밖에 안 남아, 저는 휴가를 내고 행사에 빠져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출발하는 날까지 꼭 낫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출발 당일이 되어도 통증은 줄지 않았고 부어오른 부위는 더 커졌습니다. 이 병업(病業)이 좀 심각해서 제 목숨을 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갈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이 진행 속도라면 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었고, 길에 쓰러지거나 구급차에 실려 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가는 게 대법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 안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아내도 정념(正念)으로 대해야 한다며 사부님을 믿으라고 격려했지만 강요하지는 않았고, 반드시 제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집을 나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더 서두르지 않으면 기차 시간을 놓치게 됐습니다. 안 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 있지만, 어쩌면 제가 구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안 가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대법에 더 좋은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서서, 아픈 몸을 참고 가부좌하고 앉아 대연화수인을 하고 사부님께 일깨움을 청했습니다. 제가 완전히 고요해지기도 전에 어떤 일념(意念)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사부님께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맡겼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안 가려 하느냐?’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착각인지 다시 자세히 느껴보려 했지만 다른 건 없었고, 제게 남겨진 건 바로 이 일념뿐이었습니다. 당시 정말 망연자실했습니다. ‘설마 내 꼴이 이런데 정말 출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식으로 사부님께 일깨움을 청한 것이니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은 시험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떠올랐는데, 의심하면 대불경(大不敬)이 아닌가요? 게다가 ‘너에게 맡겼다’라는 말씀이 너무나 무겁고 또렷해서, 충격을 받은 저는 감탄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큰 책임이 있었나! 그렇다면 망설일 게 뭐 있나, 어서 내려가 옷 갈아입고 가자!’
저는 거의 울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었습니다. 아내가 제 꼴을 보고 멍해져서 “결정했어요? 왜 그래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방금 사부님께 일깨움을 청했는데 사부님께서 가라고 일깨워 주셨어요. 그럼 반드시 사부님의 일깨움대로 해야 해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죽어도 거기 가서 죽을 거예요(당시 심정)”라고 말했습니다. 울면서 말했는데, 이 가장 어려운 때에 사부님께서 일깨워 주셨으니 희망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제게 얼마나 큰 자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갈까요? 집에서 역까지 걸어서 7~8분이면 되는데 저는 걷지 못했고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방법을 생각했는데 제가 차에 누워 있고 아내가 운전해서 역까지 데려다준 뒤, 아내가 다시 차를 몰고 집에 와서 주차하고(역에 주차해 놓을 수 없어서) 혼자 걸어서 역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 내내 마치 누군가 배치해 놓은 듯했습니다. 전철을 탔을 때 제가 서 있는 곳마다 사람이 일어나 내려서 줄곧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습니다. 아팠지만 참을 만했습니다. 신칸센에서 아랫배 부위에서 무언가 아래로 배출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표면 신체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토 호텔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왔잖아? 올 수 있다면 내일 행사에도 갈 수 있어.’
계속 발정념을 강화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붓기가 멈추고 억제된 것 같았습니다. 오전에 단체 연습이 잡혀 있어 가야 했는데, 앉아서 지휘하더라도 가야 했습니다. 연습장에 가보니 벽에 기대면 서 있을 수 있었고, 단장도 모두에게 저를 위해 발정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두의 정념 가지 하에 오전 연습을 뜻밖에 다 버텨냈습니다. 오후 퍼레이드가 가장 힘든 고비였습니다. 날씨가 무척 더워 많은 수련생이 한 번 왕복하고는 더위에 지쳐 단복이 흠뻑 젖을 정도였는데, 소업 중에는 완주가 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대열 옆에서 걸어야 했지만, 지금은 빨리 걸을 수 없어 대열을 못 따라갔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걷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복을 입지 않으면 악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연주 상태를 파악할 수는 있었으니까요. 반쯤 가다가 좀 쉬고 대열이 돌아올 때 다시 돌아오려 했고, 단장도 무리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절반쯤 갔을 때 그리 덥지 않고 걸을 만했습니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전체 코스를 완주했는데 별로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돕고 계심을 깊이 알았습니다. 예년에 이 코스를 걸을 때도 이렇게 편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랫배 붓기가 빠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사악의 교란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의 큰 난도 사부님께서 없애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그 정념을 원하시고, 다른 것은 모두 도와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단이 제고됨과 동시에 저를 받쳐주어 제고시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느덧 악단이 코로나 이후 활동을 재개한 지 5년 가까이 됐습니다. 기술이 향상된 것 외에 사람 구하는 힘도 갈수록 커졌고, 법을 실증할 기회도 점점 많아졌으며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작년부터 2년 연속 괌 광복절(Liberation Day) 기념 퍼레이드에 참가했고 괌 관광청의 환영과 재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더욱 얻기 힘든 나고야 ‘일본 도만나카 축제(Nippon Domannaka Festival)’ 출전 기회를 신청해 약 200만 명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10차례 공연을 마쳤고 광범위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모두 악단이 전에는 거두지 못했던 성적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저는 천국악단에서 16년을 걸어왔습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제 심성도 악단이라는 항목 안에서 끊임없이 제고되고 용량이 커졌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단체 연습을 이끄는 게 그냥 같이해주는 것이고 모두를 위해 헌신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이것이 바로 저의 수확이었습니다. 이 16년의 악단 생활은 사부님께서 제 어린 시절부터 준비해 주신 것이니 정말 사부님의 고심과 깊은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천국악단 창단 20주년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6년 2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13/5063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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