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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음(忍)’을 닦은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그날 법공부 팀에서 나는 한 수련생에게 폭풍 같은 질책을 당했다. 그 당시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련생의 표현은 마치 미풍처럼 살짝 불다 지나갔으며 나에게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날 돌아온 후에 기묘한 느낌이 들었고, 신체의 매 세포에 말로는 할 수 없는 유쾌함이 있음을 느꼈다. 이 일로 나는 ‘참음’을 닦는 것에 대해 약간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에 나는 ‘참음’이란 우리가 억울함을 느끼고 상해를 입거나 불공평한 일 등을 당할 때 억제와 감당에 의한 것이라 여겼다. 바꿔 말하면 ‘참음’은 자신이 시련을 감당할 때의 일종 태도로서, 타인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고, 문제의 근원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지금 나는 갑자기 명백해졌다. 억울함을 지닌 이런 참음은 마침 자신의 사람 마음의 반영이고, 자신의 사람 마음이 건드려진 후의 표현인데, 단지 태도만 긍정적이고 이성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은 사실 자신에게 있다. 즉 어떤 일로 자신이 괴롭거나 ‘참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사실 그 일에서 자신에게 사람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버림이 없는 참음은 단지 형식과 표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참음은 역시 조건이 있고 최저선이 있는 것으로, 일단 최저선이 건드려지면 사람 마음이 곧 다시 솟구치며 심각할 때는 폭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순에서 자신이 인내하고 있음을 느낄 때는 반드시 자신에게 ‘버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하는데, 그런 느낌 뒤에 있는 각종 집착과 사람 마음을 버려야 한다.

모순에서 매 한 차례 참음과 버림은 모두 자신의 생명이 한 차례 실질적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에 빠져 시비를 논하지 않고, 모순의 표면에서 잘잘못을 보지 않으며, 신변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사부님께서 제고할 기회를 안배해주신 것이라고 믿는데, 모두 자신에게 제고해야 할 요소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갈수록 귀진(歸眞)하자 인내심이 고인 물과 같은 정도에 이를 수 있었고, 버림으로써 탄연해져 움직이지 않게 됐다.

사람 마음은 흔히 관념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을 기억하고 있기에 근본적으로 적지 않은 관념을 개변했고, 이로써 사람 마음도 적잖이 제거했다.

사부님께서 “수련의 이치는 사람의 이치와는 반대이기 때문이다.”[2]라고 말씀하셨다. 대법의 위력과 지혜가 나를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달음을 주었다. 이번에 갑작스레 찾아온 모순 속에서 바람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해냈다.

약간의 체득으로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잡아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서: ‘정진요지-무루(無漏)’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3/21/4221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