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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5)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사부님께서 초기에 법을 전하실 때 지극히 쉽지 않으셨다. 마의 교란도 매우 컸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개최하신 후부터 온갖 난잡한 기공이 모두 쏟아져 나왔는데 기공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들로, 그런 공을 연마하는 사람은 만취한 것처럼 비틀거렸으며 공원에 더욱 많았고 난잡했다. 때론 창춘 승리공원에 가보면 무슨 주권(走圈, 원주 둘레를 열 몇 걸음 폭으로 걷는 팔괘장의 수련법), 무슨 기 채집으로 온통 난장판이었다.

초기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한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내가 아는 사람으로 류펑차이(刘凤才), 자오제민(赵杰民)이라는 사람이다. 초기의 표현은 경건했으나 나중에는 수련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공능을 크게 떠들어댔고, 공능을 추구하는 마음이 극도로 강했으며, 이후에 그들은 누구보다 높다며 자심생마(自心生魔)가 생겨 사부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상 사부님으로부터 필요한 공능을 얻어 금전적인 이득을 보려 했고, 사부님께 물품을 요구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면 곳곳마다 다니며 사부님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함을 했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바르지 않은 사람 마음을 알고 있어서 그들과 접촉을 적게 했으며, 나중에 수련생들로부터 이들이 나쁜 일을 저지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사부님께서 가신 후 나는 좀 막연해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이 진정한 수련인지 깨닫지 못했으며,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내용도 많이 잊어버렸다. 그때는 녹음테이프나 비디오도 없고 책도 없었다. 나는 다시 예전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초에 법을 얻도록 도와준 교원실의 그 동료는 어떤 기공을 매우 잘 연마했다는 또 다른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가보니 그들이 중얼중얼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은 정보어라고 했는데 사실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우주어였다. 나는 단지 그들을 보고 조금 호기심이 갔으나 배우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또 곳곳을 다니다 창춘에 있는 큰 사찰에서 동불상 하나를 모셔왔다. 나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것들을 여태껏 접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절에서 불상을 보니 마음속에 부처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나는 수불(修佛)하고 싶어졌고, 어떻게 해야 닦는 것인지, 어디에 부처님이 계시는지 생각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사부님을 기공사로 알았고, 가장 좋은 분이며 가장 바르고 내가 존경하는 기공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수불하는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그 직장 동료가 이미 불교에 귀의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도 데리고 귀의하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언제 귀의시켜 줄지 물었고, 그녀와 나는 날짜를 정했다. 절로 귀의하러 가는 그날 내가 막 떠나려고 하자 교원실 주임 왕 선생이 찾아와 “리리 씨, 오늘 교원실에서 봄나들이를 갈 거예요, 사진도 찍고. 꼭 참가해야 해요, 지금 바로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일이 있어서 곧 가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안 돼요. 빨리 가야 해요. 당신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그때 ‘이건 수불하지 말라는 것인가, 내가 가려고 할수록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데, 무슨 봄나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참가하지 말고 여전히 절에 가서 귀의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신 것인데, 불이법문(不二法門)이 나를 끌어당겨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흐리멍덩하게 큰 착오를 범했고, 정말로 마음 아픈 굽은 길로 간 것으로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후회하고 괴롭다. 어찌하여 그렇게 우둔하고 판별 능력이 없었을까.

사부님께서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서둘러 사부님을 뵈러 갔다. 당시 여러 대의 택시를 탔는데 마침 나는 사부님과 한 차에 앉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엄숙하셨고, 한마디 말씀도 없으셔서, 나는 나에게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조금 괴로우신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 내가 사부님께 여쭤봤다. “사부님, 무엇이 주이스(主意識), 푸이스(副意識)인가요?” 사부님께서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제야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고, 사부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못마땅해하셨음을 알았다. 사부님의 이런 모습에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했지만 나는 또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몰랐다. 이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사부님께서 초기에 얼마나 어려우셨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악한 구세력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부터 파괴를 멈추지 않았고,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그들의 배치가 있었으며, 모든 일마다 사람마다 배치가 있었다. 그때의 교란과 파괴 형식 역시 법을 얻은 수련생이 대법의 문으로 들어설 수 없게 온갖 수단을 취했고, 당시 청성하지 못한 수련생의 상태와 집착을 이용해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악랄한 한 수를 통해 인연 있는 제자가 법을 얻는 것을 가로막았다. 당시 수련생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엄중한 문제를 겨냥하여 사부님께서는 창춘에서 연속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나도 사부님 설법반에 연속 참가하여 사부님 설법을 열심히 들었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개최할 즈음인 1993년 4월 초, 시댁에서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후두암에 걸려 선양에 수술하러 가야 하니 나에게 돈을 준비해 달라는 소식이 왔다. 남편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 일은 내가 처리해야 했다. 나는 적금해둔 3천 위안(약 51만 원)을 출금해 시어머니께서 병원으로 가실 때 드리려고 했다. 다시 생각을 바꾸어 ‘시어머니께서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처럼의 기회인데 학습반에 참가하면 어머님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오셨고, 내가 수업 중이라 큰 올케와 함께 6층 계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수업을 마치고 뵈러 갔을 때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앉아 울면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지?” 이 뜬금없는 말에 나는 부체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무엇이나 다 모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승리공원에 천목이 열려 부체를 뗄 수 있는 수련생을 찾아갔다. 이 수련생은 시어머니를 보더니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두 마리 족제비인데 하나는 목에 감겨있고 다른 하나는 등에 엎드려 있어요.” 그녀가 이 두 마리를 떼어버리자 족제비 두 마리가 울었고, 이 공간에서 표현은 시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1993년 4월 하순, 사부님께서 지린대학교 강당에서 파룬궁(法輪功)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나는 아들 루루, 시어머니와 함께 학습반에 참가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중에 ‘불이법문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것의 엄숙함을 매우 자세히 말씀하시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내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참답게 사부님 설법을 들었고,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알아들었다. 본래 이것이야말로 수련을 지도하는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니신가?!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인가?!’ 나는 심정이 격동되고 또 부끄러웠다. 나는 귀의증을 버리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이번에야 깨우쳤습니다. 전에 범한 잘못을 이후에는 절대 범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심각한 교훈으로 연공은 전일 해야 하며 반드시 ‘불이법문의 문제’에서 명심해야 한다. 이번 학습반이 끝난 후 나는 사부님께 짧은 심득체험을 드렸다. “사부님 저는 한마음으로 부처를 수련할 것이며 부처로 수련 성취하겠습니다.” 시어머니께서도 이번 학습반에 참가한 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원래는 목소리가 안 나왔었는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또 통증도 사라졌다. 전에는 배가 크고 뚱뚱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나 10일 학습반에 참가한 후 배도 작아지고, 살이 빠졌으며, 가볍게 걸음을 걸을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하셨다.

사부님의 학습반 학비는 가장 저렴했다. 신 수련생은 40위안(약 6800원), 노 수련생은 절반 가격인 20위안이었다. 이런 정황마저 기공계의 일부 기공사의 질투와 불만을 샀고, 자신들의 돈벌이에 영향을 준다며 괴로워했다. 당시 학습반에서 받은 비용에서 일부분은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에 내야 했고, 일부는 창춘 기공협회에 내야 했으며, 장소 대여비용까지 차감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다른 지역에서 학습반을 개최할 때 필요한 자료 비용마저 매우 모자라 책을 만들 돈도 없었다. 나는 더욱 많은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이런 정황의 일부는 나도 경험했고, 일부 실제 정황은 나도 목격했다. 사부님께서 자금이 부족해 책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생겨 나의 심정은 매우 괴로웠고,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내가 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고, 사부님께서 몹시 힘드실 텐데!’ 나는 사부님께서 당시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창춘에 쉬(徐) 씨(후에 창춘 보도소 책임자가 됨) 일가도 1993년에 개최된 이번 학습반에 참가해 법을 얻었다. 이후의 수련에서 그들 집도 내가 자주 가는 곳이 되었다. 이번 학습반에 참가한 후, 나는 또 사부님께서 개최하신 다음의 학습반에도 참가했다. 내가 강당을 나갈 때는 두뇌가 청성해졌고, 오직 확고한 일념만이 있었다. 오늘 이후부터 나는 착실하게 수련하겠다는 그것 외에는 어떠한 염두도 없었다. 사부님께서 연속 학습반을 개최하시는 과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고, 창춘의 많은 공원에 하나 또 하나의 연공장이 건립됐다. 지린대학교 서쪽에 있는 과학기술청사 문 앞에 작은 화원 같은 공터가 있다. 바닥의 인도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돌이 깔렸었고, 옆에는 인공적인 연못에 물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사부님께서 친히 이곳과 주변 환경을 정화해주셨고, 그 후로 우리는 이곳에서 연공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4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5/4216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