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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2)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집안 형편은 늘 몹시 어려웠고, 모든 식구가 불행한 환경에 시달렸다. 우리 부모님은 강인한 사람들로, 좌절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노래를 부르려 했으며, 특히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는 병이 조금만 호전돼도 우리에게 ‘모처우(莫愁)’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럴 때면 우리 집은 즐거움으로 가득했으며, 모든 번뇌를 잊을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로, 고통을 참을 줄 알았고 낙관적이고 명랑했으며, 다른 사람을 도우려 했다. 사람의 도리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본 것은 차라리 자신이 고생할지언정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 됨됨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문제에서는 우리에게 대단히 엄격히 요구했고, 그분들의 모범적인 언행은 내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 가지 일이 기억난다. 문화혁명 중에 한 장교가 지역 관공서에 와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관공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비판을 받은 다른 장교가 그에게 죄를 많이 뒤집어씌웠다. 우리 아버지는 그 장교를 보호하다 업무상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 장교가 중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다른 사람이 우리 아버지에게 제안하기를, 모든 것을 그 장교에게 미루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모든 일을 죽은 사람에게 미룰 수는 없다며, 차라리 자신이 모든 것을 끌어안을지언정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지역기관 당 위원회 부서기 직에서 말단 방역소로 전근되었다. 당시 나는 강직하며 아첨하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중화민족의 전통 미덕은 그분들에게서 충분히 체현되었고, 수양에서부터 도덕, 사람 됨됨이가 모두 내게 아주 좋은 깨우침을 주었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나는 오히려 그분들의 좋은 가르침을 받으며 내 인생 깊숙한 곳의 기초를 닦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거취 문제에 직면했다. 내 몸이 불편했으므로 아버지는 내가 도시에 남아서 일하기를 바랐다. 나는 외부 세계에 나가서 한번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안일하게 도시에 남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설득한 후, 한창 선전하고 있던, 지방에서 노동하며 사상성을 높이는 길로 들어섰다. 나는 쑤이화신화(綏化新華) 인민공사 51대대로 들어갔으며, 나중에 쑤이링산(綏陵山) 아래의 ‘57간부학교’ 청년 거주지로 이동했다. 농촌은 정말 고생스러웠다. 땅을 파고 밀을 베는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나도 고생을 감당할 수 있었고,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을 잘했기에 한 초등학교 교사로 뽑혀 나갔다. 나는 꼬박 3년 동안 농촌의 온갖 환경에서 단련되어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출납에서부터 선전원, 숙박시설 요리사, 교사를 했고, 나중에는 또 칭안(慶安)강철공장 노사과로 차출되었다. 비록 몸은 농촌에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계속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에 가려면 추천을 받아야 했고, 시험을 쳐서 대학에 가는 형식이 없었다. 내가 청년 거주지에서 두각을 나타냈기에 청년 거주지와 현지 ‘57간부학교’에서 단체 추천을 할 때 내가 받은 표가 가장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학에 갈 기회를 얻어 헤이룽장대학 철학과에서 철학을 배웠다. 공농병(工農兵, 노동자·농민·군인) 대학생 중에서 많은 학생은 각 직장의 추천을 받아서 온 사람이었으며, 나이도 아주 많았다. 그들은 사회 경험이 아주 풍부했고, 사회적인 요소가 아주 많았으며, 사상도 비교적 복잡했다. 서로 비교해보면 시골 지식 청년의 사상이 그래도 좀 단순했다. 입학한 해에 아주 열심히 공부한 결과 기말 학습 성적이 우수했다. 대학교 공부를 한 가지 측면에서 말하자면, 현대화된 과학지식은 효과적으로 나의 시야를 넓히고, 견문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변증법적인 사유 방식은 내가 문제를 여러모로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게 했다. 나는 자습을 비교적 잘했고, 강의 내용과 복습 과제의 제약을 받고 싶지 않았다. 늘 자유분방한 생각을 하거나, 내가 연구하고 싶은 문제를 적었고, 설령 시험을 치는 데 60분이 소요되어도 개의치 않았다. 겉으로는 내가 그런 형식으로 공부했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한 심층의 생각이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사람은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우주의 본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세계는 대체로 같은 것인가? 나는 왜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이런 곤란을 느껴야 할까?’ 많고 많은 문제와 당혹감이 나를 에워쌌다. 대학에 와서 지식을 배우기보다는 지식을 배움으로써 거꾸로 내가 과거에 줄곧 밝혀내지 못한 문제를 더 깊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온갖 생각으로 답도 없이 고뇌했지만, 나는 ‘하늘 밖에 하늘 있고, 사람 밖에 사람 있다(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뜻)’라는 말을 믿었다. 나는 당시 많고 많은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장래에 어떤 사람이 나를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라며 이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대학 생활도 몹시 힘들어 갈수록 몸이 나빠졌다. 가끔은 수업도 버틸 수 없어 온종일 병원에 있어야 했다. 의사는 또 내게 폐결핵, 신경쇠약, 내분비 교란 등의 진단을 내렸고, 원래 있던 병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병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은 늘 끝까지 견지할 수 없었고, 가끔은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몸으로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큰 절망과 고뇌에 빠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다른 사람은 자유자재로 사는데, 나는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라고 물었다. 더구나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끝날 기미가 없고 하고 싶은 것들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꿈은 하늘보다 높지만, 팔자는 종잇장보다 얇은’ 것을 느꼈다. 의사에게서 폐결핵 진단을 받고 일주일 후에 다시 가서 검사를 받으니 의사는 “폐결핵이 굳어졌는데, 아주 심하네요.”라고 했다. 내가 언제 굳어졌는지 묻자 그는 이미 아주 오래되었다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고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단 일주일 만에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니 나는 도대체 언제 폐결핵에 걸렸을까? 그나마 언제 좋아질까? 도대체 병이 있는지 없는지? 이것은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이전에 내게 나열해준 병들을 회상해보니 병원에서 스스로 모두 번복했고, 나 자신은 분명히 아파서 일어나지를 못했으니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그때부터 나는 병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마음대로 내게 모자를 씌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라면 쓰고 벗으라면 벗기를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반복했으니 정말 답답했다. 병원도 그런 것에 불과했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앞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병원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공농병 대학의 학제가 3년이었으므로 다행히 1년을 더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내 몸이 이미 극한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남자가 크면 장가가고, 여자가 크면 시집가는데, 점점 나이를 먹고 졸업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그곳에 이성 친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급생 중에 한 사람이 나를 좋아했지만, 내 몸이 이런 것을 보고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내게 “나한테는 사실 너를 건강하게 해 줄 능력이 없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소개로 상급생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우리 고향 지역의 당교(黨校)에 배치되었다. 그를 접촉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는 고향에서 내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 몸이 좋지 않다고 우리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 형수님처럼 저세상으로 가면 안 되겠죠.” 그의 형수는 많지 않은 나이에 병사했다. 나는 예의 없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편지를 보며 크게 상심했고, 그 편지를 우리 집으로 부쳤다. 편지를 본 부모님은 괴로워했다. 혼인 문제의 각종 장애와 정신적 자극으로 나는 이성 친구를 찾겠다는 생각부터 내려놓았다. 3년간의 학습 생활이 곧 끝나게 되었고, 나는 학습 노력과 사람 됨됨이로 동창들의 호평을 받았다.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한 동창이 내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내게 “심지가 선량하고 의지가 굳세며,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조금 소심한 거지.”라고 했다. 그의 평가에 마치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의 평가가 나의 내면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한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마지막의 약점은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담이 작고, 나서는 일을 싫어했으며, 혼자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다.

나는 졸업하고 직장 배치를 받았다. 처음에는 치치하얼 사범대학 교수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하얼빈 체신전문대 교수로 배치되었고, 뒷거래한 동창에게 자리를 빼앗긴 후에는 헤이룽장성 인사청(人事廳)으로 밀려났다. 인사청은 마지막으로 나를 하얼빈 체육대학 마르크스 레닌 연구실 철학 교수로 배치했다. 체육대학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로, 전공 교수가 모두 큰 체육대학을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대학생이었다. 내가 대학 인사처에 도착 보고를 할 때, 인사처장은 할머니였다. 그녀는 나를 한참 동안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새로 졸업해서 배치된 거야?”라고 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나는 왜 듣지 못했을까? 신체가 체육대학 업무에 적합하지 않은데.”라고 했다. 나는 “저는 성(省) 인사청에서 배치받았습니다. 전화해서 물어보셔도 됩니다. 저는 강의하러 온 것이지 체육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 인사청에 전화해서 나를 보냈는지 물었다. 그녀는 다시 불쾌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학교에는 지낼 곳이 없으니까 지낼 곳을 스스로 찾아.”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해결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당시 그녀가 소개한 사람이 오지 않고 내가 배치되어 기분이 나빴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공식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3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1/3/15/4216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