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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다

글/ 미서명(未署名)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법은 부동한 층차가 있으므로 법에 대한 수련자의 인식도 자신이 이 한 층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매 수련자의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1]

수련 중의 버림에 대해 나는 늘 혼돈했다. 무엇 때문에 버려야 하는가? 무엇이 진정한 버림인가? 그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살을 베어 비둘기를 구하다(割肉貿鴿)’는 불가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고대에 시비(屍毗)라는 한 왕이 있었다. 그는 모든 중생을 구하고 보살을 이루겠다고 맹세했다. 제석천(帝釋天)이 이를 알고 왕의 진심을 시험해 보고 싶어, 비수갈마천(毗首羯摩天)에게 비둘기로 변신하도록 명하고, 자신은 맹렬하게 비둘기를 쫓는 큰 독수리로 변했다. 비둘기는 공포에 질려 시비왕의 왕좌 앞으로 날아와 생명을 의탁했다. 동시에 독수리도 뒤쫓아와 왕에게 비둘기를 넘겨달라고 했다. 시비왕은 비둘기를 내어 주지 않고, 오히려 독수리에게 살생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독수리는 말했다. “왕이시여, 당신은 모든 중생을 구도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당신이 제 식량을 끊으면 저도 마찬가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설마 저는 모든 중생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시비왕은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살점을 잘라 비둘기의 생명의 대가로 독수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독수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당신은 모든 중생을 동등하게 대하셔야 합니다. 비록 제가 축생도(畜生道)에 속하긴 하지만 이치는 편파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살로 비둘기의 생명과 바꾸려 한다면 양자의 무게가 같은지 저울로 달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비왕은 옆 사람에게 저울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한쪽에 비둘기를 다른 한쪽에 벤 살점을 올려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시비왕의 몸에 있는 살점을 거의 자를 때까지 아무리 잘라도 저울 반대편 비둘기보다 항상 가벼웠다. 시비왕은 온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일어나 비둘기를 대신하여 온몸으로 저울판에 기어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체력이 부족해 땅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후 시비왕은 자책하며 말했다. “모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용감하게 일어서야 한다. 중생이 고해(苦海)에 빠져있고, 나는 그들을 모두 구도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이렇게 느슨하고 혼미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은 중생이 지옥에서 받는 고통보다 훨씬 적다. 지금 나는 지혜와 선정(禪定), 지계(持戒), 정진(精進) 등 선법(善法)의 공덕 축복이 있다. 만약 일시적인 육신의 받는 고통에 집착한다면, 지옥에서 심성이 혼미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시비왕은 살점이 떨어져 피가 흐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소원을 빌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 또 한 번 쓰러지기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안간힘을 써서 일어났다. 마침내 시비왕은 저울판에 올라갔고, 순식간에 양쪽이 평형을 이루었다.

순간, 천지가 진동하고 바다가 파도를 일으켰으며, 고목에도 아름다운 꽃이 피고, 하늘에서는 향수 비와 향긋한 꽃잎이 쏟아졌다. 독수리는 원래 제석천왕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시비왕의 몸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모든 중생을 구도하려던 자비로운 소망을 성취했다. 시비왕은 보살행을 하던 석가부처님의 전생이다.

시비왕은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었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여전히 지켜주려고 했고,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구도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 비둘기의 생명을 우선시했기에 달갑게 당연히 미련 없이 베어버린 것이다. 그가 불평도 망설임도 인색함도 없었던 것은 이미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으로 만물에 자비를 베풀고, 창생을 보호하고, 중생을 구도하려면 진정으로 자아와 이기심,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심성을 제고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우리의 대법 수련은 과거의 이런 형식을 취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신에게 묻곤 한다. ‘왜 19년 전 창춘(長春) 삽입방송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나는 지금 작은 일을 하나 하고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가? 왜 어떤 수련생은 진상을 알려 하루에 수십 명씩 탈퇴시키는데 나는 아직도 가족조차 몇 명 탈퇴시키지 못하는가? 왜 어떤 수련생은 감옥에서 석방된 직후 바로 세인과 직접 대면해 자료를 주지만 나는 왜 해낼 수 없는가?

사실 그들이 정념이 강한 것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의 일체를 내려놓을 수 있고, 태연하게 버릴 수 있었기에 정정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입으로는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마음은 근본적으로 내려놓지 못했다. 즉 해내지 못한 모든 것은 모두 마음에서 진정으로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쉽다, 사람의 것을 버리기 아쉬워하면 신의 것을 얻지 못하고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오래오래 전 우리가 사부님을 따라 층층이 아래로 걸어 내려올 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최고의 왕좌를 포기하고, 신선 세계와 결별했으며 금옥만당(金玉滿堂)을 버렸다. 천국의 가족과 결별하고 유유자적[自在逍遙]을 포기했다. 우리는 조사정법(助師正法)을 결심했고 중생을 구도하고 고생을 감당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당시 우리는 모든 것을 조금도 주저 없이 포기했고 심지어 신의 신체까지도 완전히 철저히 벗어버렸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종종 두려움 때문에 당당하게 대법을 실증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 정념으로 중생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가능하게 약간의 이익을 위해 사람과 다투거나 싸우고, 순간의 편안함이 아쉬워 일찍 일어나 연공하는 것을 꺼리며, 육신이 받는 고통이 두려워 비겁하게 사악에 타협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물어본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심과 두려움 없이 의기가 하늘을 찌르던 대법제자여, 그는 아직 있는가? 그는 속인의 그 보잘것없는 물건을 여전히 감히, 기꺼이 버릴 수 있는가?

한 수련인이 만약 수십 년간 수련해왔지만, 여전히 속인의 애착을 놓지 못한다면, 사실은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내려놓을 수도 없고, 전심전력으로 사람을 구하기는 더더욱 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각자의 내려놓음은 사심이 없는 것이며, 진정한 부처의 희생은 철저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사심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고, 그가 말한 진상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골수를 정화하고 천지를 진동할 수 있으며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예를 위해 싸울 때, 이익을 위해 붙잡고 놓지 않을 때, 분해서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 애정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 자신이 태연하게 버렸던 과거와 시비왕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사부님의 설법 두 단락을 공부합시다.

“수련은 곧 이 마난(魔難)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칠정육욕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담담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이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수련해 내지 못한다.”[2]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으니, 깡그리 버리는 것만이 누락이 없는 더욱 높은 법리(法理)이다.”[3]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저작: ‘정진요지–무루(無漏)’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원용(圓容)’

 

원문발표: 2021년 1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1/24/418987.html