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3)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명혜망](전편에 이어) 저는 마지막 공농병 대학생인 76학번이었고, 제 여동생은 다른 농촌에서 저와 동시에 추천받아 하얼빈으로 왔는데 하얼빈 전자공학대학에 다녔습니다. 77학번부터 대학입시제도가 부활하여 남동생이 하얼빈 사범대학 중문과에 합격했습니다. 어쨌든 우리 4남매 중 대학생이 셋이나 나왔고, 부모님은 부담이 더 커지셨지만 얼굴에 광채가 난 듯 기뻐하셨습니다.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 셋을 대학에 보내신 겁니다. 공농병 대학생이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으려면 반드시 ‘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즉, 연수 시험을 치르고 다시 공부해야 계속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헤이룽장대학 동창에게 연락해 베이징으로 연수 갈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되고 머물 곳도 없었습니다. 동창 기숙사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다른 반 철학과 동창 루(陸)를 만났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르고 까무잡잡했는데, 재학 중에 알던 사이로 저보다 1년 먼저 졸업해 이미 헤이룽장대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며 인사하고 자기네 기숙사로 가자고 했습니다. 기숙사에 가니 그는 제가 외지로 배치된 줄 알고 계속 찾았는데 하얼빈에 남아서 정말 기쁘다고 했습니다. 제가 갈 때 창가에서 계속 저를 지켜봤습니다. 이 만남 후 그는 제 대학 동창에게 저와 사귀고 싶다고 했습니다. 동창의 주선으로 우리는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는 이미 결혼 문제에 냉담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란 별거 아니야.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고, 결혼 안 하면 비정상이라 할 테니 대충 짝 닿는 대로 하자. 되고 안 되고는 하늘만 알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공부를 아주 잘하고 향상심이 강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시 제 관념은 인재를 중시했고, 발전 전망과 사업의 미래를 보고 남자를 평가했습니다. 현재의 재산이나 지위, 빈부 격차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사귀기로 한 것은 제게 유리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는 모든 면에서 저보다 조건이 못했지만 저는 제 헌신으로 그의 미래를 성취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물욕이 넘치는 사회에서 이런 결혼관은 매우 고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돈과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자는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저는 반대로 제 피땀을 섞어야 견고한 결혼 기초를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이성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그는 수줍음으로 오해했고, 그는 더욱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제가 교제를 허락한 것에 도취되어 아이처럼 침대에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사랑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습니다. 교제하는 동안 그는 제게 두꺼운 연애편지를 썼는데, 수많은 시와 찬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조금만 꾸미면 천사처럼 아름다울 거야”라고 묘사했습니다. 사실 졸업 전부터 그는 의도적으로 저에게 접근하고 구애했지만 저는 몰랐던 겁니다. 이제 꿈을 이뤘고 학과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찾았다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를 제게 다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사랑에 저도 감동했습니다. ‘나처럼 몸도 안 좋은 사람을 누군가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해 주다니 그 마음이 기특하네. 내가 뭐 그리 대단한가?’ 점차 냉담했던 마음에 온기가 돌며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성격에는 굳세고 강인한 면이 주를 이루지만, 동시에 깊이 숨겨진, 잘 감지되지 않는 취약한 면, 바로 사람에 대한 의존심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았고 몸이 안 좋아 힘에 부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의지할 곳, 저를 도와줄 강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아버지가 제 마음의 난제를 해결해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함양(涵養)이 있으며 말씀에 무게가 있고 견해가 있으셨으니까요. 하지만 하향 생활부터 대학까지 접한 환경, 사람, 일들은 아버지가 모르시는 것이었고, 환경 변화에 따라 계속 생겨나는 수많은 의문을 아버지도 해결해주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루와의 만남은 저의 이런 약점을 강화했습니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듯 루가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 여겼고 앞으로 그에게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저의 전부이자 희망인 것 같았고, 제가 이루지 못한 것을 그가 다 해결해줄 것 같았습니다.

루와 얼마간 사귀면서 서로를 알게 됐는데, 그는 사람은 강직하지만 성격이 너무 괴팍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성질을 부리며 크게 싸웠습니다. 저는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그토록 끈질기게 구애하던 그 사람인가?’ 처음으로 충격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성격 차이가 너무 크다. 지금 연애할 때도 감당이 안 되는데 나중엔 어쩌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좀 두려웠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중에 고생하느니 지금 단호하게 끊는 게 낫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헤어지자고 했더니 그는 결사반대했고 어쩔 수 없이 계속 만났습니다. 이 문제로 끝도 없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이대로 가자, 운명에 맡기자.’ 그는 제가 떠날까 봐 제 부모님을 뵙지도 않고 강제로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신고 후 부모님을 뵈러 갔는데, 부모님은 일 처리에 불만이 있으셨지만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이해하시기에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이것저것 사서 예비 사위를 대접하셨습니다.

1981년 우리는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곧 임신했습니다. 몇 달 동안 집이 없어 그의 직장 자료실 책상 위에서 살았습니다. 낮에는 이불을 숨겨두고 밤에 꺼냈습니다. 입덧이 심해 결국 출근을 못 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기숙사 동창을 초대해 밥을 먹기로 했는데, 석유 풍로에 남은 소금에 절인 달걀을 삶고 간단한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꽤 괜찮은 대접이었습니다. 식사 중에 그가 친구에게 준 달걀이 상한 것을 발견하고, 저는 루에게 자기 것인 좋은 달걀과 친구 것을 바꾸라고 눈짓했습니다. 루가 움직이지 않아 제가 차마 볼 수 없어 제 달걀을 그 친구에게 줬습니다. 친구가 간 후 그는 제게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자료실에 돌아와 자려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그가 갑자기 달려들어 ‘짝짝’ 하며 제 뺨을 좌우로 때리고 저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때 저는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폭력에 깜짝 놀라 서럽게 울었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고 억울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키우면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셨는데, 임신 중이고 집도 없고 입덧도 심한 상황에서 저를 이렇게 대하다니요. 고통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없어 더는 걱정 끼쳐드리지 못했고, 동창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고 다 제가 자초한 일, 사람을 잘못 본 탓이니까요. 저는 그의 질투심이 아주 강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울어도 날은 새고 삶은 계속됐습니다. 1982년 작은 방을 배정받았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이는 제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고 과거의 근심을 잊게 했습니다. 아이의 아명은 ‘루루(陸路)’라 했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본명은 ‘루이판(陸一凡)’이었는데, 이 아이가 가야 할 길이 분명히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는 토실토실하고 아주 귀여웠습니다. 낮에는 늘 저만 찾고 누구에게도 안기려 하지 않았으며 아빠도 거부했습니다. 잘 때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손이나 얼굴을 만져야 안심하고 잤습니다. 루는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매일 의자에 앉아 공부했습니다. 밤새우고 명절도 없이 영어를 독학하고 법학 과목을 공부하는 등 끈기가 대단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고 출근해 강의했는데, 직장이 멀어 버스를 타야 했고 집에 와서 밥 짓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이 기간에도 우리 사이의 갈등은 계속 커졌습니다. 그의 나쁜 성격은 참기 힘들었고, 저와 싸울 뿐만 아니라 제 가족인 동생들, 심지어 어머니까지 용납하지 않고 어머니와 싸웠습니다. 어머니가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하얼빈에 와서 저와 손자를 보러 오셨다가, 그에게 기가 막혀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이란 참을성에 한계가 있는 법, 그가 우리 가족에게 상처 주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그냥 나가버리려 했습니다. ‘안 살아, 다 필요 없어, 갈 거야.’ 그때 루루가 갑자기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저를 보고 울었습니다. 그때 아이의 눈빛이 변한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눈빛이 아니라 갈망, 간청, 엄격함이 담긴 눈빛이었고, 저는 자석에 끌리듯 멈췄습니다. 눈물을 멈추고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아이가 저를 떠나지 못하게, 가지 못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를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저 어린아이를 부모와 생이별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닦고 더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루는 우수한 성적으로 창춘(長春) 지린(吉林)대학 법대 헌법학 대학원 연구생반에 합격했습니다. 그가 창춘으로 공부하러 가고 저는 아이와 하얼빈에 남아 있으면서 헤이룽장대에서 연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학교가 집과 가까워 아이 보기도 좋았습니다. 이듬해 저는 또 헤이룽장대 철학과 조교 연수반에 합격했습니다. 1986년 루는 졸업 후 지린대학 법대 교수로 남게 됐고, 저도 1987년 2월 지린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부 교수로 전근 갔으며, 아이도 지린대학 유치원에 보내면서 가정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배정받았고 컬러 TV도 샀으며 돈도 좀 생겨 덜 힘든 것 같았습니다.

창춘은 아름다운 중소도시입니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화려함을 따지지 않으며, 도시는 정돈되고 깨끗하고 녹음이 우거졌습니다. 이곳에는 국가교육위원회급 전국 중점 대학인 지린대학, 동북사범대학, 지린공업대학 등 여러 대학과 각종 연구기관, 유명한 창춘영화제작소, 위황궁(僞皇宮), 제1자동차제조공장 등이 있어 문화도시라 불릴 만합니다. 지린대학은 시내 중심인 차오양(朝陽)구에 있는데, 도로 양옆이 모두 강의동과 기숙사라 전형적인 도로변 대학이라 불렸습니다. 나중에 지린대학은 교외에 큰 규모의 신캠퍼스를 지어 구캠퍼스와 대응해 남북 캠퍼스라 불렀습니다.

제가 속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학부에는 4개 연구실이 있었고 약 5~60명이 근무했습니다. 철학 연구실은 11~12명으로 전교생의 철학, 마르크스주의 원리 공통 과목을 담당해 업무량이 많았습니다. 지린대학은 과연 전국 중점 대학답게 학풍이 바르고 교수의 교육 연구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으며, 교육 보조 업무가 질서 정연했고 완전한 교육 규칙이 있었습니다. 연구실 선생님들도 다 좋아서 지저분한 일 없이 다들 업무에 마음을 썼고 동료 간 사이도 좋았습니다. 지린대학에 온 후 저는 별천지에 온 것 같았습니다. 정보가 원활하고 각종 강연과 보고회가 자주 열렸으며 책도 많았습니다. 지린대학 강당에서는 행사, 영화, 기공, 보고회, 무도회 등이 아주 많았습니다. 제 몸은 여전히 안 좋아 잔병이 끊이지 않았고 온종일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루는 “당신 몸의 부품은 억지로 맞춰놓은 것 같아. 위아래 성한 데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위아래 안 아픈 곳이 없었고 어디든 문제가 있어 자주 지린대학 병원에서 약을 타다 응급조치했습니다.

연구실에 저보다 연배가 높은 여교수가 있었는데 병이 많아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다녀도 소용없자 기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도 그녀의 영향으로 기공을 연구하기 시작해 잡지, 신문을 많이 구독하고 기공 학습반에도 참여했으며 꽤 열심히 연마했습니다. 기공 속에서 오랫동안 알 수 없었던 답을 찾으려 했고, 그 많은 매듭을 이론적으로 찾으려 인체 과학 서적을 보고 몸소 실천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소위 기공사란 사람들은 보자마자 눈에 거슬려 본능적으로 배척했습니다. 속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대사(大師)라 칭하는데 누구 하나 그럴싸하지 않네. 나보다도 못한데 어떻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기공을 연구하고 연마하며 많이 보다 보니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기공들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심병(心病)을 고치지 못하면 신체 병도 낫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공에서 출로를 찾지 못하자 매우 실망해 홧김에 다 포기했습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연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 의미 없고 시간 낭비일 뿐이며, 몸은 낫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루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습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고 중시했습니다. 돈과 지위가 없을 때는 괴로워하더니, 생기니 또 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돈이 좀 생기자 친구들을 사귀며 먹고 마시고, 술 마시고 춤추는 등 사회의 나쁜 습관에 물들었습니다. 자주 술에 취해 저와 싸웠고 제가 하는 일마다 눈에 거슬려 했습니다. 1990년 그는 다시 박사 시험을 준비해 1991년 우한(武漢)대학 법학원에서 헌법학과 행정법학 박사 과정을 밟게 됐고, 저 혼자 아이와 창춘에 남았습니다. 아들 루루는 아빠를 닮았지만 성격은 저를 쏙 빼닮아 우리는 마음이 통했습니다. 아이는 저를 이해하고 늘 제 편이었으며,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녔고 아이도 늘 제 손을 잡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사람이 없을 때는 어릴 때처럼 제 귀를 만지곤 했습니다.

루가 우한대학으로 공부하러 간 후 저는 집에서 혼자 냉정하게 많은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와 함께한 세월 동안 상심이 낙담으로, 낙담이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그에게 걸었던 유일한 한 가닥 희망마저 다 깨졌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저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돈을 싫어하는데 그는 좋아하고,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데 그는 떠들고 시끄럽고 싸우길 좋아했습니다. 이런 불협화음, 수없는 부부싸움, 게다가 육체적 고통까지 겹쳐 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 같았습니다. 고뇌와 절망,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어 자주 거리에서 혼자 오락가락하며 제가 어디 있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무슨 명절인지도 잊었습니다. 망망대해 같은 인파 속에 왜 나 하나 용납될 곳이 없을까? 죽음까지 생각했습니다. ‘죽는 게 제일 낫다, 죽으면 끝이니 모든 게 해탈되고 고통도 없을 거야.’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속이 좁아? 부모님이 온갖 고생 하며 키워주셨는데 내가 죽으면 아버지, 동생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데. 내 괴로움은 상관없지만 남에게 상처 입힐 순 없어.’

그런 생각을 접은 후,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전되듯 마음에 힘이 생겨 자문했습니다. ‘너는 왜 남편과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니? 아! 알겠다. 정신적으로 그에게 너무 의존했어. 그를 나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 했어. 그게 안 되니 당연히 괴롭지. 이것도 이기심 때문이야. 사실 그런 예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일 뿐이야.’ 저는 심각한 삶의 고난 속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자. 모든 건 나 스스로 하자!’(계속)

 

원문발표: 2021년 3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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