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명간(明簡)
[명혜망] (이전 글에 이어) 한당(漢唐) 유학에서 예악(禮樂)의 역할에 관한 이상의 이론은 인성학설을 기초로 성정(性情) 등 고대 범주를 표현 방식으로 삼은 것이다. 사실 이는 보편적인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당 유학의 이론이 중화 상고시대의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다(以人爲本)’는 입장을 고스란히 계승한 부분이다. 단지 중화 상고시대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현대 문화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다를 뿐이다.
상고시대 중화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는 한당 시기에 획수가 고정된 한자 ‘인(人)’에 반영돼 있는데, “위에서부터 필획을 시작해 한 삐침(丿)을 긋고 중간에 한 파임(㇏)을 잇는다”이다. 다시 말해 “시작하는 곳에서는 음양을 구분하지 않다가 아래 끝에 이르면 왼쪽은 양, 오른쪽은 음으로 나뉜다. 시작하는 곳과 왼쪽 양은 한 획으로 통한다. 오른쪽 음은 중간에서 생겨나 부수적으로 이어지지만 빠져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인(人) 자가 되지 않는다.”
이 글자 모양의 함의가 표현하는 생명의 실상은 바로 “천명(天命)을 일컬어 성(性)이라 함은 곧 생명의 근원(이는 시작하는 곳과 왼쪽 양이 됨)이며, 사람의 몸을 얻은 이후에는 표면적인 생명 요소(곧 오른쪽 음)와 하나로 합쳐진다”라는 것이다. 상고시대 중화문화의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사람 생명의 본원을 근본으로 삼고 음양이 합쳐진 생명 전체를 기초로 삼으며, 하늘로 돌아가고 회귀하는 것을 가치 지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당 유학은 실질적으로 이러한 가치 지향을 온전히 계승했다.
4. 송대 이후 중화문화는 끊임없이 파괴됐고 이로 인해 전통에서 이탈하게 돼
한당 시절의 지식인들은 대개 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자주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를 드나들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이러함에 아무런 부당함을 느끼지 않았다. 유(儒), 도(道), 불(佛) 세 가문은 중국인의 사상적 틀을 구성하며 서로 포용하고 지탱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유가 학문에 따라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바쁜 사업에 종사할 수도 있었고, 불도(佛道)의 계시 속에서 생명이 영원함으로 나아가는 빛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가의 입세(入世)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도의 출세(出世)로서 양쪽 모두 채택할 수 있었고 모순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송대(宋代) 이후 발생한 송명(宋明) 이학(理學)에서 하나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졌다. 사실 송명 이학이 발생한 주요 원인은 일부 유학자들이 유학을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위(漢魏) 이후 도교와 불교가 크게 흥하고 현묘함을 말하며 도를 논하는 것이 유행이 된 반면 유학은 비교적 몰락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송명 이학은 불도를 배척하는 입장으로 나타났다. 불도를 배척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 송명 시기의 많은 이학자는 각자 우주 생성, 심물(心物) 본체에 관한 이론들을 내놓았는데, 이들은 불교와 도가의 상응하는 부분을 대체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유생(儒生)들이 불경이나 도경을 배우지 않아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본적인 해답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송명 이학자’는 사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수많은 학자를 포함하는데, 모두 매우 명확하게 중화 문명에 큰 공헌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불도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입장은 실질적으로 중화문화가 유, 도, 불 세 가문이 공동으로 구성하고 서로 지탱하던 틀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반드시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만약 유학 한 가문만 있다면 그것은 중국 문화의 원래 틀과 가치 체계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 문화는 황제(黃帝) 시기에 이미 회천(回天, 하늘로 돌아감)을 지향하는 가치 체계를 구축했다. 후대에 갈라져 나온 유가는 비록 치세의 이 범위만 담당했을지라도 유도(儒道)가 상호 보완하고 유, 도, 불이 서로 빛을 발하는 문화 구조 체계는, 유가가 자신의 이론 속에서 상고시대에 세워진 회천의 가치 체계에 호응할 수 있게 했다. 유, 도, 불을 겸수한 지식인은 이러한 호응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유학 한 가문만 있다면 필연적으로 사상을 치세의 범위로 국한할 수밖에 없고 회천의 가치 체계와 호응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유학 단독의 사상적 틀 안에는 ‘회천’이라는 일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송대 이후 사람들은 한당 시절에 전해지던 오경(五經)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예를 들어 남조(南朝)의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천자문(千字文)’ 중에는 ‘음악은 귀천을 달리하고 예는 존비를 구별한다(樂殊貴賤 禮別尊卑)’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예기(禮記)’ 등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세워진 것이다. 당조(唐朝) 이전 사람들이 보기에 예악은 사람의 성정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귀천을 달리하고 존비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성정을 조절하는 것 중의 일부였다.
사람에게는 육도윤회(六道輪迴)가 있어 전생의 선악이 이생의 귀천과 존비를 결정하며, 예악 역시 이러한 결과와 상응해야 한다. 게다가 회천이야말로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이상이자 치세가 호응해야 할 방향이기에, 예악은 존귀한 자, 비천한 자, 귀한 자, 천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성정을 조절해 그들이 회귀, 조화, 균형, 향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당대(唐代) 이전 사람들의 인식 방식이었다.
그러나 송대 이후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송명 이학 속에 국한하고 불도를 완전히 이단으로 여겨 배척한다면 ‘회천’이라는 사상 방식은 없어진다. 따라서 그가 이해하는 ‘음악은 귀천을 달리하고 예는 존비를 구별한다’는 곧 ‘예악 제도의 목적은 바로 존비와 귀천을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학의 경전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단지 송명 유학이 불도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해 큰 국한성을 지니게 됐고, 게다가 송명 이학이 송대에서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 문화의 주류 사상이었기에 사람들이 유학 경전을 이해하는 데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논리를 스스로 설명하기 어려워지자, 개별 이학자들은 유학의 원시 경전에 대해서도 몇 가지 공개적인 수정을 가했다.
중화문화를 파괴한 요인은 사실 송명 이학의 국한성에만 있지 않다. 상고시대 이래로, 현재 기록에 따르면 춘추(春秋) 시대 이래로, 신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중국인에게 예언과 참위(讖緯)의 정확성을 보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역사는 사실 신, 즉 하늘이 안배한 것이다’라는 진상도 알게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반대로 참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고 어떤 이는 예언을 위조했으며 어떤 이는 함부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송태조(宋太祖)가 참위 금지령을 내리게 됐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송대 이후 사람들은 신에 대한 경의가 갈수록 순수하지 못하고 희박해졌으며 점차 제도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게 됐다.
제도와 정신은 인류 사회가 균형을 유지하는 두 가지 요소로 모두 없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선함만으로는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고, 법만으로는 스스로 실행되기에 부족하다(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足以自行)’라는 것이 바로 이 이치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갈수록 믿지 않고 갈수록 감히 믿지 못하게 될 때면 사람들의 양심과 정신에 의존해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송태조가 술 한 잔으로 병권을 회수한 일(杯酒釋兵權)이나 송대가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억누르는 국가 체제를 세운 것이 어찌 이로 인해 국가 군사력이 쇠약해질 줄 몰라서였겠는가? 그들은 당연히 알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사회 문화에도 일종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유학을 주체로 한 사회 문화는 당시에는 바로 송명 유학으로서 당대의 제도에 ‘합리성’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송명 이후의 유가 문화는 역사상 본래의 ‘회천’이라는 가치 체계를 잊어버리고 그 대신 ‘존비와 귀천을 구분’하는 체계로 대체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말하는 정치다. 유학은 이러한 정치, 계층 차이의 합리성을 위한 근거와 완충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특히 송명 이후 사람들은 중화문화가 정치를 중심으로 봉사하는 것 같다고 점점 더 느끼게 됐다.
이것은 중화문화가 원래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당대 이전에 중화문화는 비록 정치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문화 자체는 회천을 가치 지향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치 지향의 부분들은 송명 이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보이지 않게 됐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송명 이후 중화문화는 확실히 정치 중심의 요소를 점점 더 많이 갖추게 됐고 더욱 심각해졌다. 이것 역시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정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송원명청(宋元明淸) 시기의 지식인들 눈에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天尊地卑)’가 정상적인 이치로 여겨졌기에 인간 세상의 계층 구분 역시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치세(治世)’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유학이 곧 ‘치세위본(治世爲本, 치세를 근본으로 함)’이라 여겼고 현대인들이 비로소 그것을 ‘정치 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치세위본’ 혹은 ‘정치 중심’이라는 말만으로는 송명 이후 중화문화의 전모를 다 개괄하기에 부족하다. 비록 이 시기에 정치를 중심으로 한 요소가 점점 많아지고 짙어졌지만 중화문화 속에는 여전히 ‘회천위본(回天爲本, 회천을 근본으로 함)’의 요소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겠다.
(전문 끝)
원문발표: 2026년 7월 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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