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명혜망](전편에 이어) 집안 형편은 줄곧 어려웠고 가족 구성원 모두 불행한 환경 속에서 애태웠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강인하셨고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셨는데, 특히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는 조금만 몸이 좋아지면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莫愁)’라는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때면 우리집은 즐거움으로 가득 찼고 모든 번뇌를 잊었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선량하셨고 고통을 잘 참으셨으며, 낙관적이고 명랑하고 남을 돕기 좋아하셨습니다. 사람됨을 특별히 중시하셨고, 차라리 자신이 고생할지언정 남이 가난한 것은 보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셨습니다. 사람됨과 대인 관계 문제에서 우리에게 매우 엄격하셨는데, 부모님의 여러 언행과 가르침은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가지 일이 기억납니다. 문화대혁명 중 군 간부가 지역 행정관서에 들어와 당시 행정관서의 중요 전문인원이 됐는데, 문혁이 끝난 후 그 군 간부가 숙청당하게 되어 많은 죄상이 날조됐습니다. 아버지는 그 군 간부를 보호하려다 연루되어 직위 조정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 군 간부가 중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묘안을 내주며, 아버지가 모든 일을 군 간부에게 떠넘기기만 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아버지는 무사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는 무슨 일이든 죽은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다 덮어쓸지언정 그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원래 지역 기관 당위원회 부서기에서 하급 방역소로 좌천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지의 강직한 인품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중화민족의 전통 미덕이 그분들에게서 충분히 체현됐고, 소양, 도덕, 사람됨에서 제게 좋은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곤경이 겹겹이 쌓인 가정환경 속에서도 저는 부모님의 좋은 교육과 훈도를 받아 제 인생 후반의 길을 닦는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제가 몸이 약해 부모님은 저를 도시에 남게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가서 바깥세상을 보고 싶었고 부딪쳐보고 싶었으며 안일하게 도시에 남기 싫었습니다. 부모님을 설득한 후 상산하향(上山下鄕: 지식청년을 농촌으로 보내는 운동)의 호소에 따라 쑤이화 신화(新華)공사 5·1대대에 배치됐고, 나중에 쑤이링(綏陵) 산 아래 ‘5·7 간부학교’ 청년거점으로 옮겼습니다. 농촌 생활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김매기, 밀 베기 등 온갖 일을 다 했고 저도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뒤처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일을 잘해서 초등학교 교사로 차출됐습니다. 꼬박 3년 동안 농촌의 다양한 환경에서 단련하며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출납원, 선전원, 초대소 주방 보조, 교사를 거쳐 나중에 칭안(慶安) 제철소 노무과로 차출됐습니다. 몸은 농촌에 있어도 마음속에는 항상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고, 제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대학 입학은 추천제였고 시험이 없었습니다. 제가 청년거점에서 일을 뛰어나게 잘했기에 청년거점과 현지 ‘5·7 간부학교’ 간부들의 집단 추천을 받았고, 제 득표수가 1위여서 대학 입학 추천을 받아 헤이룽장대학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공농병(工農兵) 대학생 중 많은 학생이 각 기관의 추천으로 들어왔기에 나이도 많고 사회 경력이 깊었으며, 사회 물이 많이 들고 사상도 비교적 복잡했습니다. 그에 비해 하향 지식청년 출신 학생들은 사상이 단순한 편이었습니다. 입학 첫해에는 학습 의욕이 넘쳐 기말 성적이 모두 우수했습니다. 대학 공부는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 지식으로 시야를 넓혀주었고,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다각도로 문제를 보는 능력을 키워주었습니다. 저는 독학을 즐겼고 강의 내용이나 복습 문제에 얽매이기 싫어했으며,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제가 연구하고 싶은 문제를 생각하거나 썼습니다. 비록 시험에서 60점을 받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표면적인 학습은 이런 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심층적인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사람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우주의 본원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느낄까?’ 수많은 질문과 의혹이 저를 감쌌습니다. 대학은 지식을 배우러 갔다기보다, 지식 습득을 통해 오히려 과거부터 계속 탐구해왔지만 알 수 없었던 문제들을 더 깊이 파고들게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답이 없어 괴로웠지만 저는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天外有天人外有人)’는 말을 믿었고, 이것이 당시 수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위안이 되어 장차 누군가 제가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대학 생활도 힘들었습니다. 몸이 갈수록 안 좋아져 수업을 듣기도 힘들었고 온종일 병원을 다녔습니다. 의사는 제게 폐결핵, 신경쇠약, 내분비 장애라고 진단했고, 원래 앓던 병들은 없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새로운 병이 추가됐습니다. 수업을 끝까지 듣지 못할 때가 많았고, 때로는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해 매우 비관적이고 괴로웠습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버텨나갈까?’ 그럴 때면 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남들은 자유롭고 편하게 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까?’ 게다가 이 고통은 늘 저를 따라다니며 떨쳐버릴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었으며, 하고 싶은 모든 일이 힘에 부쳐 정말 ‘마음은 하늘보다 높은데 운명은 종이보다 얇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의사가 폐결핵이라 진단하고 일주일 후 다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폐결핵이 석회화됐네요. 아주 잘 석회화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언제 석회화됐냐고 물으니 아주 오래됐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모순되지 않나요? 방금 폐결핵 진단을 받았는데 일주일 만에 이미 오래전에 석회화됐다니, 그럼 도대체 언제 걸렸고 언제 나은 걸까요? 도대체 병이 있기는 했던 걸까요?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과거 제게 붙여진 그 많은 병명을 병원 스스로 뒤집었고, 저는 확실히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데 제 몸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때부터 병원을 의심하게 됐고, 그들이 저를 제대로 진찰하지 못하며 제멋대로 병명을 붙였다 뗐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시달리니 정말 지긋지긋했고 병원도 별거 아니며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농병 대학 학제는 3년이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1년 더 하라고 해도 못 했을 겁니다. 제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으니까요.
남자는 성장하면 장가들고 여자는 성장하면 시집가야 하듯, 나이가 들고 졸업이 다가오면서 남자친구를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반 친구 하나가 저를 좋아했지만 제 몸 상태를 보고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내겐 너를 건강하게 해줄 능력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소개로 한 선배를 알게 됐는데, 그는 이미 제 고향 당교(黨校)에 배치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만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고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 몸이 안 좋아서 부모님이 반대하셔. 나는 형수처럼 널 죽게 할 수 없어.” 그의 형수는 젊은 나이에 병사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예의 없고 상처 주는 편지를 보고 몹시 상심했고, 이 편지를 집에 보냈더니 부모님도 보시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결혼 문제에서의 온갖 불운과 마음의 상처로 저는 남자친구 찾는 생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3년의 학습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제 노력과 인품은 학우들에게 호평받았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 학우가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이었습니다. “마음씨가 착하고 의지가 강하며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좀 겁이 많네.” 그의 평가는 좀 모순된 것 같았지만, 제 내면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약점은 맞았습니다. 저는 겁이 많아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은 싫어하고 그저 묵묵히 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졸업 후 배치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치치하얼(齊齊哈爾) 사범대학 교수로 배정됐다가 나중에 하얼빈 우편전신전문학교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청탁으로 들어온 동창에게 제 자리를 빼앗기고 저는 헤이룽장성 인사청으로 밀려났고, 인사청은 결국 저를 하얼빈 체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실 철학 교수로 배정했습니다. 체육대학은 막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학교라 전공 교수들은 모두 체육대학 출신이거나 대학에 남은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대학 인사처에 신고하러 갔을 때 인사처장은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는데, 저를 한참 훑어보더니 매우 불쾌하게 말했습니다. “새로 졸업하고 배치받은 사람인가?” 제가 “네!”라고 하자, 그녀는 “나는 못 들었는데? 자네 몸은 체육대학에서 일하기 적합하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省) 인사청에서 배정받아 왔으니 전화로 확인해 보세요. 저는 강의하러 온 거지 체육 하러 온 게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걸어 인사청에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불쾌한 듯 저를 곤란하게 하며 “학교에 머물 곳이 없으니 스스로 해결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좋습니다. 제가 해결하죠”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가 추천한 사람이 오지 못하고 성 인사청에서 저를 보냈으니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정식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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