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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심 뒤에는 질투심이 있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에서는 ‘추천교류’, ‘금주의 핫리스트’ ‘이달의 핫리스트’라는 섹션 외에 ‘관심도[關注度]’를 새로 추가했다.(편집자 주: ‘관심도’는 글이 얼마나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는지 나타내는 것인데, 밍후이는 실제로 기사를 읽거나 공유한 횟수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중국 수련생들이 기사를 다운로드해 읽거나, 해외 기타 웹 사이트나 소셜미디어 플랫폼, 혹은 블로그에서 공유한 후의 조회수는 수집할 수 없기 때문임)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두어 번 훑어보고는 문장을 내려받았다. 그러다가 점차 관심을 두게 됐고 관심도 횟수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교하기 시작했다.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열렬히 주시했다.

점차 나는 관심도 높은 문장과 낮은 문장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일부 문장들은 관심도는 낮지만 관심도가 높은 문장보다 잘 썼고, 독자(수련생)의 공감(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자 이런 문장을 대신해 약간 불공평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됐지? 그냥 제목을 잘 달아서 사람들의 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아닌가?’ 그때까지도 나는 자신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인식하지 못했고, 마음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마음이 삐뚤어진 것도 모르고 또 안으로는 자신을 더욱 찾지 않아 객관적인 환경도 보지 못했다. ‘내용이 좋은 문장이 오히려 관심도가 낮은 것은 독자의 소양과 상태를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 여기에 내가 쓴 문장이 없고 나는 그냥 독자일 뿐이기에 나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냥 마음속에 자신의 견해를 약간 갖고 있었을 뿐 남에게 말하지도 영향을 조성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사부님 설법을 읽다가 갑자기 한 줄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절대로 대법 수련 중에서 집착심이 생기게 할 수 없으며 다만 당신으로 하여금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게만 한다.”[1]

나는 마음이 흠칫했고 멈춰서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자신의 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처음에 밍후이왕에 글을 올릴 때 나는 발표 여부에만 관심을 뒀다(마음은 평온한 상태에서의 일반적인 관심). 나중에 발표가 많아지면서 발표 여부에서 ‘밍후이주간’에 실렸는지로 전향하게 됐다. 왜냐하면 ‘밍후이주간’에 선정되면 광범위하게 전해지며(인터넷을 접속하지 않는 수련생들도 볼 수 있음) 또 방송으로도 제작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없던 집착심이 생기고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는데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도 다소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도 아주 은폐적이었다.

자신이 쓴 글이 ‘금주의 핫리스트’ 또는 ‘이달의 핫리스트’에 등장했을 때는 이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며 또 흐뭇해하며 약간 득의양양했는데 이미 아주 위험했다. 다행히 당시 스스로 이성적으로 그 위험을 인식하고 제때 급정거를 했으며,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고 사부님의 공로이며 사부님의 가지(加持), 도움과 점화라는 것, 또 밍후이 수련생들의 노고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신에게 경고했다. ‘하늘의 공적을 자기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영원히 겸손을 기억하라!’ 동시에 안으로 찾는 행복과 안으로 찾는 것은 정말로 법보(法寶)라는 것을 깊이 체험했다!

나는 이 일이 이렇게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밖에 이런 표면적인 집착의 배후에 문제가 또 있었다. 처음 ‘관심도’를 봤을 때 나는 무슨 내용인지 똑똑히 보지 않았고 줄곧 ‘조회수’로 생각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내 그 두 편의 문장이 지금 올려졌다면 얼마나 많은 조회수를 올렸을까?’라는 일념이 불쑥 나타났다. 잠깐 스쳐 지나갔기에 놓쳐버렸고 경각심을 갖지 못했다. 사실 나는 시종 문장들의 당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부동심(不動心)에서부터 동심(動心)-열심-관심-비교-불공평 호소–불복-경쟁심(명예를 추구하는 마음), 그리고 질투심에 이르렀다. 이 질투심은 정말 교활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명시하셨다. “질투심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우리가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2] 보다시피 질투심을 제거하는 것이 수련인에게는 얼마나 중요한가?

전통문화에 ‘군자는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으며,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 이루도록 도와주려는 개념이 없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바로 이 질투심과 쟁투심이 조성한 것이다. 사람들의 질투심은 보편적이면서도 강렬했다. 많은 나쁜 일들도 모두 이 질투심이 한 짓이다.

속인사회에서 수련하는 대법제자로서 이러한 사회환경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 속에서 이 질투심을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항상 찾아보고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놔두지 말고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수련을 망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개인의 인식으로서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뉴질랜드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1년 2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2/20/4210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