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쑨이싱(孫一行)
[명혜망]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묘택(苗澤)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문하시랑(門下侍郎) 황규(黃奎)의 처남이다. 그는 황규의 첩 이춘향(李春香)과 사통했는데,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묘택은 황규가 마등(馬騰)과 함께 조조(曹操)를 제거하려고 모의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조조에게 밀고했고, 조조의 손을 빌려 황규와 마등 등을 모두 죽게 했다.
일이 끝난 후 묘택이 조조에게 말했다. “상은 바라지 않고, 이춘향을 처로 삼게 해주십시오.” 조조가 냉소를 터뜨렸다. “너는 부인 하나 때문에 매형의 일가족을 해쳤으니, 이런 의리 없는 자를 남겨둬서 어디에 쓰겠느냐!” 조조는 곧 묘택, 이춘향을 황규의 일가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참수하게 했다.
후세 사람들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묘택이 사욕으로 충신을 해쳤으나
춘향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을 상하게 했네
간웅조차 그를 용납하지 않으니
헛되이 소인배의 도모를 꾸몄구나
청나라 초기의 문학비평가 모종강(毛宗崗)은 부친 모륜(毛綸)과 함께 수정하고 평점(評點)한 《삼국연의》 판본(약칭 ‘모평본’)에서 이렇게 비평했다. “소인은 군자에게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인에게도 용납되지 않는다. 소인으로서 소인을 도모해도 소인에게 용납되지 않고, 소인으로서 소인을 도와도 역시 소인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이를 읽으면 소인이 되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
아래에서 실제 역사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양강의 밀고
고평릉(高平陵)의 변 이후, 조위(曹魏)의 군정 대권은 사마(司馬)씨에게 넘어갔다. 태위 왕릉(王凌)은 조카인 연주(兗州)자사 영호우(令狐愚)와 함께 사마의(司馬懿)에게 반기를 들려고 모의했다. 그러나 영호우의 심복 양강(楊康)이 수도에 업무 보고를 하러 갔다가 밀고했다. 가평(嘉平) 3년(251년) 4월, 사마의는 왕릉의 반란을 평정했다.
사마의는 수단이 악랄하여 왕릉의 삼족을 멸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의 삼족까지 멸했다. 그는 밀고자 양강의 처리에 대해서도 몹시 고심했다. 사마의는 조위의 강산을 차지하는 것이 시간문제임을 알고 있었기에, 권력을 탈취한 후 찬탈하려는 자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염려했고 충성심이 가장 필요했다! 양강을 살려두면 배신을 장려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양강을 드러내놓고 죽이면 밀고자의 길을 막아버리게 된다.
교활한 늙은 여우 사마의는 어떻게 했을까? 양강을 영호우의 다른 심복 단고(單固)와 법정에서 대질하게 했다. 양강은 상을 받을 줄 알고 잔뜩 기대했으나, 결국 진술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단고와 함께 처형당했다. 사마의가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준 느낌은 이러했다. ‘양강은 변덕스러운 소인배이며, 그가 죽은 것은 밀고 때문이 아니라 공범이기 때문이다.’ (《진서(晉書)》, 《삼국지(三國志)》 참조)
2. 송지문의 밀고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은 인품이 극히 나빴다. 그는 측천무후(武則天)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 형제에게 아부하며 달라붙었다. 장역지 등이 처형된 후 송지문은 영남(嶺南)으로 좌천됐다. 이듬해 그는 몰래 낙양으로 도망쳐 친구 장중지(張仲之)의 집에 숨었다. 당시 무삼사(武三思)가 위(韋) 황후와 결탁해 권력을 휘두르자, 장중지와 부마도위 왕동교(王同皎)는 분개하며 무삼사를 제거할 모의를 했다. 송지문은 이를 엿듣고 조카를 시켜 무삼사에게 밀고했다. 그 결과 장중지, 왕동교 등은 피살됐고, 송지문은 무삼사에 의해 홍려주부(鴻臚主簿)로 발탁됐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친구를 팔아먹은 송지문의 행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았다. 《신당서(新唐書)》는 “이로 인해 의로운 선비들에게 깊은 비웃음을 샀다”라고 기록했다. 당 현종(玄宗)이 즉위한 후, 소인배 송지문은 유배지 계주(桂州, 지금의 구이린)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신당서》 참조)
3. 정각의 밀고
명나라 영락(永樂) 4년(1406년), 한 무리의 백성이 성대한 제사 활동을 거행했다. 가난한 서생 정각(丁珏)이 이를 보고 양심을 속인 채 “무리를 지어 불궤(不軌, 법에 어긋나는 짓)를 꾀한다”라고 조정에 고발해, 수십 명이 모반죄로 처형당하게 했다. 당시 주체(朱棣, 영락제)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사람이 필요했기에, 정각을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에 임명했다.
정각은 관리가 된 후 본성이 나와 남의 약점 잡기를 좋아하고 달걀에서 뼈를 추려내듯 트집을 잡았으며, 자주 남을 일러바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염치없이 뇌물을 받고 법을 어겼다. 결국 탄핵을 받아 변방으로 군역을 가게 됐다. 주체는 말했다. “짐은 일찍부터 이자가 간사하다고 의심했다. 만약 그가 말하는 대로 다 했다면 조정에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호랑이를 위해 앞잡이 노릇(위호작창·爲虎作倀)을 했던 정각은 자신이 사실 주체가 쓰고 버리는 도구였음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명사(明史)》 참조)
4. 조정의 밀고
남북조 시대 사람 조정(祖珽)은 관리 집안 출신으로 매우 총명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다재다능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작위가 연군공(燕郡公)에 봉해졌으니, 상식대로라면 앞길이 창창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품이 극히 나빠 뇌물을 받고 음란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도둑질을 했다. 한번은 신무제(神武帝) 고환(高歡)이 부하 관리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을 때, 그가 자리에서 금파라(金叵羅, 금으로 만든 술잔)를 훔쳐 상투 속에 숨겼다가 현장에서 발각됐다. 또 공공 물자를 사적으로 빼돌려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은 그를 볼 때마다 도둑이라고 불렀다.
조정에게는 또 하나의 기호가 있었는데 바로 밀고였다. 그는 밀고를 통해 타인을 공격하고 공을 세워 총애를 얻으려 했다. 그의 밀고로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중서시랑 육원규(陸元規)는 갑옷 만드는 공방으로 유배됐고, 낭야왕(琅玡王) 고엄(高儼)이 살해됐으며, 북제(北齊)의 명장 곡률광(斛律光)이 죽임을 당했다. 곡률광의 죽음은 북제의 멸망을 재촉했다.
조정은 관직에 눈이 멀어 수단 부리기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밀고했는데 그 결과는 어땠을까? 그가 여러 차례 밀서를 올리자 효소제(孝昭帝) 고연(高演)은 매우 통한해 하며 중서성과 문하성에 조정의 상소문을 올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이 즉위하기 전 조정은 온갖 방법으로 그에게 아부했다. 고담이 즉위한 후 조정은 재상이 되고 싶어 황문시랑 유척(劉逖)을 시켜 상서령 조언심(趙彦深), 시중 화사개(和士開) 등의 죄상을 조목조목 열거해 비밀리에 상주하게 했다. 그가 밀고한 화사개 등은 무성제 고담의 총신이었기에 조정의 행위는 고담을 격노하게 했다. 고담은 진흙으로 조정의 입을 막고 채찍 200대를 때린 뒤 갑옷 만드는 공방으로 보내 노동하게 했고, 얼마 안 가 또 광주(光州)로 유배 보냈다.
조정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샀다. 광주 별가 장봉례(張奉禮)는 조정 대신들의 의도에 영합해 ‘죄인 조정이 자사(刺史)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이는 위법임)’라고 상주했다. 조정은 “그를 감옥에 가두라”라고 회신했다. 이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지하 감옥을 만들고 조정을 그 안에 가두었는데, 족쇄와 수갑을 한 번도 풀어주지 않았고 가족과 친척의 면회도 금지했다. 밤에는 순무 씨로 만든 양초를 켰는데 조정은 그 연기에 그을려 두 눈이 멀고 말았다.
나중에 조정은 10여 건의 죄상이 드러나 후주(後主) 고위(高緯, 북제 무성제 고담의 아들, 남북조 시기 북제의 제5대 황제)에게 작위를 박탈당했고, 결국 북서주(北徐州)에서 죽었다. (《북제서(北齊書)》 참조)
밀고자의 결말은 왜 좋지 않을까?
첫째, 밀고자를 필요로 하고 이용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밀고자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군자는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만, 밀고자는 귀신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며 인격이 저열하고 명예와 이익을 탐한다. 그가 밀고하는 것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익을 좇는 자는 실로 변덕스러운 소인이어서 왕왕 일을 저질러 스스로 파멸한다.
둘째, 밀고자는 반드시 원한을 맺어 보복을 당하게 된다. 내준신(來俊臣, 측천무후의 공포 정치를 위해 밀고를 장려한 관리), 조정이 바로 그 실례다.
셋째, 밀고는 배신과 배반을 의미하므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여 누구나 이런 사람을 두려워한다. 권모가인 사마의, 고환, 주체, 무측천 같은 사람들도 모두 밀고자를 이용했을 뿐이다. 통치자는 충성심을 필요로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고려해야 하기에 필요할 때는 방법을 써서 밀고자를 처리해 버린다.
중공의 눈과 귀가 되어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다
중국공산당(중공)은 각종 이유를 날조해 사람들을 현혹하여 밀고하게 하면서 동시에 ‘밀고’의 명칭을 바꿔 ‘검거(檢擧)’, ‘적발(揭發)’, ‘신고(擧報)’라고 부른다. 게다가 밀고의 대상과 범위를 가족에게까지 확대해 수많은 부자가 반목하고 부부가 원수가 되게 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수많은 인륜의 참극을 초래했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던 린더우더우(林豆豆)는 1971년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자신의 부친과 오빠를 신고했다. 그 결과 부친 린뱌오(林彪), 모친 예췬(葉群), 오빠 린리궈(林立果)가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 말년의 린더우더우는 고독하고 처량했다.
마찬가지로 문혁 기간인 1970년 2월 13일(음력 1월 8일), 가정 내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팡중머우(方忠謀)는 류사오치(劉少奇) 등의 ‘복권’을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마오쩌둥과 그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그날 밤, 그녀의 남편 장웨성(張月升)과 16세 아들 장훙빙(張紅兵, 중학생, 홍위병)이 그녀의 이른바 ‘반혁명 언행’을 신고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1970년 4월 11일 총살당했다.
40년 후, 60세가 넘은 장훙빙은 국내외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년 시절의 ‘패륜(어머니를 죽게 한 죄)’을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사과했다. 그는 말했다. “그 무슨 허황된 광경, 듣기 좋은 설교, 사람이 만든 우상…… 전부는 남을 우롱하고 자신과 남을 속이는 기만적인 헛소리이며, 청소년과 아동을 중독시키는 정신적 아편이고,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예리한 칼이다! …… 누구든 영원히 밥 먹고 옷 입으며 생로병사하는 자연 법칙을 떠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모성애이고, 가장 숭고한 것은 인성이다!”
최근 몇 년간 중공 정권은 위태로운 상태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공은 또 새로운 수법을 써서 “간첩을 잡아라(抓特務)”, “스파이를 잡아라”, “사교 반대(反邪敎, 중공이야말로 진정한 사교임)”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남을 신고하고 밀고하게 하여 대중이 대중을 투쟁하게 함으로써 통치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일반 백성이 무슨 국가 기밀을 알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국가 기밀을 장악한 사람은 모두 당의 관리들이다. 링지화(令計劃)의 동생 링완청(令完成) 같은 자들은 대량의 국가 기밀을 가지고 출국했다. 그러나 국안(국가안전부), 공안은 그들을 놔두고 오히려 광범위한 민중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한다.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꼭 있다. 인터넷에 정의로운 글을 올리면 즉시 누군가가 협박한다. 파룬궁수련자가 진상을 알리면 때때로 누군가가 신고하여 당신을 ‘사교’, ‘정치를 한다’, ‘애국하지 않는다’라고 신고한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중공의 헛소리다. 사실은 정반대다. 중공은 법정(法定) 사교의 모든 특징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중공은 끝없이 정치 운동을 벌여 중국인을 괴롭혔으며, 중공이 사랑하는 것은 독일의 마르크스, 러시아의 레닌과 스탈린이지 결코 중국 인민을 사랑한 적이 없다.
중국의 현황은 극과 극이다. 한쪽은 중공 당 관료들이 술에 취해 삶을 즐기며 위세를 부리고, 다른 한쪽은 온갖 산업이 침체하고 전답이 황폐해지며 식품에 독이 있고 실업이 급증하여 수많은 젊은이가 결혼과 출산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모든 밀고자여, 스스로 자문해보라. 일단 밀고하면 당신은 악인을 도와 나쁜 짓을 하는 것(조주위학·助紂爲虐)이 아닌가? 당신은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것이 아닌가? 당신도 바로 중공에게 속은 자이고 피해자가 아닌가?
원문발표: 2026년 2월 1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11/50616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2/11/506167.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